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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민간전설 양축 이야기

중국의 민간전설 양축 이야기

이주노 (지은이)
  |  
전남대학교출판부
2017-03-30
  |  
20,000원

일반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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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민간전설 양축 이야기

책 정보

· 제목 : 중국의 민간전설 양축 이야기 
· 분류 : 국내도서 > 대학교재/전문서적 > 어문학계열 > 중어중문학
· ISBN : 9788968493980
· 쪽수 : 442쪽

책 소개

양산백과 축영대의 이루지 못한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는 중국의 민간에 오랫동안 널리 전해져 온 이야기이다. 양축 이야기의 원형을 더듬어보고, 양축 이야기를 각종 서사매체별로 분류하여 살펴보면서 양축 이야기가 어떻게 변용되었는지를 분석하였다.

목차

제1장 양축 이야기의 원형을 찾아서
양축 이야기의 모티프 / 24
순정형 이야기와 양축 이야기 / 42

제2장 서사매체별 양축 이야기의 변용
필기류의 양축 이야기 / 69
연희류의 양축 이야기 / 90
소설류의 양축 이야기 / 110
영상류의 양축 이야기(1) / 135
영상류의 양축 이야기(2) / 166

제3장 양축 이야기의 기원과 전파
양축 이야기의 발원지 논란 / 198
각지의 양축 관련 구비전설 / 222
소수민족의 양축 이야기 / 241

제4장 동아시아의 양축 이야기
한국의 양축 이야기 / 266
인도네시아의 양축 이야기 / 295
여러 나라의 양축 이야기 / 317

제5장 맺음말을 대신하여
양축 이야기의 중국 연구현황 / 334

부록
옛 전적 속의 양축 이야기 / 350
양산백과 축영대(월극越劇) / 373
쌍선보권雙仙寶卷 / 408

저자소개

이주노 (옮긴이)    정보 더보기
서울대학교 중어중문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으며, 현재 전남대학교 중어중문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중국현대문학을 전공하면서 민간전설과 신화에 관심을 기울여왔다. 저서로 ≪중국의 민간전설 양축이야기≫, ≪루쉰의 광인일기, 식인과 광기≫ 등이 있으며, 역서로는 ≪중화유신의 빛 양계초≫ ≪중국 고건축 기행≫ ≪색채와 중국인의 삶≫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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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1. 양축 이야기의 원형을 찾아서

양축 이야기의 모티프
양축 이야기는 양산백梁山伯과 축영대祝英臺의 이루어질 수 없는 비극적 사랑을 담고 있다. 이 이야기는 ‘백사 이야기白蛇故事’, ‘맹강녀 이야기孟姜女故事’, ‘견우와 직녀 이야기牽牛織女故事’와 더불어 중국의 4대 민간전설로 손꼽히고 있다. 가장 일반적인 양축 이야기는 기본적으로 ‘축영대의 남장구학男裝求學’ - ‘양축의 동문수학同門修學’ - ‘양축의 사랑과 좌절’ - ‘양산백의 죽음과 축영대의 순사殉死’라는 줄거리로 이루어져 있다. 양축 이야기의 가장 일반적인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축영대는 여자의 몸으로 공부를 하고 싶은지라 남장을 하여 서원에 간다. 축영대는 서원에서 양산백과 침식을 함께 하여 공부하는 동안, 양산백과 돈독한 우정을 쌓으면서 깊은 애정을 느끼게 된다. 양산백은 축영대가 여자임을 알지 못한 채 삼년이 흐르고, 축영대는 집으로 돌아간다. 얼마 후에 서원을 떠난 양산백은 축영대를 찾아갔다가 비로소 축영대가 여자임을 알게 되고, 이를 진즉 알아차리지 못한 자신의 어리석음을 한탄한다. 그리하여 양산백은 곧바로 축영대에게 청혼하지만, 축영대는 이미 다른 집안의 아들과 정혼한 터였다. 낙심하여 집에 돌아온 양산백은 그리움이 병이 되어 앓아누웠다가 끝내 회복하지 못한 채 세상을 뜨고 만다. 양산백은 세상을 뜨기 전에 부모에게 축영대가 시집가는 길목에 자신을 묻어달라고 유언을 남긴다. 양산백이 죽었다는 사실을 전해들은 축영대는 시집가는 날 가마가 양산백의 무덤을 지나가게 한다. 시집가는 날 축영대를 태운 가마가 양산백의 무덤 앞에 이르자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지고 비바람이 쳐서 도저히 나아갈 수 없다. 가마에서 내린 축영대가 무덤 앞에서 제사를 지내고 슬피 울자, 갑자기 양산백의 무덤이 열린다. 축영대가 얼른 무덤 안으로 뛰어들고, 무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닫힌다.

