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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에서 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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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은 (지은이)
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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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에서 유
eBook 미리보기

책 정보

· 제목 : 유에서 유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시 > 한국시
· ISBN : 9788932028842
· 쪽수 : 217쪽
· 출판일 : 2016-08-08

책 소개

오은의 세 번째 시집. 오은의 시를 ‘오은의 시’답게 만드는 유쾌한 말놀이와 단어들이 제공하는 재미는 여전하지만, 그 이면에 자리한 사회의 부조리를 향한 거침없는 폭로와 상처, 어둠, 쓸쓸함 등의 감정을 기록해내고자 하는 의지는 더욱 강해졌다.

목차

1부 깃털을 보았다
계절감 /아찔 /옛날이야기 /공포 /미시감 /오늘 치 기분 /아무개 알아? /구멍 /미완 /뭉클 /폭우 /너무 /일주일 /아저씨 /풀쑥 /대중 /밤에만 착해지는 사람들

2부 유에서 유를
말맛 /마술 /문법 /필요불충분조건 /지면 /빛 /구원 /트라이앵글 /표현 /다움 /만약이라는 약 /이상한 접속어 /말실수 /책 /읽다 만 책

3부 투명 위에 투명이
손 /내일의 요리 /백화점 /차악 /우리 학원 /샬레 /척 /합평회 /승부처 /졸업 시즌 /서바이벌 /청춘 /어른 /질서 /폼 /반의반 /청문회

4부 나머지 말
좋은 냄새가 나는 방 /움직씨는 움직인다 /우발적 /애인 /함구하는 손 /짠 /느낌 /맥거핀 /묵묵 /문탠 /절반이라는 짠한 말 /홀 /흡혈성 /시간차공격 /오픈 /나머지

해설 | 놀이와 혁명・권혁웅

저자소개

오은 (지은이)    정보 더보기
어릴 적에는 회색을 가장 좋아했다. 그래서인지 갈피를 못 잡고 언제나 오락가락 정신없었다. 변덕이 죽 끓듯 했고, 머릿속으로 그 죽을 끊이다가 새까맣게 태워먹기 일쑤였다. 빨간색이라는 이유로 피와 고깃덩어리를 무서워했고, 같은 이유로 사과와 우체통을 마음에 두었다. 같은 빨간색이라도 채도와 명도에 따라 다채로운 감정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을 알았다. 부잣집 아이들처럼 은색과 에메랄드색이 포함된 64색 크레파스를 갖고 싶었다. 중고등학교에 다닐 때에는 원색은 좋아했지만 원색적인 말은 싫어했다. 한마디로 평범했단 소리다. 특히 푸른색에 열광했는데, 등굣길에 하늘을 올려다보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시간 날 때마다 휘파람을 불었지만 쇳소리 말고는 아무것도 새어나오지 않았다. 내 힘으로 할 수 없는 것들을 묵묵히 인정하게 되었다. 키는 쑥쑥 자랐지만, 노래방에서는 외려 키를 낮춰야만 했다. 시험을 망친 날에는 하늘이 노래지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청포도 맛이 나는 연두색 사탕을 아작아작 깨물어 먹는 일이 잦았다. 이십대에는 하늘과 바다를 보는 일이 현저히 줄어들었다. 대신, 빨간색이 식욕을 돋우는 색이라는 사실을 몸소 깨달았다. 선홍색 꽃등심이 회색으로 변할 때는 왠지 모르게 서글퍼졌다. 더이상 나는 회색을 동경하는 어린아이가 아니었던 것이다.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20년 넘게 쓰고 있던 색안경들을 손수 하나씩 벗었다. 하얀 종이에 까만 글자들을 채워넣는 일은 어느새 인생의 커다란 부분이 되어 있었다. 펜이 칼보다 강하다는 사실을, 개중 빨간 펜이 가장 무시무시하다는 사실을 새삼 절감했다. 서른이 된 지금은 연두색을 가장 좋아한다. 먼셀 표색계에서 5GY 7/10에 해당하는 바로 그 색 말이다. 연두라는 말에는 모종의 가능성이 담겨 있다. 앞으로 더 짙어질 거라는 희망도 있고 무럭무럭 자라나 누군가에게 그늘을 선사해주겠다는 당찬 의지도 있다. 무엇보다 연두는 철들지 않아서 좋다. 철이 들면 색은 짙어지고 무거워지고 참을 수 없이 끈적끈적해진다. 나는 아마 평생 철들지 못할 것 같다. 그리고 지금, 레드와 옐로의 계절을 지나 화이트와 블랙의 계절을 거쳐 그린과 블루의 계절이 다가오고 있다. 고유의 색을 잃지 않으면서도 색다르게 사는 법이 필요한 때가, 또다시 찾아든 것이다. 2002년 『현대시』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호텔 타셀의 돼지들』 『우리는 분위기를 사랑해』 『유에서 유』 『왼손은 마음이 아파』 『나는 이름이 있었다』 『없음의 대명사』, 청소년 시집 『마음의 일』, 산문집 『너는 시방 위험한 로봇이다』 『다독임』 『초록을 입고』 『뭐 어때』 『밤에만 착해지는 사람들』 등이 있다. 박인환문학상, 구상시문학상, 현대시작품상, 대산문학상, 시인수첩작품상을 수상했다. 작란作亂 동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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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 뒤표지 글

마음이 가는 걸, 기울어지는 걸,
와르르 쏟아져버리는 걸 어떻게 하니.


