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o
logo
x
바코드검색
BOOKPRICE.co.kr
책, 도서 가격비교 사이트
바코드검색

인기 검색어

실시간 검색어

검색가능 서점

도서목록 제공

명량

명량(鳴梁) 이순신(李舜臣)

노기욱 (지은이)
전남대학교출판부
17,000원

일반도서

검색중
서점 할인가 할인률 배송비 혜택/추가 실질최저가 구매하기
알라딘 로딩중
yes24 로딩중
교보문고 로딩중
11st 로딩중
영풍문고 로딩중
쿠팡 로딩중
쿠팡로켓 로딩중
G마켓 로딩중
notice_icon 검색 결과 내에 다른 책이 포함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중고도서

검색중
서점 유형 등록개수 최저가 구매하기
로딩중

eBook

검색중
서점 정가 할인가 마일리지 실질최저가 구매하기
로딩중

책 이미지

명량
eBook 미리보기

책 정보

· 제목 : 명량(鳴梁) 이순신(李舜臣) 
· 분류 : 국내도서 > 대학교재/전문서적 > 인문계열 > 역사학
· ISBN : 9788968491634
· 쪽수 : 320쪽
· 출판일 : 2014-12-08

책 소개

전남대 노기욱 문화재학박사가 지난 2008년 ‘임진 의병장 금계의 금계집 국역’, 2013년 ‘삼역 이인행 평전’에 이어 펴낸 책이다.

목차

머리글 5

若無湖南 是無國家 鳴梁と 李舜臣 / 10

1장 보성 <방부인전> 열선루 길 / 13
2장 고흥 발포진(鉢浦鎭) 거북선 선소 길 / 18
3장 여수 전라좌수영 본영 길 / 28
4장 ‘부디 가서 나라의 치욕을 크게 씻어라’ / 83
5장 전라도 민정시찰 길 / 111
6장 충무공 이순신 백의종군 길 / 142
7장 조선수군재건 길 / 181
8장 울돌목 명량대첩 길 / 202
9장 고하도 삼도수군통제영 길 / 228
10장 순천 예교성 조ㆍ명 연합수군 광양만 승전 길 / 264

부록_ 충무공 이순신 연표 / 291
찾아보기 / 298

저자소개

노기욱 (옮긴이)    정보 더보기
호남의병연구소 소장, 전라남도이순신연구소 소장, 전남대학교 문화유산연구소 연구원(2018~현재), 전라남도 명량축제위원회 이사(2020~현재). 『무안군사; 임진의병사』(무안군, 2023), 『디지털광주문화대전(인물사)』(광주광역시, 2021) 외 다수 저술.
펼치기

책속에서

[머리말]

