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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한의 유학사상

서한의 유학사상

조원일 (지은이)
  |  
전남대학교출판부
2017-02-28
  |  
19,000원

일반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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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한의 유학사상

책 정보

· 제목 : 서한의 유학사상 
· 분류 : 국내도서 > 대학교재/전문서적 > 인문계열 > 철학
· ISBN : 9788968493812
· 쪽수 : 430쪽

책 소개

서한시기 유학사상에 대하여 육가, 가의, 동중서, 양웅의 사상 등을 중심으로 분석 정리한 글이다. 서한시기 전반기라고 하면 유방이 한나라를 건국한 뒤부터 한무제 건원(建元) 연간까지에 해당된다. 현재 국내의 학술계에서 양한시기의 유학에 관한 연구는 매우 미미한 상황이다.

목차

머리말 / 4
제1장 서한 전기의 시경학 / 17
제2장 육가의 유학사상 / 40
제3장 가의의 유학사상 / 193
제4장 동중서의 유학사상 / 296
제5장 양웅의 유학사상 / 347
참고문헌 / 419
찾아보기 / 423

저자소개

조원일 (지은이)    정보 더보기
대전에서 출생하고 성장기의 대부분을 그곳에서 보냈다. 대학 졸업 후에는 臺灣으로 유학을 떠나 中國文化大學 대학원 철학과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그 뒤에 다시 중국으로 유학을 가서 北京大學 대학원 철학과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8년 동안의 유학생활을 마치고 귀국하여 남서울대학교 중국학과를 거쳐 현재 전남대학교 중국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전남대학교 이순신해양문화연구소장을 겸직하고 있다. 지난 2012년도와 2014년도에 전남대학교 교육우수교수에 두 차례에 걸쳐 선정 되었다. 2016년에는 제20회 용봉학술상을 수상 했다. 2021년에는 우수 연구성과를 인정을 받아 대한민국 교육부장관상을 수상했다. 대외적으로는 한국중국문화학회 회장, 중국 浙江大學 한국연구소 객원연구원, 寧夏大學 학술고문을 겸직하고 있으며, 해군사관학교 충무공연구회 자문위원 역시 겸직하고 있다. 2017년 한국연구재단 인문도시지원사업에 선정되어 다양한 인문학강좌, 인문학포럼을 개최하는 등 지역사회의 인문학 발전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왔다. 그 동안 집필한 저서로는 『東吳哲學』, 『哲學․宗敎與人文』(中國出版), 『半生緣』(영화로 배우는 중국어), 『동아시아의 유학사상』, 『선진유가의 사상』, 『맹자의 철학사상』, 『공자의 철학사상』, 『순자의 철학사상』, 『맹자와 도덕의 이상』, 『西漢의 유학사상』, 『고대 중국의 정치사상』, 『고대 중국의 천인관계론』 등이 있으며, 외국에 발표한 논문으로는 「孟子仁政思想的詮釋」 등을 포함하여 다수가 있으며 국내에 발표한 논문에는 「순자 정치사상의 현대적 의미에 관한 연구」 등을 포함하여 다수가 있다. 고대 중국의 철학사상과 중국의 전통신화 분야에 대하여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고 있으며 또한 고대 중국의 역사와 인문지리 및 전통문화와 동남아시아 화교문화에 대해서도 흥미를 가지고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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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제1장 서한 전기의 시경학

