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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에세이 > 한국에세이
· ISBN : 9788958244882
· 쪽수 : 244쪽
· 출판일 : 2023-11-08
책 소개
목차
작가의 말 • 4
작품해설 | 김길웅(수필가·문학평론가)• 221
1부 추억의 소리
석양을 품은 섬 • 13
추억의 소리 • 18
봄 마중 • 23
야고 • 28
사라져 가는 우리 말 • 33
자동차를 보내며 • 37
속 빈 강정 • 41
슬픈 기억 • 45
마법의 말 • 52
2부 어머니의 재봉틀
어머님의 침묵 • 59
작은 거인 • 64
어머니의 장도리 • 69
영원한 휴식 • 74
어머니의 재봉틀 • 78
보자기 • 83
어머니의 우미 • 88
그동안 수고하셨습니다 • 92
3부 마지막 자리
마중물 • 99
추억을 사다 • 103
갯담 • 108
걸궁 • 113
곰삭다 • 117
흐뭇한 달빛 • 121
마지막 자리 • 125
맷집 • 130
아기천사였다 • 135
4부 시대를 앞선 여성 –부춘화-
텃밭 이야기 • 143
7월의 벚꽃 아래 • 148
여무는 들녘 • 152
시대를 앞선 여성 -부춘화- • 156
가을을 걷다 • 163
마당이 주는 풍요 • 170
뜻밖의 호사 • 174
비자나무 • 179
영등할망 신화공원을 다녀오다 • 182
5부 다랑쉬의 매력을 되찾았으면
윤동주를 그리다 • 189
농업인과 선글라스 • 192
되가져오기로 버려진 양심 찾기 • 195
따뜻한 감동 • 198
레몬차를 만들다 • 201
다랑쉬의 매력을 되찾았으면 • 204
작은 관심에서부터 • 207
재건학교를 아시나요 • 210
재래시장이 변해야 한다 • 213
고급 쓰레기는 • 216
저자소개
책속에서
쇠로 된 손잡이가 쇠머리 중간에 꽉 물려있다. 작지만 듬직하다. 쇠머리 뒷부분은 재봉틀 노루발처럼 휘어 있고, 손잡이 끝은 물고기 꼬리 모양으로 가운데를 중심으로 키 모양으로 둥그스름히 비어있다. 키 모양의 파인 홈으로 맞물린 못을 살짝 끌어 올리고 노루발처럼 둥근 부분으로 ‘툭’ 빼면 되었다. 어머니는 늘 그랬다.
어머니의 장도리는 특이하게도 쇠 손잡이로 지금의 나무 손잡이와는 사뭇 다르다. 크지도 않다. 성인 손으로 겨우 한 뼘 정도다. 내가 기억하는 시절을 계산해보면 최소 오십 년은 되었다. 그동안 세월의 흔적을 간직이라도 한듯 장도리는 본색을 잃어 지금은 거무죽죽하다.
어머니의 유품을 정리하다 버리지 않고 거제에서 제주로 다시 공수해 왔다. 아마 동생도 어머니 손에 늘 쥐어있던 모습에 선뜻 어쩌지 못했으리라. 아들을 따라나선 어머니의 살림살이에 장도리도 한 가족이 되었다. 도착한 짐을 정리하던 동생이 어릴 적에 보아왔던 장도리를 거제까지 가지고 왔다며 전화가 왔다. 농담 삼아 어머니에게 장도리는 남편이나 마찬가지이니 나중에라도 버리지 말라며 웃어넘겼다.
그랬던 장도리가 며칠 전 내게 왔다. 어머니 돌아가시고 차마 버리지 못해 보관하다 제주까지 가지고 왔단다. 하찮은 것 같은데도 질긴 인연이다. 신문지에 돌돌 말린 장도리를 보는 순간 울컥했다. 어머니 손에는 늘 장도리가 들려 있었고, 그것은 남편의 빈자리를 대신한 우리 집의 살림꾼이었다.
장도리는 손수레 창고를 만들 때도 어머니와 함께했다. 돌담 울타리를 벽 삼아 나무 기둥을 세우고 곱게 엮은 짚으로 벽을 만들었다. 지붕도 서까래 위에 잔가지를 걸친 후 띠를 씌우니 그럴듯한 창고가 되었다. 문도 없고 한 평도 안 되는 작은 공간이었지만, 어머니에게는 소중한 허드레 곳간이었다. 겨울철이면 무청 시래기가 벽에 걸려 있고, 쓰다 남은 거름도 꽁꽁 싸매 손수레 안에 둔다. 작은 농기구는 쉽게 찾을 수 있게 벽에 걸어 두었다. 손바닥만한 공간이지만, 어머니에게는 아주 요긴한 곳이었다.
어느 날 태풍으로 날아간 지붕과 벽이 최신식 자재인 함석으로 새롭게 탄생하였다. 아마 이때도 어머니는 이 장도리와 함께하지 않았을까. 학교에 갔다 왔더니 창고가 깔끔히 단장 되어 있다. 모든 게 귀하던 시절이라 목재에서 뺀 못을 다시 쓰기 위해 휘어진 못을 잡고 장도리로 곱게 다듬었을 어머니이다.
어머니가 이 장도리를 유독 소중히 간직한 이유를 알 것 같다. 가장의 빈자리를 대신해 홀로 네 남매를 키우기에는 버거웠으리라. 버릴 법도 한데 녹이 슨 못을 빼며 마음속 응어리보다 더한 말로 다부진 속내를 드러낸다. “이놈이 못은 왜 이리 빠지지 않고 애를 먹이냐, 그래 네가 이기냐 내가 이기냐 보자.” 끝내는 못을 뺏다. 그때, 마음의 응어리까지 뺀 듯 어머니의 흐뭇한 표정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어머니는 장도리로 박힌 못만이 아니라 마음의 못도 빼었던 것은 아닐까. 마음의 못이든 박힌 못이든 오랫동안 제거하지 않으면 상처가 된다. 마음속에 맺힌 응어리는 병이 되고 나무에 박힌 못은 녹이 슬어 삭는다. 그래서 어머니는 마음의 응어리를 빼기 위해 망치가 아닌 장도리를 선택했는지도 모르겠다.
어머니는 새 생명의 탄생을 위해 못을 박았다. 망치질 한 번에 시름을 내려놓고 망치질 두 번에 마음 다짐을 굳게 한다. 그래서 장도리 손잡이가 반들거릴 정도로 못질
하지 않았나 싶다. 이렇게 어머니의 장도리는 남편의 빈 자리를 지키는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애잔하다, 어머니의 장도리. 얼마나 손때가 묻었으면 이리도 매끄럽고 윤이 날까 싶다. 어머니의 체취를 느끼려 장도리 손잡이를 잡는다. 별이 차가운 밤, 방금 구워낸 고구마를 품에 안은 느낌이다. 차가운 듯하면서도 따스한 어머니의 손길이 느껴진다. 어머니는 늘 이 장도리로 묵은 때를 걷어 내 새 생명으로 부활시켰다. 떨어진 문고리를 붙이고 헐거워진 나무 의자를 살려냈다. 어느 날에는 휜 경첩을 떼어내고 새 경첩을 달아 깔끔하게 문짝을 정리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