하나님은 분명 우리 민족을 위해 이순신(李舜臣)을 보내셨다. 16세기 동아시아에서 일어난 세계대전인 임진왜란을 종식시킨 당사자이기 때문이다. 조선(한국)은 전쟁을 일으킨 왜적(일본)에 맞서 사력을 다해 싸웠다. 전쟁의 심각성을 인지한 명나라(중국)는 조선에 지원군을 파병하였다.
당시 조선은 인구 6백만 명으로 병적상 20만 명의 군인이 있었다. 일본은 인구 1천만 명에서 총33만 명의 침략군을 동원할 수 있었다. 조선을 지원한 명나라는 인구 6천여만 명으로 319만 명의 대군이 제도상으로 존재하였다. 조선과 명나라의 국제 협력 체제에 반발한 일본의 도발로 전쟁이 발발하였다. 조선은 7년간 전쟁에 시달렸다.
이 전쟁에서 조선의 수많은 백성과 선비와 관리들이 의병이 되거나 관군이 되어 나라를 위해 싸웠다. 그 중에서도 이순신은 해전에서 조선수군을 이끌어 일본군을 물리쳤다. 『일본사』의 저자, 포르투갈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는 조선으로 입도하는 일본군 함선에 승선하여 전장의 현장을 목도하였다. 그가 본 조선수군은 월등한 항해술로 일본군 함선을 발견하면, 즉시 달려들어 화포로 요격시키고 나포하였다.
이순신이 이끈 조선수군은 동아시아 최강의 함대였다. 임진왜란 중 40여 회의 해전에서 승리하였다. 이순신의 이러한 승리요인은 식량, 군사, 무기, 전선 등의 병참물자 확보에 있었다. 이순신이 임진왜란 발발 당시 주둔한 본영과 병참근거지가 전라도였다. 전라도 연해안 백성들은 이순신의 관활 5관 5포에 예속되어 병참물자 지원에 앞장섰다.
1593년 이순신은 전라좌수영에서 가까운 고음천(웅천동 송현 마을)에 어머님을 모셔 두고 문안을 드렸다.
그러나 이순신은 1597년 2월 조정을 기망하고 명령을 위반한 죄목 등으로 의금부에 하옥되어 28일간 고초를 겪었다. 4월 1일 옥문을 나와 서울에서 초계까지 백의종군(白衣從軍) 고난의 길을 나섰다. 어머니에 대해 각별했던 이순신은 아산에서 뜻하지 않게 어머니의 상을 당하였다. 이순신은 어머니의 상조차 제대로 치르지 못하고 남행길에 올랐다. 4월 26일부터 구례, 순천, 하동을 거쳐 5월 26일 합천 도원수 권율 진영에 합류하였다. 약 두 달 동안의 힘든 행로에 이순신은 전라도의 옛 동지, 군관, 부하들을 만나며 전란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7월 칠천량 해전의 패전으로 조선수군은 심대한 타격을 입었다. 이 소식을 들은 이순신은 일본군이 곧 전라도로 들이닥칠 것을 걱정하였다. 8월 3일 삼도수군통제사 교서를 받은 즉시 구례에 도착하여 군관 9명과 병사 6명이 모여 전략을 구상하였다. 이순신은 전라도 내륙을 돌며 군사를 모으고 식량과 무기를 모았다. 구례 명협정, 곡성 강정, 순천 동헌, 보성 열선루를 거쳐 8월 17일 보성 군영구미에 도착하였다. 이순신의 보름간의 행보는 군관 송대립, 손인필, 황대중, 마하수, 김명립 등과 전남 곳곳을 돌며 피란민을 모아 무너진 조선수군을 재건하는 것이었다. 9월 16일 조선수군은 13척의 배로 명량 울돌목으로 일본 수군을 유인하여 적선 133척을 물리치고 그 중 31척을 격파하였다. 그 후 칠천량 해전으로 파괴된 한산도 통제영을 대신하여 목포 고하도, 완도 고금도에 통제영을 설치하여 이순신은 수군 전력 복구에 힘썼다.
2011년 전남도청은 구례, 순천, 하동 구간 119km를 정비하여 이순신의 백의종군 당시의 행적을 따라 역사 체험장과 문화 관광지를 조성한 ‘남도 이순신 백의종군로’ 조성사업을 마무리 지었다. 백의종군로 정비사업은 이순신이 백의종군했다가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용되기 직전의 행적을 역사관광 탐방로로 조성한 것이다. 최근에는 화개장터를 시작으로 구례, 곡성, 압록, 순천, 낙안, 보성, 장흥, 해남에 이르는 ‘조선수군재건길’ 복원에도 착수하였다.
필자의 선대인 수원부사(水原府使) 노인(魯認), 임치진첨절제사(臨淄鎭僉節制使) 노홍(魯鴻)은 임진왜란에 직접 참여하여 이순신의 조력자로 전공을 세워 『선조실록』에 기록되고 있다. 이에 2009년 『금계집』을 국역하여 출간한 적이 있으며, 대학원에서 교수님의 지도를 받으며 지방사와 이순신을 연구하였다. 그 인연으로 ‘남도 이순신길’ 개설을 위한 역사적 고증을 할 수 있었다. 전라남도의 백의종군로 고증을 위해 전라남도 관광정책과 정양조 주무관, 계장님, 과장님, 전남도립대 박창규 교수님 등과 함께 이순신이 갔던 길을 걸었다.
또 전라남도 도청의 과업지시를 받아 전남 연해안 8개 시ㆍ군을 연결하는 조선수군재건로 500km를 고증하여 복원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순신길 백의종군로 탐방 가이드북을 제작하였다. 그리고 박효서 차장과 조선수군재건로 안내 시스템 구축을 위한 실시 설계ㆍ고증 등도 완료하였다. 이후 지방자치 단체의 요청으로 남도 이순신길 조선수군재건로 구례군 명협정 고증, 남도 이순신길 조선수군재건로 출정장 고증, 남도 이순신길 조선수군재건로 곡성군 능파정을 고증하였다.
최근에 필자는 해군본부 역사단 ‘충무공 이순신 백의종군로’ 연구자로 참여하여 임원빈, 정진술 교수님과 전국의 백의종군 길을 걸으며 이순신 관련 유적을 고증하고 있다.
세계기록유산으로 『난중일기』가 등재되면서 이순신의 구국정신을 계승하고자 많은 사람들이 남도 이순신길을 찾고 있다. 이 글에서는 전라도에 관련된 이순신의 여러 행적을 『난중일기』에 따라 기록해 보았다. 또 관련 읍지나 군지를 살피며 발굴되지 않은 문화유적과 인물을 찾아내려 애썼다. 탐방객들이 이 길에 들어서 이순신의 행보와 관련 유적을 돌며, 이를 바탕으로 이순신의 구국정신을 계승하길 바란다. 앞으로 남은 과제는 이순신 연계자원을 추적하여 발굴 보존하길 기대한다.