1. 시작하는 말
유방劉邦이 한漢나라의 초대 황제로 등극한 이후부터 한漢나라 경제景帝가 세상을 뜨기까지의 기간을 한나라 초기라고 말한다. 이 시기에 대해서 학계에서는 ‘황노학黃老學’이 대세를 이루었던 시기로 보기도 한다. 또한 당시 정치권력을 등에 업은 ‘황노학’의 막강한 무소불위의 영향력 속에서 다른 학파의 사상들은 매우 미약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밖에 없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과연 이러한 견해들이 당시에 ‘황노학’이 독존의 지위를 차지했었다는 것을 의미하거나 ‘황노학’이 다른 제자諸子의 학술사상을 배척했다는 사실을 입증할 수 있는 것일까?
한 걸음 더 나아가 한漢나라 초기의 유학사상 역시 다른 제자의 학문처럼 ‘황노학’ 때문에 정치권과 세인의 주목을 받지 못하는 상황에 처해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러한 의문들에 대하여 본문에서는 한대漢代초기 『시경』 연구에 관한 몇 가지 문제로부터 출발하여 한대초기 유학의 상황에 관하여 면밀한 분석을 통하여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보도록 하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한대이전의 ‘시경학詩經學’에 관한 상황들을 공자와 맹자 그리고 순자 및 한비자를 중심으로 고찰해볼 것이며, 그 다음에는 한대초기 유학의 지위문제에 대하여 ‘시경학’을 근간으로 해서 역사적인 측면에서 살펴볼 것이다. 끝으로 한대초기 유학의 상황에 대하여 제자학과의 관계 속에서 과연 유학이 제자학과 어떻게 상호 영향을 주고받으며 새로운 틀을 형성해 갔는지의 문제에 관하여 분석을 해보도록 하겠다.