양축 이야기는 여러 지방지의 기록에서 엿볼 수 있듯이 역사적으로 실재했던 인물과 사건을 소재로 삼은 듯한 기술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오랜 시간에 걸쳐 넓은 공간에 전파되는 동안 이야기를 뒷받침할 만한 증거물로서 무덤과 사당, 독서처 등을 곳곳에 남기고 있다. 따라서 이야기를 하는 화자나 이야기를 듣는 청자 모두가 이야기의 진실성을 믿는 가운데 역사화가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양축 이야기는 전설의 전형적 성격을 고루 갖추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양축 이야기의 원형은 대체로 위진남북조 시기, 특히 동진 시기에 이루어졌다고 보고 있다. 양축 이야기는 송대 이후 명청대를 거치면서 각종 서사장르, 이를테면 잡극雜劇이나 전기傳記, 각종 지방희 등의 희곡, 탄사彈詞나 고사鼓詞, 목어서木魚書 및 보권寶卷 등의 곡예, 그리고 민간설화의 주요한 소재가 되었으며, 20세기 이후에는 소설과 영화, 에니메이션, 발레, 교향악, 텔레비전 드라마 등의 다양한 영역에서 각광받는 소재로 등장하였다. 아울러 현재 양축 이야기는 중국에서 무형문화재와 문화상품으로서 그 존재가치를 크게 인정받고 있다.
위의 기본적인 줄거리에서 알 수 있듯이, 양축 이야기는 ‘남장’과 ‘순사’라는 모티프를 운용하고 있으며, 각종 서사장르로 확산되는 과정에서 축영대가 여자임을 밝혀내려는 ‘탐색’의 모티프와 순사한 축영대의 옷이나 혼이 나비로 변한다는 ‘화접化蝶’의 모티프를 추가하기도 한다. 이들 여러 모티프들 가운데에서 양축 이야기를 다른 이야기와 구별짓는 가장 중요한 모티프는 ‘남장’과 ‘순사’라고 할 수 있다. 아울러 ‘화접’의 모티프는 송대 이후에야 덧붙여졌으리라 추정되지만, 양축 이야기를 구성하는 중요한 모티프이므로 여기에서 함께 다루기로 한다. 이제 양축 이야기의 원형을 찾아가는 과정의 첫 걸음으로서, 위진남북조 시기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각종 문헌에 ‘남장’과 ‘순사’, ‘화접’이라는 모티프가 어떻게 나타나 있는지를 살펴보기로 하자.