2014. 11. 11.
전남대학교 인문대학원
문화재학박사 노기욱


若無湖南 是無國家 鳴梁と 李舜臣

全南大學校 湖南學硏究院 先任硏究員 魯起旭

1597年 7月 16日 日本軍の攻擊で朝鮮水軍が敗戰した. 朝鮮の政府では深刻な
狀況た?と認識して李舜臣を三道水軍統制使に再任命させた.
それで 三道水軍統制使の李舜臣は1597年 8月 3日 全羅道の求禮に入城して水軍の再建のため?力戰を展開した. 李舜臣の部隊は黃大中および軍官9名と兵士6名で始まった. 李舜臣の水軍の再建の計?は日本軍の追擊を振り切って軍士, 軍機, 軍糧, 軍船などを復元することたった. そして, 海?をして日本軍を擊破させて海上?を掌握する計?たった. この計?のため李舜臣はまず兵站を確保するのが 水軍の復?の大切なことだと考えた.
また 水軍の復?のため全羅道の內陸まで出?るかぎりはやく移動させて軍士を充員させることたった. そして, 沿海岸まで南下して軍機, 軍糧, 軍船などを確保したし, 兵力と武器の回收のため內陸の?のところにある官?まで行って物資を補充させた. また近接まで追擊してくる日本軍を下げてはやく兵士を移動させた.
李舜臣は求禮から谷城, 鴨錄, 谷城の縣?, 谷城の玉果, 谷城の江亭まで移動しながら兵力を確保させた. そして富有倉から順天府まで移動する間, 武器と大砲, 火藥, 長片箭を求めた. また李舜臣は食糧の倉庫がある沿海岸まで移動した. 寶城の兆陽倉に到着して軍糧を求めた. 最後には軍船の確保のため寶城軍營仇未に行った. そこで 慶尙右水使の裵楔の部隊と合流するように約束をしたが裵楔は?なかった. 結局李舜臣は部下の馬河秀の4名の子供と一?に鄕船10隻で長興の會寧浦まで行った. 長興の會寧浦て?裵楔の艦隊8隻と金億秋が集めた4隻の船を含めて全部12隻を集めた. 12隻の船を龜船で新しく製作したら敵の攻擊から安全に防御することが可能になった. 追加して鹿島萬戶と言う艦船1隻が入って合計13隻になった. 海上で起動訓練のため利津の於蘭浦などを回って8月 29日には朝鮮の水軍を碧波津まで移動させた. 日本の水軍は碧波津にある朝鮮の水軍に何回も夜間の奇襲作?を展開した. しかし, 朝鮮の水軍の警戒と反擊によって逃走した.
9月 15日 朝鮮の水軍は右水營から統制營まで移動した. 朝鮮の水軍は海上の起動訓練が終わってから避難船100餘隻で洋島の西側の海の通路を塞がった. また右水營の西側の海に船が避難した模?で船?を配置した. それは朝鮮の水軍で僞裝するためたった.
9月 16日 朝早く日本の水軍が鳴梁に進入した. 李舜臣は出?の命令をくだした後, 先頭に立って鳴梁にむかった. そのとき鳴梁の潮流はほとんど停潮期で?かなことだった. 海の中に日本の水軍の?船が133隻で確認された.
いよいよ朝鮮と日本の海?が始まれた. 最初は日本の水軍が朝鮮の水軍を包?して金億秋, 金應歟, 安衛の船などを攻擊した. しかし, 朝鮮の水軍も鹿島萬戶に?っている宋汝悰と平山浦代將の丁應斗の船が協力して火砲を射って, また朝鮮の水軍は地字銃筒と玄字銃筒などを射った. 雨あられとように矢も射った. 結局, 日本の水軍を擊破させた.
李舜臣は日本の水軍の將帥の來島通總を射殺して船端に高く吊した. この?子をみた日本の水軍の士氣が極度に低下した.
また劣勢の兵力を指揮した李舜臣は?鎖を鳴梁の夾水路に敷いておいた. 鳴梁海?がはじまったら?鎖を引き寄せながら日本の水軍の中央にある船端を攻?した. 夾水路の障碍物と不規則な潮流のながれによって日本の水軍の陣形と隊伍が崩壞になった. 李舜臣は障碍物と海の速い流れを利用して日本の水軍を攻擊した. ついに鳴梁??で日本の水軍4,000名を射殺し, 日本の?船31隻を沈沒させた. 結局, 三道水軍統制使の李舜臣は全羅道で兵站物資の復興を通して水軍を再建しようとした計?を達成することが出?た.
1597年 8月 3日 李舜臣は王?から敎書をもらった15日後, 水軍の陣營を新しく整えた. そして海上の哨戒と巡擦活動を始まった. 1ヶ月ぶりに鳴梁大捷という世界的有名な海上??で勝利に導いたことた. 全南地域で活躍した三道水軍統制使の李舜臣がこのように?略を成功させたのは全南の民衆たちの積極的な協力で成ったのを分かった.