2. 서한 이전의 시경학
『시경詩經』은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시가집詩歌集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그것이 중국문화의 형성에 끼친 영향은 실로 지대하다고 말할 수 있다. 『시경』은 춘추시대에 이미 광범위하게 전파되었으며, 당시 『시경』의 시를 인용하여 사실을 증명하고 시에 가탁하여 자신의 뜻을 나타내는 현상은 지식인 사회에 만연했던 풍조라고 할 수 있다. 동치안董治安의 통계에 의하면 『춘추좌전春秋左傳』과 『국어國語』에 수록되어 있는 역사적인 인물들 가운데 『시경』을 인용한 횟수는 『춘추좌전』에 122회 나타나 있고 『국어』에는 26회 나타나 있다고 했다. 그는 한 걸음 더나가 “일찍이 삼백 수의 시가 한 권의 시가집으로 만들어지기 이전과 이후의 시간들 그리고 유가 학파의 창시자가 출현하기 이전에 이미 많은 시가 광범위하게 전파되어 사회적으로 매우 중시되고 있었으며, 사람들의 주목을 받아 정치와 문학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시경』이 춘추시대에 유가 한 학파만의 전유물이 아닌 모든 지식인 사회의 공동 전유물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전국시대에 『시경』 삼백 편의 연구와 활용은 유가에만 국한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묵가의 저작 가운데서도 자주 논증의 근거로 인용되고 있으며 『관자管子』ㆍ『장자莊子』ㆍ『여씨춘추呂氏春秋』ㆍ『한비자韓非子』에서도 시를 인용하고 시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그렇지만 유가의 『시경』에 대한 중시의 정도는 기타의 제자백가에 비해 월등하게 높았다고 할 수 있다.
공자는 춘추시대 후기에 생존했는데 이 시기는 『시경』에 대한 연구와 활용이 매우 활발했던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공자는 『시경』의 인식에 대하여 이성적인 태도를 견지하며 “시 삼백 편은 한마디로 표현하면, 생각에 사악함이 없는 것이다.”라고 했다. 이러한 언급은 공자의 『시경』에 대한 강령성의 주장임과 동시에 그가 『시경』의 도덕적 윤리적 효용에 대하여 매우 중요시하고 있음을 표명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공자는 『시경』의 정치적 효용에 대해서도 강조하여 “시에서 인생에 대한 관심을 일으키게 되고, 예로써 자립하게 되고, 음악에서 자신을 완성시키는 것이다.”, “얘들아 왜 시경을 공부하지 않느냐? 시경의 시들은 사람의 감흥을 일으켜 줄 수 있고, 사물을 올바로 볼 수 있게 하며, 남과 잘 어울릴 수 있게 하고, 잘못을 원망할 수 있게 하며, 가까이는 아버지를 섬기게 하고, 멀리는 임금을 섬기게 하며, 새와 짐승과 풀과 나무의 이름도 많이 알게 하는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공자의 이러한 ‘시경학’이론은 삼백 편의 시가 시에서 경전으로 바뀌어 가는데 있어서 관건적인 작용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전국시대 중기의 저작인 『맹자孟子』에 수록되어 있는 『시경』의 작품들이 논증의 근거로 자주 인용되고 있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맹자는 『시경』에 대하여 매우 정확한 이해를 가지고 있었으며 심도 있는 연구를 했었다. 사마천의 “일선에서 물러나 만장 및 다른 제자들과 시경과 서경을 차례에 따라 서술하여 공자의 가르침을 계승하고 ‘맹자’ 일곱 편을 저작했다.”라는 언급과 조기趙岐의 「맹자제사孟子題辭」에 있는 “유학의 도리를 잘 익혔는데, 특히 시경과 서경에 뛰어났다.”라는 언급 속에서 알 수 있듯이 맹자는 『시경』의 효용을 매우 중시했다. 그러나 맹자는 『시경』을 인의仁義의 도리와 연계하여 유가 사상의 색채를 띤 방향으로 해석함으로써 『시경』의 유학화를 더욱 심화 시켰다.
맹자의 뒤를 이은 순자는 학문을 연마하는 과정에 『시경』을 외우는 것과 『예기禮記』를 정독하는 것과 직접 연결시켜 “학문이란 어디에서 시작하여 어디에서 끝나는가? 학문을 하는 순서는 먼저 시경과 서경 등 경전을 외우는 데서 비롯하고, 『예기』를 정독하는 데서 끝나는 것이며, 그 목적은 군자가 되는 것을 비롯하여 성인이 되는 데서 끝나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순자荀子』 속에 『시경』에 관하여 기록된 것은 대부분 예禮를 중심으로 하여 언급된 것이다. 순자는 ‘육경六經’에 기록되어 있는 성인의 뜻과 행적 등은 천하의 도道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그러므로 일체의 언론과 효ㆍ불효 등의 명목은 다 성왕을 모범으로 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다.”라는 사실을 제기한다. 또한 순자의 저작 곳곳에서 ‘육경六經’을 인용한 부분을 찾아볼 수 있으며, 『시경』을 인용한 곳만 해도 무려 82 곳이 있다. 이는 전국시대 제자백가 가운데 순자가 가장 많이 『시경』을 인용한 사상가라는 사실을 입증해 주는 것이다.
춘추시대로부터 전국시대에 이르는 문헌들 속에 공자와 그의 후학들이 매우 적극적으로 『시경』을 학습하고 전수한 사실들이 잘 나타나 있다. 또한 전국시대의 중ㆍ후기에 이르러 『시경』은 점진적으로 유가 학파의 경전으로 자리 매김을 하게된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당시의 도가를 비롯한 법가 등의 학파로부터 유가가 공격을 받게되는 빌미를 제공하게 된다. 즉 장자나 한비자 같은 경우 유학에 대한 공세의 돌파구로서 이론과 실천적인 측면에서 『시경』을 폄하하거나 부정하는 방법을 취한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장자莊子』에서는 유가에서 언급하는 『시경』과 『상서尙書』를 신랄하게 반대하고 있으며, 『한비자韓非子』에서는 “유가는 학문으로써 법률을 문란하게 한다.”고 했는데, 이는 군주가 “학문을 일삼으며, 논평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을 예우 해주면 국가가 멸망하게 되는 지름길이 될 것이라는 말이다. 여기에서의 “학문”은 유가에서 떠받들고 있는 『시경』과 『서경』 등의 경전을 의미한다.
진시황 시기에 자행된 ‘분서갱유’ 때 『시경』은 제거되어야 할 유가 경전 가운데의 하나였다. 이에 대해서는 『사기史記』의 “『시경』이나 『서경』을 이야기하는 자들은 저자거리에서 모두 사형에 처해야 하며, 옛날 것으로 현재의 것을 비판하고 공격하는 자는 모두 멸족시키며, 이를 알고도 검거하지 않는 관리도 같은 죄로 다스리십시오.”라는 언급 속에 잘 나타나 있다.
이상과 같이 『시경』은 유가 경전의 전습과 연구의 전범이 되어 한나라 시기의 유학의 기본 상황을 반영하는 이정표가 되는 것이다.