■ 남장男裝
역사 기록에 등장하는 최초의 남장 여인은 하夏나라 최후의 군주인 걸왕桀王이 총애했던 말희末喜 혹은 ?嬉이다. 주지하다시피 걸왕은 은殷나라 최후의 군주인 주왕紂王과 더불어 중국 역사상 가장 포악하고 황음무도했던 폭군이며, 결국 은나라의 탕왕湯王에게 토벌되어 쫓겨나고 말았다. 말희는 뛰어난 미색으로 걸왕의 마음을 사로잡아 온갖 악행을 저질렀는데, ≪한서漢書·외척전外戚傳≫에 실린 안사고顔師古의 주석에 따르면 “용모는 아름다우나 덕이 없고, 행실은 여자이나 마음은 장부(美於色, 薄於德, 女兒行, 丈夫心)”였다고 한다. 사내 대장부의 기질을 지닌 말희가 남장을 하였다는 것은 ≪진서晉書·오행지五行志≫에 “말희는 남자의 관모를 썼다(末喜冠男子之冠)”라고 기록되어 있다.
말희에 뒤이어 남장한 여인에 관한 역사 기록은 춘추시대 제齊나라 영공靈公에게서 볼 수 있다. 영공은 신변의 여인들이 남장한 모습을 즐겨 구경하였는데, 이로 인해 궁중의 궁녀로부터 시비에 이르기까지 모두들 남자의 복장을 하였다. 그러자 온 나라의 부녀들까지 이를 본떠 남장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이 눈에 거슬린 영공은 민간의 여인들은 남장을 하지 못하도록 영을 내렸지만, 남장의 풍조를 막을 수 없었다. 화가 치민 영공은 남장한 여인의 옷을 찢고 허리띠를 자르게 하였지만, 그래도 남몰래 남장을 하는 풍조는 여전하였다. 이때 상대부上大夫인 안영安?이 나서서 “남장을 금하려면 우선 궁내부터 시행하여야 하며, 궁내의 여인들이 여자의 옷을 입게 되면 민간 여인의 남장도 저절로 사라질 것”이라고 간언하였다.
남장한 여인에 관한 기록은 ≪남사南史·송서宋書≫의 <진희왕창전晉熙王昶傳>에도 나온다. 진희왕 유창劉昶은 남조의 송宋 문제文帝의 아홉째 아들인데, 폐제廢帝가 즉위한 후에 그의 모반을 의심하자 난을 일으켰다가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자 “창은 일이 그른 것을 알고 밤에 문을 열고서 위魏로 도망하였다. 그는 어머니와 모친을 내버린 채 첩 한 사람만을 데리고 갔는데, 남장 차림으로 말에 태워 뒤따르게 하였다”고 한다. 물론 이 경우는 도주하는 급박한 상황에서 남의 눈을 피하기 위한 남장이라 할 수 있다.
이와는 달리 남장한 여인이 남자에 못지 않은 재능을 발휘하는 경우도 있다. ≪남사·제서齊書≫의 <최혜경전崔慧景傳>과 ≪북사北史·위서魏書≫의 <양대안전楊大眼傳>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실려 있다.

동양東陽이란 곳에 루령婁逞이란 여인이 있었는데, 옷을 바꿔입어 사내로 속였다. 그녀는 대충 장기를 둘 줄 알고 글도 알아 고관들과 널리 교제하였으며, 벼슬이 양주 의조종사議曹從事에 이르렀다. 나중이 남장 여인임이 드러나 제나라 명제明帝가 불러들이라 영을 내렸다. 루령은 비로소 여인의 복장차림으로 떠나면서 이렇게 탄식해마지 않았다. “이 정도의 재주인데도 아낙네로 지내다니 어찌 아깝지 않겠는가!”

양대안의 아내 반씨潘氏는 말타기와 활쏘기에 능하여 직접 군영으로 남편을 찾아가기도 했다. 전쟁을 하거나 사냥을 할 때마다 양대안은 아내 반씨에게 갑옷을 입혀 싸움터를 함께 누비거나 숲과 골짜기를 함께 내달렸다. 군영에 돌아와서 장막 아래에 함께 앉은 채 양대안은 여러 장수와 막료를 마주하여 태연하게 껄껄 웃었으며, 때로 아내를 가리키면서 남에게 이렇게 말하기도 하였다. “이 사람이 바로 반장군이오.”

