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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운동사

국민운동사

(정부수립 전.후의 국민운동)

서재권 (지은이), 서민 (엮은이)
  |  
전남대학교출판부
2018-11-30
  |  
18,000원

일반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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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운동사

책 정보

· 제목 : 국민운동사 (정부수립 전.후의 국민운동)
· 분류 : 국내도서 > 역사 > 한국근현대사 > 해방전후사/한국전쟁
· ISBN : 9788968495700
· 쪽수 : 374쪽

책 소개

8.15해방 후 우리나라의 정부수립과정과 6.25사변 직후까지 활발하게 지속되었던 대한독립촉성국민회를 비롯한 각종 애국단체가 벌였던 국민운동의 역사를 서술한 책이다. 저자는 해방 직후부터 이 국민운동의 중심부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으며, 국민운동과정에서 그가 경험한 일들을 사실대로 기술하였다.

목차

저자 서문 / ⅴ
편자 서문 / ⅶ

제1부 정부수립 전의 국민운동 / 1
제1장 서론 / 3
제2장 국민운동의 태동 / 11
제3장 국민운동의 발족 / 59
제4장 국민운동의 강화 / 239

제2부 정부수립 후의 국민운동 / 291
제1장 국민운동의 혁신 (원문 없음) / 293
제2장 정부육성강화운동 (원문 없음) / 294
제3장 전시국민운동 / 295
제4장 환도 후 국민운동 / 311
제5장 결 론(국민운동의 전망) / 339

편집 후기 / 359

저자소개

서재권 (지은이)    정보 더보기
해방 후 건국을 위하여 헌신하고 어떠한 관직도 탐하지 않은 진정한 애국자이었다. 저자는 1906년 1월 전라북도 익산군 왕궁면에서 출생, 1983년 12월 서울에서 사망하였다. 1927년 전주사범학교를 졸업한 후 8년 동안 전라북도 남원, 이리(현 익산시) 등지에서 초등학교 교사로 활동하였고, 1939년부터 1945년까지 만주 금주성 창무현에서 농장을 개척하는 한편 초등학교를 설립하여 운영하였다. 해방 직후 귀국하여 1946년부터 1949년까지는 애국단체연합회, 민족통일총본부의 임원 및 대한독립촉성국민회의 중앙상무위원 등으로 활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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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민 (엮은이)    정보 더보기
충남대학교 법과대학에서 1975년부터 31년간 후학을 양성한 민법학자이다. 편자는 1940년 9월 저자의 3남으로 태어났으며, 1958년 서울대학교 법과 대학에 입학하여 서울대학교에서 법학사, 법학석사, 법학박사학위를 받았다. 충남대학교에서는 법과대학학장, 대학원장을 역임하였다. 대전광역시 지방토지 수용위원회 위원, 대전광역시선거관리위원회 위원으로 봉사하였고, 세 번에 걸쳐 법무부민법개정위원회의 위원 및 위원장으로 민법개정안 연구에 헌신하였다. 학계에서는 한국법사학회 회장과 한국민사법학회 회장의 일을 하였다. 1999년에 국민훈장 모란장을, 2006년에 녹조근정훈장을 수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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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제1부 정부수립 전의 국민운동