主題語 : 寶城, 鳴梁, 軍營仇未, 利津, 右水營, 於蘭浦, 金億秋, 金應歟, 安衛, 來島通總, 黃大中, 鐵鎖, 停潮期, 龜船


1장 보성 <방부인전> 열선루 길

이순신(李舜臣, 1545∼1598)은 덕수이씨(德水李氏)로 1545년(인종1) 3월 8일(양력 4월 28일) 서울 남부 마르내골(乾川洞)에서 태어났다. 시호는 충무(忠武)이며 자는 여해(汝諧)이다. 여해는 ‘너로 하여금 세상이 화평하게 되리라.’라는 뜻이다. 이순신과 같이 동문수학한 류성룡(柳成龍)은 “순신은 어린 시절 얼굴 모양이 뛰어나고 기풍이 있었으며 자라면서 말 타고 활쏘기를 좋아하였으며 더욱이 글씨를 잘 썼다.”라고 하였다. 명나라 진린(陳璘)제독은 이순신을 ‘노야(老爺)’라고 하였으며, 전라도 피란민은 ‘이야(李爺)’라고 하며 그를 따랐다.
이순신의 가계(家系)는 고려 때 중랑장을 지낸 이돈수(李敦守)로부터 내려오는 문반(文班)의 가문이었다. 5대 조부 이변(李邊)은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와 홍문관 대제학을 지냈고, 증조부 이거(李綱)는 병조참의(정3품)를 지냈다. 『선조실록』 1597년 1월 27일 기록에 의하면 류성룡이 선조에게 이순신을 “성종때 이거의 자손”이라고 말한다. 이순신의 할아버지인 이백록(李百祿)은 벼슬하였다고 하지만 미관말직의 평시서(平市署) 참봉(參奉, 종8품)에 그치는 정도였다. 집안 대대로 고위직을 역임한 것에 비해 낮은 관직이었다. 그것은 중종 때에 발생한 기묘사화(1519)가 원인이었다. 이순신의 할아버지 이백록은 조광조의 지치주의(至治主義)를 주장하던 소장파사림(少壯派士林)들과 뜻을 같이하면서 왕도정치 실현과 개혁정치에 관심을 두었던 것이다. 조광조 일파로 간주되어 할아버지 이백록도 사림과 친교를 맺었다가 기묘사화로 죽임을 당하였다.
류성룡의 『징비록』에서 ‘이순신의 조부 이백록은 음직으로 벼슬하였지만 부친 이정(李貞)은 벼슬에 오르지 않았다.’라고 하였다. 이순신 할아버지에게 일어난 불운이 아버지를 거치면서 집안은 기울고 있었다. 따라서 아버지 이정의 서울 생활은 자연히 어려운 여건에 처하게 되어 이순신이 8세가 되던 해 가족이 이순신의 외가가 있는 충남 아산으로 내려가게 되었다.
할아버지가 사화로 죽임을 당해 아버지 이정은 벼슬하지 않았다. 이순신의 어머니 초계변씨(草溪卞氏)는 아산 지역의 명문가 변수림(卞守琳)의 딸이다. 이순신은 아들 넷 중에서 셋째로 태어났다. 이순신에게는 희신(羲臣)ㆍ요신(堯臣)의 두 형과 아우 우신(禹臣)이 있다. 이순신의 아버지는 집안의 번성을 기원하며 중국 왕들의 이름(복희씨, 요왕, 순왕, 우왕)을 따서 네 아들의 이름을 지어 주었다.
이순신의 외가가 있는 곳은 서울에서 300리 길인 방화산(蒡華山) 기슭에 위치한 충청도 아산 염치면 백암리이다.