이들은 모두 역사 기록에 등장하는 인물들이거니와, 남장한 여인에 관한 기록은 문학 텍스트에도 등장한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화목란花木蘭의 남장종군男裝從軍과 관련된 이야기가 바로 그것이다. 이 이야기의 텍스트는 원래 송나라 곽무천郭茂?이 편찬한 ≪악부시집樂府詩集≫에 실려 있는 <목란시木蘭詩>이다. 이 시는 <공작동남비孔雀東南飛>와 더불어 위진남북조 시기의 북방 민간서사시의 대표작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이 시의 창작 시기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지만, 대체로 북조시대에 이야기의 원형이 형성되어 남방으로 유전되었다가 수당 시기에 문인의 윤색을 거쳤으리라 보고 있다.
<목란시>의 내용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군병을 징집하는 천자의 칙령이 내렸는데, 징집 대상자의 명단에 목란의 아버지가 올라 있다. 목란의 집에는 아들이 없는지라 목란이 아버지를 대신하여 전장에 나가려 한다. 목란이 말과 안장, 채찍을 사서 전장에 뛰어든 지 어느덧 십년이 넘는다. 수많은 공적을 세우고서 천자를 알현하지만, 목란은 관직도 마다하고 고향으로 돌아온다. 고향으로 돌아와 군복을 벗어던지고 치마로 갈아입고서야, 동료들은 그가 여자임을 알게 된다.
이로써 위진남북조 시기에 이르기까지 남장한 여인에 대한 기록이 적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남장한 여인에 대한 기록은 당대唐代에 이르러 더욱 많아진다. 이를테면 ≪구당서舊唐書≫와 ≪신당서新唐書≫에는 고종高宗과 측천무후則天武后 사이에 태어난 태평공주太平公主가 남장을 즐겨 하였다는 기록이 실려 있고, 측천무후 역시 어렸을 적에 남복을 입혀 키웠다는 기록이 실려 있다. 현종玄宗 때에는 궁중의 여인들이 남장 차림에 호모胡帽를 쓰고 말을 타고 다니는 풍조가 성행했으며, 무종武宗의 비妃인 왕씨王氏는 무종과 함께 남장 차림으로 사냥을 하였는데 무종과 분별할 수 없었다는 기록도 실려 있다.
이처럼 여인이 남장하는 풍조가 성행했던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태어난 것이 <사소아전謝小娥傳>이라 할 수 있다. 이공좌李公佐의 대표적인 전기소설인 이 작품에는 복수를 위해 남장한 여인 사소아를 그려내고 있다. 사소아는 장사를 하던 아버지와 남편이 강도를 만나 죽임을 당하는 불운을 겪는데, 아버지와 남편의 원혼이 수수께끼를 일러준다. 수년 후에야 어느 관리의 도움을 받아 수수께끼를 푼 사소아는 남장을 하여 우여곡절 끝에 원수를 갚는다.
이밖에도 당대의 온정균溫庭筠이 지었다고 전해지는 ≪건손자乾巽子≫에도 남장한 여인이 등장한다. 이 이야기는 ≪태평광기太平廣記≫ 권367의 <맹구孟?>에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내 남편 장찰張?은 곽분양郭汾陽에 의해 임용되었는데, 곽분양이 여러 차례 청을 올려 의대를 하사받아 늘 그의 곁에 있었다네. 장찰의 모습은 모습은 나와 아주 비슷하게 생겼었지. 장찰이 죽자 곽분양은 매우 가슴아파했네. 그래서 나는 남편의 의관으로 위장하여 장찰의 동생이라 명함을 내밀어 곽분양을 모시게 해달라고 청했네. 곽분양은 크게 기뻐하면서 나로 남편의 빈자리를 대신하게 해주었지. 그렇게 해서 15년을 살았어. 곽분양이 돌아가셨을 때 내 나이 벌써 일흔 둘이었다네. 군중에서 거듭 상주문을 올려 나는 어사대부의 관직을 겸하게 되었네. 그런데 갑자기 외롭다는 생각이 들어 이 가게의 반씨潘氏 노인에게 시집가 아내가 되었지.