제1장 서론

Ⅰ. 서언

국민운동이란 국민의 운동이다. 국민이라면 누구나 하지 아니치 못할 당위적인 운동이다. 개인 즉 소아小我의 생명에 위험이 왔을 때 이를 물리쳐서 그 안전을 도모하기에 최선을 다함을 당연시한다면 삼천만의 민족생명 즉 대아大我를 회생回生시키는 운동이란 당연 이상의 대의요 최고 명분일 것이다.
우리 민족에게는 8ㆍ15해방이란 천여天與의 선물이 왔다. 그러나 자력 해방이 아닌 연합국이란 타력에 의한 해방이었기에 우리가 그 해방을 향유하여 완전한 민족적 자유ㆍ자주국민으로서의 국제적 지위를 확보하는 일은 거저 단순하고 용이하게 성취되지 못했다. 국토가 양단되어서 소위 38선이란 민족적 교수선絞首線을 가져온 8ㆍ15해방은 북한에서는 30여년이란 세월이 흘렀으나 일제 철쇄시절에도 상상조차 못할 정도의 공산독재와 탄압, 그 강도적 수탈 하에 비절참절悲絶慘絶한 생지옥 중에서 신음하는 동포들이 행동의 자유는커녕 사유의 자유조차도 말살당하고 있는 실정이요, 남한에서는 미군정이 민주주의 한국을 육성함에 원조하여 준다 하였지만 군정이 물러가고 우리가 독립을 획득하기까지에는 기다幾多의 우여곡절을 거쳐서, 다시 말하면 국민운동이란 남한 전 국민의 운동과업을 거쳐서 독립정부를 수립하여 3,000만이 국권을 회복한 것이다.
그런데 가탄可嘆할 일은 우리 국민 중에도 어떻게 되어서 미군정이 3년이란 단시일에 물러가고 대한민국이란 독립정부가 수립되었나 하는 점을 소상昭詳히 아는 인사가 드물다는 사실이다. 또한 가소로운 일은 전 모 당 당원 중에는 해방 후 단시일 내에 독립정부가 수립된 것은 자당 전신인 모 당이 전적으로 고군분투해서 독립을 쟁취한 것이라고 자부하고, 10여 년간 그네들은 공사석에서 이 공업功業을 선전하기에 관습화하여왔는가 하면, 당시 미군정청에 근무하던 관리, 개중에도 고급관리로서 후일 정계에 진출한 인사들은 말하기를 “미군정이 미국국무성방침으로서 3년간 군정 실시 후 미군정에 충실히 협력하는 관리들의 정치적 능력을 신임하고서 우리 한국민에게 정권을 이양한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은연 중 자기네 군정관리들의 군정협력공로로 독립을 획득한 것같이 자화자찬한다. 그러면 그 당시부터 상금까지 계속 근무하는 10여만 공무원은 거개擧皆 이 선전에 동조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그보다도 더 가경可驚할만한 사실은 강단에서 국사를 강의한다는 선생님들이 강의하기를 「미군정과 UN총회의 협조로써 광복이 되었다」는 것이다. 좀 더 상세히 강의한다는 사가들이라야 독립과정을 설명하기를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자 미국은 한국문제를 UN총회에 제소하니까 동 총회에서는 소총회를 구성하여 가지고 동 회로 하여금 한국실정을 시찰조사한 뒤에 동 회 결의로써 남한만을 UN감시 하에 총선거를 실시하여 민주방식을 밟아서 행정권을 이양한 것이다」라고 당시 경과된 피상적인 양상만을 개괄적으로 파악하여 이상과 같은 내용으로 학생들에게 수업하는 정도이다.
무릇 역사를 다루는 인사라면 모름지기 구비해야 할 것이 있으니, 즉 역사가 흐르는 저류, 다시 말하면 창조되어가는 역사의 밑바닥을 통찰할 만한 관찰력, 즉 사가로서의 사안史眼이 있어야 할 것이며, 이 사안을 밝혀서 역사의 흐름을 관찰할 때에 또 한 가지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은 그 역사의 주체가 누구인가, 일국의 흥망사를 탐구할 때에 반드시 관찰하여 파악해야 할 것이 그 역사의 주체가 어디 있나, 중심세력이 어딘가를 관찰하여서 그 진수眞髓를 파악하여야 할 것이다.
비근한 예로서 한 가정사를 탐구하려함에 먼저 그 가정을 운영하는 주체인 호주를 만나야 하고, 그 호주의 정신을 파악치 아니하면 안 될 것이다. 하물며 삼천만민족이 몽매간夢寐間에도 잊지 않고 염원하던 국권 회복에 그 주도적 역할을 한 것이 누구인가, 이 운동의 중심세력이 어디 있었나를 관찰하여서 그 정통을 파악치 못하고서는 대한민국 건국사의 진수를 파악하였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Ⅱ. 국민운동의 동인動因