1. 보성군수 방진의 외동딸과 결혼

이순신이 21세 되던 해, 1565년(명종20) 보성군수(寶城郡守)를 지낸 방진(方震)의 외동딸 상주방씨(尙州方氏)와 결혼을 한다. 이순신의 장인 방진은 1530년경에 보성군수를 지냈다. 방진의 묘소 비문에 의하면 동고(東皐) 이준경(李浚慶)이 이순신의 중매를 섰다고 한다. 이준경과 방진은 동문수학한 사이였다. 방진의 사위가 된 이순신은 장인의 정신적 격려와 경제적 후원 속에서 과거에 급제할 때까지 처가에서 지내면서 무예를 연마하였다. 장인 방진과 장모 남양홍씨가 세상을 떠나자, 후손이 없는 처갓집(현재 아산 이 충무공 고택)은 이순신의 본가가 되었다. 그리고 장인, 장모 묘소도 이순신이 외손봉사(外孫奉祀)하게 되었다. 이순신은 무과 시험 공부를 22세 10월부터 시작하였다. 이순신이 무과를 선택한 이유는 부인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여겨진다.
『이충무공전서』의 「방부인전」에 이순신의 장인, 방진의 활솜씨에 대한 내용이 있다. 방진은 조선의 명궁수로 이름이 난 관리였다. 어느 날 방진의 집에 화적(火賊)들이 안마당까지 들어왔다. 방진이 화살로 화적을 쏘다가 화살이 다 떨어지자 딸에게 방 안에 있는 화살을 가져오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미 화적들이 종과 내통해 화살을 몰래 훔쳐 나갔으므로 남은 것이 하나도 없었다. 이때 방진의 외동딸이 베틀의 도투마리에 뱁댕이 대나무 다발을 화살인 양 다락에서 힘껏 내던지며 큰 소리로 “아버님, 화살 여기 있습니다.”하고 소리쳤다. 방진의 활솜씨를 두려워했던 화적들은 화살이 아직 많이 남은 것으로 알고 곧 놀라서 도망갔다. 이때 딸의 나이 겨우 12세 때 일이다. 방씨부인은 어릴 때부터 영민하기가 어른과 같았다.
이순신이 결혼하고 23세가 되던 해, 큰 아들 이회(李?)가 태어났다. 4년 후인 이순신 27세가 되던 해, 방씨부인은 둘째 아들 이열(초명; 李蔚)을 낳았다. 첫째 이회는 현감을 지냈으며, 둘째 이열은 정랑(正郞)에 이르게 되었다. 셋째 이면(李?)은 힘이 장사이며 이순신과 가장 많이 닮았다고 한다. 딸은 사인 홍비(士人 洪?)와 결혼하였다.