이렇게 살펴보노라면, 당대에 <사소아전>이나 <맹구>가 출현하였던 것은 결코 돌연한 일이 아니라, 오랜 기간에 걸친 역사서의 기술과 문학적 창작에 힘입은 것임을 알 수 있다. 특히 당대 사회의 개방적인 분위기가 남장한 여인에 대한 기술을 더욱 성행케 하였으리라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 순사殉死
사랑하는 임과 평생 희로애락을 함께 하는 것은 동서고금의 청춘남녀의 바람일 것이다. 그러나 사랑이 아무리 뜨겁다 할지라도 사랑의 완성을 가로막는 요인은 너무나 많고 불시에 닥쳐온다. 그리하여 세상을 먼저 떠난 임을 좇아 목숨을 버리기도 하고 사랑을 이루지 못해 목숨을 내던지기도 한다.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시집인 ≪시경詩經≫에도 이룰 수 없는 사랑으로 인한 괴로움을 토로하는 시가가 적지 않다. 그 가운데 하나인 <왕풍王風·대거大車>에서는 “살아서 방을 달리 하더라도 죽어서는 무덤을 함께 하세. 내 말을 믿지 않는다면, 저 하늘의 해에 맹세하리(穀則異室, 死則同穴, 謂予不信, 有如?日)”라고 노래한다. 지극한 사랑을 위해서라면 죽음마저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순사의 의지를 내비치고 있는 것이다.
사랑하는 이를 따라 죽은 순정殉情의 여인으로 우리는 제일 먼저 순舜 임금의 아내였던 아황娥皇과 여영女英이라는 두 자매를 떠올릴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아황과 여영은 전설속의 임금인 요堯의 딸이다. 요는 재능과 덕망을 겸비한 순에게 제위를 선양하는 한편, 두 딸을 순에게 시집보냈다. 그리하여 아황은 순의 왕후가 되고, 여영은 비妃가 되었다. 훗날 순은 남방을 시찰하기 위해 떠났는데, 이를 나중에 알고서 뒤쫓아간 자매는 동정洞庭에 이르러 순이 창오蒼梧에서 죽어 구의산九?山 아래에 묻혔다는 것을 듣게 되었다. 자매는 슬픔에 겨워 눈물이 그치지 않았는데, 이때 흘린 눈물에 젖은 대나무는 반죽斑竹이 되었다. 자매는 슬픔을 이기지 못해 끝내 상수湘水에 몸을 던지고 말았다.
아황과 여영의 순정은 이후 수많은 문인에 의해 읊어져 전해졌다. ≪산해경山海經≫에서는 “동정호에는 순 임금의 두 여인이 살고 있어 늘 강 깊은 곳에서 노니는데, 드나들 때마다 거센 비바람이 휘몰아친다(洞庭之中, 帝二女居之, 是常遊於江淵, 出入必以飄風暴雨)”고 하였으며, 굴원屈原은 그의 ≪구가九歌≫ 가운데 <상군湘君>과 <상부인湘夫人>을 지어 두 자매의 덕을 찬양하였다. 또한 한나라의 유향劉向은 ≪열녀전列女傳≫의 <유우이비有虞二妃>에서 “유우씨의 두 부인은 요 임금의 두 딸이며, 큰딸은 아황, 작은딸은 여영이다(有虞二妃, 帝堯二女也, 長娥皇, 次女英)”이라고 적었다. 양梁나라의 임방任昉 역시 ≪술이기述異記≫에서 순 임금 및 자매와 관련된 여러 유적들에 대해 기술하였다. 이로써 아황과 여영의 순정에 관련된 기술이 끊임없이 이어져 왔음을 알 수 있다.
지아비를 잃은 비련의 여인이 지아비를 좇아 목숨을 버리는 이야기는 맹강녀孟姜女에게서도 되풀이된다. 앞에서도 언급하였지만, 맹강녀 이야기는 중국의 사대 민간전설의 하나로서 오랫동안 민간에 널리 전해져온 이야기이다. 맹강녀의 이름은 이미 ≪시경·정풍鄭風≫의 <유녀동거有女同車>에도 나오는 바, “저 아리따운 맹강이여, 진실로 아름답고 어여쁘구나(彼美孟姜, 洵美且都)”, “저 아리따운 맹강이여, 정겨운 목소리 잊지 못해라(彼美孟姜, 德音不忘)”라고 노래하고 있다.
맹강녀 이야기의 추형은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양공襄公≫ 23년의 기록에 적혀 있다. 즉 제나라 임금인 장공莊公이 거?나라를 치다가 패하는 바람에 기량杞梁은 죽고 말았다. 제나라로 돌아온 장공이 남편을 마중나온 그의 아내를 위로하자, 그의 아내는 “제 남편에게 죄가 있다면 어찌 군왕의 위로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만일 죄가 없다면 선대로부터의 초가집이라도 있으니 이 들판에서 위로를 받을 수야 없지요”라고 대답하였다는 것이다. 이처럼 전쟁터에서 남편을 여읜 여인의 이야기가 보다 온전한 줄거리를 갖추어 기록된 것은 한나라 유향劉向의 ≪열녀전列女傳≫ <정순전貞順傳>에 실린 다음의 이야기이다.

