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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다 비유 : 돌아온 탕자 이야기

열린다 비유 : 돌아온 탕자 이야기

류모세 (지은이)
  |  
두란노
2011-05-30
  |  
12,000원

일반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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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다 비유 : 돌아온 탕자 이야기

책 정보

· 제목 : 열린다 비유 : 돌아온 탕자 이야기 
· 분류 : 국내도서 > 종교/역학 > 기독교(개신교) > 성경의 이해
· ISBN : 9788953116047
· 쪽수 : 232쪽

책 소개

류모세 선교사와 함께 떠나는 '열린다 비유' 두 번째 여행. 류모세 저자는 비유에 등장하는 세 명의 캐릭터, 즉 아버지, 첫째 아들, 둘째 아들 이야기를 균등하게 안배하려고 노력했다. 그것만이 예수님께서 각각의 독특한 캐릭터들을 통해 보여 주시고자 한 하나님 나라가 잘 드러나리라 확신했기 때문이다.

목차

프롤로그 성경을 주신 하나님에 대한 예의
돌아온 탕자의 비유 성경 구절

01.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왜 예수님을 비난했을까?
성서시대의 테이블 매너(식탁 교제)

02. ‘돌아온 탕자의 비유’, 과연 비유의 적절한 제목인가?
세 명의 주인공: 아버지, 형 그리고 동생

03. 둘째 아들을 왜 ‘탕자’라고 하는가?
성서시대의 재산상속법

04. 아버지는 왜 순순히 유산을 나누어 주었을까?
하나님은 힘없는 전능자(?)

05. 첫째 아들을 왜 ‘탕자’라고 하는가?
성서시대 장자의 위치와 본분

06. 탕자가 간 먼 나라는 어디일까?
이스라엘 땅에 누비이불처럼 들어와 있던 이방인 도시들

07. 탕자는 왜 갑자기 마음을 돌이켰을까?
돼지치기와 쥐엄열매가 주는 상징들

08. 탕자는 왜 자신을 품꾼의 하나로 여겨 달라고 했을까?
참된 회개에 대한 가장 생생한 표본

09. 아버지는 왜 먼저 달려가 아들에게 입 맞추고 포옹했을까?
성서시대, 목숨보다 중히 여긴 수치와 명예

10. 아버지는 왜 살진 송아지를 잡는 성대한 잔치를 배설했을까?
신발, 제일 좋은 옷, 반지 그리고 살진 송아지가 주는 의미

11. 첫째 아들은 동생의 귀향 소식에 왜 ‘폭풍 분노’를 보였을까?
첫째 아들, 불평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대역

참고도서

저자소개

류모세 (지은이)    정보 더보기
오직 ‘선교’ 오직 ‘말씀’을 푯대로 하나님께 붙잡혀 산 그에게 아직 달려가야 할 길, 주께 받은 사명이 남아 있다. 한의사, 이스라엘 선교사를 거쳐 그는 이스라엘 선교와 회복을 알리는 문서사역자이자 성경을 사랑하는 이 시대의 성경교사로 종횡무진 활약하고 있다. 남은 사명을 감당하되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을 찾고 찾아 구원하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품은 이스라엘 선교사 된 정체성을 가진 사명자로서 오늘도 묵묵히 그 길을 가고 있다. 저서로 《열린다 성경 난해구절 1》(규장), 《열린다 성경》 전 7권, 《열린다 비유》 전 3권, 《이슬람 바로보기》, 《유대인 바로보기》, 《역사 드라마로 읽는 성경》 신구약편 전 6권(두란노), 《체질을 알면 사람이 보인다》(고려원)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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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1세기 이스라엘 사회에서 종교적 주류를 차지하던 바리새인들의 눈에 예수님은 어떻게 비쳐졌을까? 확실한 사실은 예수님이 잘 짜인 사회 질서를 위반하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인물, 즉 사회적 일탈자로 인식되었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공개적으로 식탁 교제를 즐기던 세리와 죄인(창기)들은 바리새인들이 이방인처럼 혐오하던 그룹이었다.
예수님은 여인들과도 공개적으로 어울리셨는데, 이것은 당시의 사회적 통념에서 볼 때 ‘희대의 스캔들’로 비쳐졌을 것이다. 이런 상황은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닦은 마리아를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요 12:3).
남녀가 한 식탁에서 교제하는 것을 금하던 1세기 이스라엘 사회에서 예수님의 식탁에 여인 마리아가 나타났을 뿐 아니라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을 닦는 모습은 분명 바리새인들을 충격과 경악으로 몰아넣었을 것이다.
또한 예수님은 어린아이들도 자신의 사회적 동아리(천국) 속에 포함시키셨다. 당시는 어린아이들, 특히 여자아이들이 노예처럼 간주되던 시기였음을 감안할 때, 다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은 대단히 혁명적인 선언이었음을 알 수 있다.
“예수께서 그 어린아이들을 불러 가까이하시고 이르시되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눅 18:16).
이처럼 공생애 사역 내내 예수님이 교제를 즐기던 자들은 당시의 종교적 주류인 바리새인들의 기준으로 볼 때 교제를 금해야 하는, 최소한 꺼려야 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같은 이스라엘 백성이지만 바리새인들이 규정한 사회적(종교적) 경계라는 기준에서 볼 때 경계를 벗어난 사람들(outsider), 즉 이방인처럼 버려진(outcast) 사람들이다.
그러면 예수님은 왜 사회적 이상 행동자요 일탈자란 비난을 감수하면서까지 집요하게 이들과 계속 교제하신 것일까? 예수님은 목자의 마음을 가지고 양의 우리에서 벗어난, 아니 당시 목자임을 자처한 종교지도자들이 양의 우리(sheepfold) 바깥으로 내다 버린 ‘잃은 자’(outcast)들을 적극적으로 찾아 나서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예수님이 자칫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감당해야 할 최고의 미션이었던 것이다. 예수님은 이 미션을 감당하기 위해 당시 강력하게 드리워져 있던 사회적 통념과 금기를 과감하게 깨어 부수셨다.
아울러 예수님이 베푸신 식탁에 각종 죄인들과 사회적 약자와 소외자들이 함께할 수 있었던 것은 영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이것은 장차 천국에서 이루어질 식사를 예표하는 구속사적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바리새인들은 종말 이후 천국에서 베풀어질 잔치에 이방인과 죄인들은 철저히 제외되고 자신들과 같은 의인의 회중만 참여할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 땅에서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공동 식사를 실행하심으로써 그 어떠한 사회적, 종교적 차별도 과감히 철폐하신 것이다. 아무에게나 열린 공동 식사는 철저한 평등주의, 즉 구성원들 사이에 어떤 차별도 용인하지 않고 그들 중에는 어떠한 계급 조직도 필요하지 않다고 보는 인간 평등사상의 구현이며 상징이다. 예수님이 베푸신 열린 공동 식사야말로 오늘날 유행하는 열린 예배의 참된 모델이 아닐까? 아울러 여전히 계급적 차별이 존재하는 현대의 교회(특히 강남의 대형 교회들)에 던지는 강력한 경고요 경종이 아닐까?