2. 무과 합격 후 뒤늦게 오른 관직

이순신이 28세가 되던 해, 무과 공부를 시작한 지 6년 만에 1572년(선조5) 무인 선발 시험인 훈련원별과에 응시하였으나 달리던 말에서 떨어져 왼쪽 다리가 부러지는 부상으로 실격되었다.
4년 뒤 32세가 되던 해, 1576년 2월에 치러진 식년시 무과에 병과 4등으로 급제한 뒤 그해 12월 종9품 권관(權管)이 되어 함경도 삼수(三水) 고을 동구비보(童仇非堡)로 첫 관직에 올랐다. 이순신은 삼수에서 3년 동안 근무하였다.
이곳에서 이순신은 자신에게 부여된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면서 북방 여진족의 침입에 대비해 군사 훈련을 철저하게 시행하였다. 그 무렵 함경도 감사로 부임해 온 이후백(李後白)은 자신의 관할 진을 돌며 군기 검열을 하였다. 변방 장수들에게 활쏘기 시험을 보게 하는데 매우 엄정하여 군기 검열에 곤장을 맞지 않는 군관이 없었다. 그런 연유로 변방에서는 함경도 감사 이후백을 ‘곤장 감사’라고 하였다. 그런데 동구비보에서 검열을 마친 이후백 감사는 이순신을 보고는 칭찬을 아끼지 않고 그가 건의하는 말까지 들었다.
이순신은 “사또의 형벌이 너무 엄해서 변방 장수들이 손발 둘 곳을 모릅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이후백 감사는 웃으면서 “그대 말이 옳다. 난들 옳고 그른 것을 가리지 않고 함부로 벌만 주겠는가?”라고 하면서 군기가 엄정한 이순신을 격려하였다. 임무 수행에 나무랄 데가 없었던 것이다.
강진군 작천면 박산리에 이후백의 학문을 기리는 박산서원이 전하고 있다. 이후백은 16세 때 향시에 수석으로 합격한 후 할머니를 따라 외가인 전남 강진군 작천면 박산 마을로 이주하여 살았다.
이순신은 삼수에서 3년을 지내고 35세가 되던 해 이미 세 아들의 아버지였다. 1579년(선조12) 2월 서울 훈련원으로 전입되어 훈련원봉사(訓鍊院奉事)가 되었다. 한 직급 위인 종8품인 훈련원봉사로 임명되었으나 상관인 병조좌랑(兵曹佐郎) 서익(徐益)과 인사 문제로 서로 맞서게 되었다. 이조와 병조의 좌랑은 정랑과 함께 인사 행정을 담당하였다. 서익은 자신과 사사로운 관계의 훈련원 사람을 서열을 무시한 채 참군에 천거하라고 이순신에게 지시하였다. 그러자 이순신은 “아래 있는 자를 건너뛰어 천거하면 당연히 승진할 사람이 누락되어 공정하지 못하다.”라고 완강히 버텼다.
류성룡은 『징비록』에서 “식자들은 이 일로 차츰 이순신을 알게 되었다.”고 기록하였다. 이 사건이 알려지면서 병조판서 김귀영(金貴榮)이 자기 딸(庶女)을 이순신에게 시집보내려고 중매인을 보내어 인척 관계를 맺으려 한 일이 있었다. 이는 병조판서인 김귀영도 이순신의 인품을 높게 평가하여 사위로 맞이하겠다는 뜻을 가졌던 것이다. 그러나 이순신은 “내가 처음으로 벼슬길에 나왔는데 어찌 감히 권세 있는 집안에 의탁하여 승진을 도모하겠는가.”라고 하며 중매인을 돌려보냈다.
이순신은 훈련원봉사 8개월 만에 충청병영이 있는 해미(海美)에 충청도병사(忠淸道兵使) 군관(軍官)으로 전출되었다. 그곳에서 10개월 동안 근무하였다. 당시 이순신이 거처하는 방에는 다른 아무것도 없고, 다만 옷과 이불뿐이었다. 휴가를 얻어 고향의 부모님을 뵈러 갈 때는 지급 받아 남은 양식을 여러 병사에게 나누어 주었다.