3. 서한 초기 시경학의 지위
선진시기에 있어서의 유학은 매우 유명한 학문의 하나로 자리 매김을 하고 있었지만, 그 발전은 그렇게 순조로운 것만은 아니었다. 당시의 유학은 묵가와 법가 등의 여러 학파들로부터 공격과 비판의 대상이었으며, 후일 진시황에 의해 자행된 ‘분서갱유’는 유학에 더욱 심한 타격을 준다. 그러나 이러한 요소들은 결코 유학의 전파에 심각한 장애요인이 될 수가 없었다.
한나라가 건국된 후 ‘시경학’은 매우 빠른 속도로 발전을 한다. 『한서漢書』에는 “시경에 대하여 언급하는 사람에는 옛날 노나라 땅의 신배공과 옛 제나라 땅의 원고생 그리고 옛 연나라 땅의 한태부가 있다.”라는 기록과 하간헌왕河間獻王 유덕劉德이 “모씨시와 좌씨춘추 박사를 설립했다.”라는 기록이 있다. 한漢나라 초기에 『시경』을 전수한 사람은 『한서』에 나타나 있는 바와 같이 신배공, 원고생, 한태부, 유덕 네 사람이다. 이들 네 사람은 모두 제각기 다른 지역에서 출현하였는데 이는 당시 『시경』을 배우는 사람이 많았음을 의미함과 동시에 매우 광범위한 지역에 걸쳐 학습자들이 분포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나라 시기에 가장 먼저 출현한 『시경』의 판본은 『노시魯詩』인데, 이는 서한西漢이 멸망될 때까지 그 영향력이 가장 컸던 판본이다. 『노시』라는 이름은 전수한 사람의 출신지에 맞춰서 정해진 것으로 신공에서 비롯되었다. 『사기』에는 “신공은 옛날 노나라 땅 사람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한서』에는 “신공이 전한 시경을 노시라고 불렀다.”라고 기록되어 있는 점을 미루어 볼 때 역대로 학자들이 말하는 『노시』는 신공이 전수한 『시경』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젊었을 때 초楚원왕 유교와 함께 부구백에게 『시경』을 배웠다. 한漢나라가 건국된 뒤 고조가 노나라 땅을 지나갈 때 신공은 학생의 신분으로 선생님을 따라서 노나라 남행궁에서 고조를 알현했다. 여태후가 집권하던 시기에 부구백은 장안에 있었는데, 초원왕이 그의 아들 유영을 신공과 함께 부구백에게 학업을 마치게 했다. 초원왕이 죽고 유영이 왕위를 계승하자 신공을 태자 유무의 스승으로 모셨다. 유무는 학문연마를 좋아하지 않아 신공을 난처하게 했다. 후에 유무가 왕위를 계승하자 신공을 잡아들여 노역장으로 보냈다. 신공은 수치감을 느끼고 노나라 땅으로 돌아가 집에 은거하며 학생들을 가르치며 평생 동안 대문 밖을 나가지 않는다. 또한 손님도 받지 않고 왕명으로 부를 때만 문 밖으로 나섰다. 먼 곳으로부터 찾아온 학생만 해도 천여 명이 넘었는데 신공은 『시경』의 뜻을 구술로만 가르쳤을 뿐 문장으로 남기지 않았다. 혹자는 문장이 있었으나 유실되어 전해지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위에 인용한 문장을 비춰볼 때 신공이 『시경』을 배움으로써 한나라의 상류층 인사들과의 교류에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한나라 초기의 상류사회에는 유학을 숭상하는 인사들이 적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신공이 생존하던 시대는 한나라 초기의 몇 십 년 정도였다. 신공은 초원왕楚元王과의 교류 외에도 문제文帝와 경제景帝 및 무제武帝와도 교류가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한서』의 “난릉 사람 왕장이 신공에게 『시경』을 배워 경학에 통달했다. 그래서 경제 치하에서 태자의 소부의 직분을 맡았으나 후에 파면된다. 