기량의 처는 자식이 없는데다 안팎으로 가까운 친척이 아무도 없었다. 남편이 돌아오지 않자 이에 남편의 주검을 성 아래에서 찾아내고서 슬피 울었다. 그 마음의 정성이 사람들을 감동시켜 길을 지나는 자마다 눈물을 훔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열흘 동안 울자 성이 무너졌다. 그녀는 남편을 묻으면서 말했다. “나는 어디로 돌아갈거나! 부인이라면 반드시 의지할 곳이 있을 터, 아비가 있으면 아비에게 의지하고 남편이 있으면 남편에 의지하고 자식이 있으면 자식에게 의지하련만, 이제 나는 위로는 아비가 없고 가운데로는 남편이 없고 아래로는 자식이 없으며, 안으로는 나의 정성을 드러내어 기댈 곳이 없고 밖으로는 나의 절개를 세워 기댈 곳이 없구나. 내 어찌 두 마음을 가질 수 있으리오! 역시 죽을 따름이로다!” 그리하여 마침내 치수淄水로 달려가 죽고 말았다.

이 이야기는 전쟁터에서 죽은 남편의 시신을 성 아래에서 찾아냈으며, 끝내 남편의 뒤를 좇아 순사하였다는 것뿐이다. 이 이야기는 훗날 진시황의 만리장성의 축성을 배경으로 하는 설화로 발전되어 민간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 즉 진시황의 만리장성 축성에 끌려간 남편이 고된 노동으로 인해 쓰러져 죽고, 소식 없는 남편을 찾아온 아내는 남편이 죽었다는 소식에 슬피 울다가 그 지극한 정성 덕분에 성벽이 무너져 남편의 시신을 찾아냈으며, 성벽이 무너졌다는 소식에 화가 치민 진시황이 그녀를 불러 보고는 그녀의 미모에 반해 첩이 될 것을 요구하지만 그녀는 포악무도한 진시황을 꾸짖고서 남편의 시신을 껴안고 바다로 뛰어들었다는 것이다.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의 괴로움으로 인해 목숨을 버리는 여인 역시 순정형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다. 동진東晉의 간보干寶가 육조시대의 지괴소설志怪小說을 모아 펴낸 ≪수신기搜神記≫에 이러한 순정형 여인이 등장한다. ≪수신기≫ 15권의 당부유唐父喩와 16권의 자옥紫玉이 이러한 경우인데, 각각의 이야기는 아래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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