좋아하는 단어가 사라지는 꿈을 꿨다. 잠에서 깨니 그 단어가 기억나지 않았다. 거울을 보니 할 말이 없는 표정이었다.

어느 날 우리는 같은 시간 다른 공간에서 같은 음악을 다른 기분으로 듣는다. 종착역보다 늦게 도착한다. 만남은 성사되지 못한다. 선율만 흐를 뿐이다.

들고 있던 물건들을 다 쏟았다. 고체가 액체처럼 흘렀다. 책장에 붙어 있던 활자들이 구두점을 신고 달아난다. 좋아하는 단어가 증발했다.

불가능에 물을 끼얹어. 가능해질 거야. 쓸 수 있을 거야. 가능에 불을 질러. 불가능해질 거야. 대단해질 거야. 아무도 쉽게 건드리지 못할 거야.

10년 전 오늘의 일기를 읽는다. 날씨는 맑음. 10년 후 오늘은 비가 내린다. 오늘에서야 비가 내린다. 지우개 자국을 골똘히 바라본다. 결국 선택받지 못한 말들, 마침내 사랑받지 못한 말들이 있다. 다만 흔적으로 있다.

어느 날 우리는 같은 공간 다른 시간에서 다른 음악을 같은 기분으로 듣는다. 시발역보다 일찍 출발한다. 불가능이 가능해진다. 착각이 대단해진다.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는 사람이 오늘 저녁에 무얼 먹을지 고민하는 찰나, 식당 하나가 문을 닫았다. 메뉴들이 울상을 짓고 있다. 배 속이 끓고 있다. 턱턱 숨이 막히고 있다. 당장, 당장.

시공간이 한 단어에 다 모였다.
―「아찔」 전문


학교에 있던 학생들이
학원에 고스란히 앉아 있었다
준비물처럼
책상 위에 가만히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사용되었지 우리 학원에서
우리가 우리를 사용할 때
우리는 주어일까 목적어일까
영어 선생님이 물었지
자기도 모르면서
학생이었으면서
옛날에 우리 학원에 다녔으면서
샤프심처럼 뚝뚝 끊어지고
지우개처럼 똥을 끌고 다니고
자처럼 재기 바쁘다가
노트처럼 갈가리 찢어졌으면서

국어 영어 수학 과학 사회 음악 미술 체육
비결은 있었지만 도덕은 없었다
노트는 있는데 샤프가 없는 상황처럼
샤프는 있는데 샤프심이 없는 상황처럼
샤프심은 있는데 지우개가 없는 상황처럼
매시 매분 매초가
부족했다 위태로웠다

그래도 지구는 돌고

사회를 미처 다 배우지 못하고
사회에 투입되었던 학생들이
학원에 고스란히 앉아 있었다
준비가 완료된 준비물처럼
입을 앙다물고
마지막 학원에
마지막을 위한 학원에
죽을 준비를 도와주는 학원에

준비물은 둘 중 하나만 있어도 되었다
노쇠하고 병든 몸뚱이나 살고 싶지 않은 마음
우리 학원에는
이미 늙거나 벌써 아픈 우리가
우글우글 들끓었다
우리 학원에서 한 번쯤 만났던 친구들이
각도기처럼 앞과 좌우만 볼 수 있었던 친구들이
완벽한 준비물이 되어
360도 회전이 가능한 컴퍼스가 되어
샤프심이 장전된 샤프가 되어

우리 학원인데
우리 것은 아닌
국어 영어 수학 과학 사회 음악 미술 체육처럼
한 번도 우리 것인 적은 없었던
우리 학원에

더 이상 준비하지 않기로 마음먹은
준비물들이 있었다
원생이기를 이제 그만 포기하기 위해
난생처음 순순히
학원에 발 들인 학생들이 있었다

수업이 시작되었다

우리가 우리라고 말할 때
목적어에서 주어가 될 때
보어 없이도 완전해질 때

비로소 대명사가 된
우리는 뒤를 돌아보며
도덕은 다음 생에서 배우기로
―「우리 학원」 전문


도서 DB 제공 : 알라딘 서점(www.alad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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