무제가 막 즉위했을 때 왕장은 궁중에서 경비를 설 수 있게 해달라고 상소를 여러 차례 올린 끝에 낭중령에 임명되었다. 대군 사람 조관 역시 신공에게 『시경』을 배우고 후에 어사대부의 지위에 오른다. 조관과 왕장은 조정에 명당을 건립하여 제후들이 황제를 알현하는 장소로 사용하자고 주청 하였으나 이루지 못해 황제에게 스승을 천거했다. 그래서 황제는 비단 묶음과 벽옥을 포함한 예물을 지닌 관리들과 네 필의 말이 끄는 수레를 보내 신공을 모셔오게 했다. 두 제자 역시 수행했다. 신공이 도성에 이르러 황제를 알현하자 황제는 신공에게 국가의 안정과 동란에 대해 물었다.”라고 하는 기록에 잘 드러나 있다.
『제시齊詩』는 원고생이 전수했다고 할 수 있다. 『한서』에는 “무제가 처음 즉위하자 현명하고 훌륭함을 들어 원고생을 다시 불렀다. 그러나 여러 유생들이 모두 원고가 늙었다고 헐뜯어 말하자 그만두고 돌려보냈다. 이때 원고는 이미 90세였다.”라는 기록이 있는데, 이것은 만일 무제가 즉위한 시기에 원고생의 나이가 정말로 90세였을 경우 그는 신공과 마찬가지로 한漢나라 초기에 생존했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원고생의 인생사에서 가장 치욕스러웠던 사건은 ‘돼지 찌르기’였을 것이다.
『사기』의 “두태후竇太后는 노자라는 책을 좋아하여 원고생을 불러 노자의 도道를 물었다. 원고생이 ‘그것은 미천한 사람들의 말에 지나지 않습니다.’라고 말하자 두태후가 노해서 ‘어떻게 사공이 죄수들의 책을 썼다는 말인가?’라고 말했다. 원고생을 우리에 넣어 돼지를 찌르게 하였다. 경제는 태후가 비록 노했다고 할지라도, 원고생이 바른 말을 한 것이기 때문에 실제로는 죄가 없다는 것을 알고 곧 예리한 칼을 원고생에게 주어 우리에 내려가 돼지를 찌르도록 하였다. 한 번 찔러서 돼지의 심장을 바로 적중시키니 돼지는 쓰러져 죽었다. 태후는 아무 말이 없었고, 그것으로 다시 죄를 논하지 않았다. 원고생은 얼마간 집에서 쉬었다. 경제는 원고생이 청렴하고 정직한 것을 높이 평가하여 청하왕의 태부로 삼았다. 원고생은 오랫동안 태부로 있다가 병이 들어 면직했다.”라는 기록은 많은 사람들에 의해 두태후竇太后를 필두로 하는 ‘황노학’ 추종세력이 점차 증대하여 주도적인 지위를 점하는 상황을 설명하는 방편으로 쓰인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위의 인용문 가운데 “미천한 사람들의 말”과 “사공이 죄수들의 책을 썼다”는 문구에 관해서는 현재까지 해석이 분분한 상황이다. 노간勞干은 「論 ‘家人言’ 和 ‘司空城旦’」에서 이러한 문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고증을 했는데 비교적 정확한 고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그는 두태후가 언급한 요지는 ‘미천한 사람들’과 ‘사공이 죄수들의 책을 썼다’는 말로써 이는 모두 신분적인 측면에 대한 언급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노간勞干은 “ ‘미천한 사람들의 말’은 천자나 제후들이 천하와 국가를 다스리기 위해 쓴 책이 아닌 일반 백성들을 위하여 대중적인 언어로 쓴 책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두태후는 『노자老子』가 일반 백성들을 위하여 저술된 책이기는 하지만 어떻게 죄수들의 책이 될 수 있는가 라고 반문을 했어야만 했다.” 이와 같이 볼 때 문제의 핵심은 바로 『노자』라는 책의 성격에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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