2장 고흥 발포진(鉢浦鎭) 거북선 선소 길

이순신이 36세 때, 1580년(선조13) 7월 발포(鉢浦) 수군만호(水軍萬戶,종4품)로 부임해와 18개월 동안 근무하였다. 이순신은 함경도 삼수, 서울의 훈련원, 충청도 병마절도사 휘하에서 육군으로 지내다 수군으로서 처음 발포에 발령을 받았다.

1. 해군 지휘관이 되어 바다를 지키는 발포만호

이순신이 있었던 고흥 발포만호성(鉢浦萬戶城)은 바다로 침입하는 적을 막기 위한 관방 시설로 정면이 바다를 향하고 있다. 고흥 수덕산(修德山) 남쪽 사면 끝자락, 도화면 발포리 성촌마을을 감싼 모양이다.
발포진성은 『성종실록』에 “전라도의 발포성(鉢浦城)은 둘레가 1천 3백 60척이며 높이는 13척이었다.”라고 하였다. 1976년 이충무공 유적보존위원회를 결성하여 유적지 복원사업을 추진하였다. 1977년 전남대학교 박물관의 발굴 조사에 의해 확인된 성벽은 동쪽 벽과 남쪽 벽은 민가의 담으로 이용되고 나머지는 거의 원형 상태로 남아 있다. 이 마을 느티나무 아래 비석거리에는 ‘이충무공 머무시던 곳’을 기념한 기념비와 조선 후기 만호비가 남아 있다. 발포진성 뒤편에는 충무사(忠武祠)가 새롭게 단장되었다. 그리고 포구에는 발포 역사전시체험관이 세워졌다. 또 해안에는 수군 선박 대피 장소로 쓰였던 굴강(屈江)이 남아 있다. 발포만호 시절 이순신에 관련된 일화들이 『이충무공전서』에 실려 있다.
어느 날, 직속상관인 전라좌수사 성박(成?)이 전령을 보내 “거문고를 만들고자하니 관사 뜰에 있는 오동나무를 베어오라.”고 하였다. 이순신은 “이 나무는 나라의 물건입니다. 여러 해 동안 식재한 것을 하루아침에 벨 수는 없습니다.”라고 하며 전령을 돌려보냈다. 이는 평소 전선과 무기 만들기에 관심이 많았던 그가 가벼운 판목 재료로 전선 덮개용으로 알맞은 오동나무 벌목을 당연하게 거부하며 공물임을 강조한 것이었다.
전라좌수영 산하의 5관은 순천, 낙안, 보성, 광양, 고흥이며 5포는 사도, 여도, 녹도, 발포, 방답진성이다. 전라감사와 전라수사는 6월과 12월에 각각 5관 5포에 주둔하는 만호 이상의 변방 장수들의 근무 성적을 평가하여 조정에 보고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해 늦가을, 해상 관방 시설을 점검하러 온 전라감사 손식(孫軾)이 능성현청으로 발포만호 이순신을 불렀다. 이때 손식은 이순신에게 전라도 해안 지역의 전술에 대해 묻고 진도(陳圖)를 그려보게 하였다. 이순신은 주사(舟師)의 병기와 기계(機械)를 설명하고 진도를 그렸다. 마침내 전라감사 손식은 이순신에게 “내가 잘못 알았소. 내가 일찍이 그대를 바로 알지 못했소.”라고 하였다. 전라감사 손식은 이순신이 전선과 수군 체제, 무기 체계의 방비를 잘 갖추고 있으며 주사의 병기와 기계(機械)가 정밀함에 감동하였다.
어느 날, 전라수사 이용은 전라좌수사 관할 하에 있는 발포에 가서 수군의 전선과 군기를 검열하였다. 그 결과 발포 수군의 판옥선, 전선, 군기 등이 정밀하였다. 단지 농사일로 4명의 궐석자가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순신의 근무 성적은 최하위로 평가되었다. 이때 전라도사 조헌(趙憲)은 “우리 도에서 이순신이 군사를 가장 잘 다스리는 장수이다.”라고 하였다. 전라수사 이용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이 포스팅은 쿠팡 파트너스 활동의 일환으로,
이에 따른 일정액의 수수료를 제공받습니다.
이 포스팅은 제휴마케팅이 포함된 광고로 커미션을 지급 받습니다.
도서 DB 제공 : 알라딘 서점(www.aladin.co.kr)
최근 본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