비유를 통해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참된 목적은 당시 청중에게 친숙한 캐릭터와 이미지를 사용해서 하나님의 속성과 그분께 대한 인간의 마땅한 도리를 가르치는 데 있다. 둘째 아들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거부하고 반역해 자기의 길을 가는 사람의 전형이다. 첫째 아들은 하나님을 종교적 관습으로 열심히 섬기지만 그분의 위대한 사랑을 오해하고 그 속에 쓴 뿌리를 품고 있는 사람의 전형이다. 첫째 아들은 존경 받고 거룩하게 보이는 죄인의 전형이고, 둘째 아들은 만인의 지탄을 받는 죄인의 전형이다. 스타일만 다르지 결국 두 아들은 모두 아버지의 용서와 사랑이 필요한 죄인일 뿐이다. 우리는 스타일이 다른 두 종류의 죄인을 통해 나의 모습을 발견하고 찔림과 도전을 받아야 한다. 모든 인간은 결국 두 종류의 죄인 중 반드시 어느 한 부류에 속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 복음의 단순함이 얼마나 영광스러운지, 감히 헤아릴 수 없을 만큼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부요한지, 심히 괴로울 정도로 인간의 부패가 얼마나 뿌리 깊은지, 하나님의 은혜로운 구원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천국의 기쁨이 얼마나 경이로운지에 대해 심오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이 비유가 탄생한 상황과 목적 그리고 교훈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볼 때 오히려 ‘사랑이 많은 아버지와 잃어버린 두 아들의 비유’란 제목이 더 타당하지 않을까 싶다. 지금부터 우리는 잃어버린 두 탕자를 향해 두 팔을 벌리고 사랑하고 용서하는 아버지를 만나러 가는 여정을 출발하고자 한다.


멀쩡히 살아 있는 아버지에게 당당히 유산을 달라고 요구한 둘째 아들의 행위는 삽시간에 온 마을에 퍼져 나갔고 사람들의 관심과 이목은 순식간에 아버지의 행동에 모아졌을 것이다. 비유를 듣는 청중도 귀를 쫑긋 세우고 그 호기심의 대열에 동참했다. 과연 아버지는 이 되바라진 아들을 어떻게 치리할 것인가?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둘째 아들은 공개적인 수치와 함께 심하면 돌에 맞아 죽는 것도 각오해야 할 상황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탁월한 스토리텔러이신 예수님은 이곳에서 청중의 기대와 예상을 완전히 뒤집어엎는 놀라운 반전을 시도하신다.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눅 15:12).
아버지는 놀랍게도 그토록 반항적인 아들의 요청을 순순히 들어주었다. 아버지가 자식에 대한 전권을 휘두를 수 있는 당시 사회에서 이 아버지는 자신의 가부장적 권위를 털끝만큼도 사용하지 않는다. 이 대목은 둘째 아들의 반항보다 청중을 더 충격에 빠뜨려 곳곳에서 절망과 울분이 짙게 담긴 장탄식이 흘러 나왔을 것이다.
그렇다면 비유 속에 등장하는 이 아버지는 자신의 명예 따위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는 ‘무척추동물’이라도 된단 말인가? 왜 이 아버지는 막강한 가부장적 권위를 이용해 망나니 같은 아들을 따끔하게 호통이라도 치지 않는단말인가? 이 아버지는 과연 바보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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