각설却說! 해방의 종소리가 울리자 40년 간 정치에 굶주렸던 이 민족은 저마다 항일투사연하여 애국을 표방하고, 저마다 해외망명가연하여 건국을 절규하면서 정당을 만들고, 사회단체를 조작造作하여 이 우후죽순같이 족출簇出하는 정당과 단체로 인하여 국내가 소연騷然함을 본 오화영吳華英 선생은 영웅천지두난거英雄天地頭難擧요 호걸강산족부답豪傑江山足不踏이라고 개탄하였다.
이때에 미국에서 이승만李承晩 박사가 환국하니 정계 지도자들이 거개 이 박사를 중심으로 건국을 해보려 하여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구성하였다. 그러나 거무하居無何에 중경重慶에서 임시정부가 환국하니까 정계는 다시 임정을 중심으로 그 법통을 내세워서 정권을 획득해보려고 우왕좌왕하였다. 그러다가 1945년 세모歲暮에 이르러서 모스크바 3상결정으로 신탁통치안이란 청천벽력이 떨어지자 이 민족도 미몽迷夢에서 깨어났다. 그래서 「독립은 연합국이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고 우리 민족 자체가 주체주동이 되어서 독립운동에 새로운 출발을 해야 되겠다」고 깨닫게 되었다. 국제 외세에 정신이 팔리지 아니한 배달혼陪達魂을 가진 자라면 누구나 이와 같이 각성함과 동시에 분연 궐기하였다. 이러한 동지들이 경향각지에서 동지를 규합해서 반탁운동을 전개했는데 이 반탁, 즉 독립운동이 장기전으로 돌입케 되매 그 운동태세 또한 일시적이어서 지구적인 기구로 발전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 이 운동에 나선 동지들이란 거개가 무명인사들로서 해방 후 정권 감몽甘夢에 도취되어 정당에 가담해서 정치운동을 하던 소위 정객은 드물고, 다만 독립제단獨立祭壇에 혈과 육을 제물로 바치겠다는 정렬에 불타는 인사들만이 누구의 소개나 추천 없이 자연스럽게 지기상합知己相合하여 규합되어가지고 중앙과 각 지방의 유지가 철석같은 굳은 단결 하에 반탁자주독립만을 유일한 목적으로 삼고 해방 후 처음으로 순수한 독립운동, 즉 국민운동단체를 창설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대한독립촉성국민회(약칭 : 국민회)」이다.
이 단체는 당무當務한 동지들이 앞날에 어떠한 정치적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인위적인 결성이라기보다는 삼천만민족의 지상명령이요, 유구 반만년 내려오는 대배달혼大陪達魂의 대압력에 부닥침을 영감으로 느끼니 이를 못 이겨서, 즉 건국의 사명감에 부닥치니 일체의 사리사욕을 떠나서 순연한 애족의 충정과 독립열정에 불타올라 무아의 심경으로 돌아가서 문자 그대로 발분망식發奮忘食하면서 공산폭력과 군정압력에 항거불굴할 뿐 아니라, 그 모든 사선과 장애를 낙으로 삼고 용왕매진勇往邁進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왜 그와 같이 열렬하였던가? 그것은 그들의 정신을 사로잡은 것은 국가뿐이었기 때문이다. 국가가 모든 것이다. 국가가 생의 전부이다. 그러니 먼저 국가를 생각하자! 국가를 이룩하자! 이 목적만을 위해서 나의 사유, 나의 행위, 나의 일체를 이 국가건설에 총집중하자는 일념뿐이었으니, 말하자면 국가건설광이 되었기 때문이다.
창립 당초에 중앙과 지방 인사들의 성분을 보면 거개가 해방 전후에 국내외에서 항일반공투쟁에 있어서 자타 공인할 만한 인사들만이 지역의 남북도 없고, 파벌과 계급을 초월해서 순수한 동지결속만으로 1946년 2월 8일에 서울 한복판인 인사동 중앙교회에서 고고呱呱의 탄성誕聲을 울렸다. 미군정이나 내외언론계나 정계나 누구의 주목도 끌지 않고 미미한 중에서 마치 대지를 뚫고 나오는 춘초春草와도 같이 솟아나왔다.
그 당시 국내정세는 어떠하였던가? 1946년 1월 하순에 임정에서는 비상국민회의를 소집하고 임정법통을 추대해서 미군정으로부터 정권 이양을 받으려고 서두르는가 하면, 미군정은 2월 14일에 남조선대표민주의원을 조작하여 이 기관으로 하여금 장차 정권을 인수케 할 눈치를 보였다. 한편 공산좌익계열은 그네들 독특한 수법으로 음성과 양성인 기구와 지상과 지하의 조직을 총망라한 기관, 즉 민주주의민족전선을 2월 15일에 결성해가지고 우익민주진영과 대결하려는 태세를 선포하였으며, 이 좌우익의 현란한 정치무대에만 천하의 이목이 끌리었다. 이러한 때에도 독립촉성국민회만은 중앙에서 자체의 정비로 그 결속의 공고를 기하는 한편, 산하 조직망의 확대강화를 위하여 심혈을 경주하였다. 공산파괴분자들의 방해폭력뿐 아니라 우익 민주진영 내 기성 정당단체로부터도 형형색색의 장애와 압력을 받으면서도 꾸준히 싸우면서 일해왔다. 중앙과 지방에서 기천기만의 열렬한 동지들이 나라 없이 살아온 40년간의 뼈저린 설움을 서로서로가 말없이 회상하고 분격을 새로이 하면서 기한飢寒도 잊고, 처자들 생활고도 불고할 뿐 아니라 일체를 희생해가면서 오로지 자주독립만을 최고최대의 목표로 하여 용왕매진하였다. 그러므로 불과 반년이 지난 뒤에는 남한 전역 내 방방곡곡에까지 독립촉성국민회 간판이 붙을 뿐만 아니라 벽촌한리僻村寒里까지도 반탁독립운동 진두에 민중을 총궐기시킨 것이다.

Ⅲ. 대한독립촉성국민회의 성공요인

무릇 해방 이후에 남한에서 수백여 개의 정당과 사회단체가 나왔으나 독립촉성국민회와 같이 단시일에 전국적으로 조직망이 확대될 뿐만 아니라, 각 조직체가 살아서 열렬하고도 꾸준히 지구적으로 그 운동을 지속한 단체가 없다. 그 원인이 어디 있느냐?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국민운동에 나선 인사들이
첫째는, 기미년 독립운동이 독립선언에만 그치고 실천단계에 들어가지 못한 울분과 애국정열이 쌓이고 쌓인 지 26년, 일제의 철쇄에서 해방된 우리 민족이 그 당시의 정신, 즉 삼일독립운동정신으로 돌아가 이제야 기어코 독립을 실현해보겠다는 결사적인 각오 하에 자발적으로 분기하는 열렬한 동지들이 전국적으로 봉기하여 이 운동에 정신挺身하였다는 점이요,
둘째는, 이 삼일독립정신 하에 궐기한 각급 간부들인지라 어떠한 정치적 야망이나 사리사욕이 없이 순수한 애국심뿐인 무아의 심경으로 이 운동에 헌신하였다는 그 순수성이요,
셋째는, 항일독립운동에 일생을 바치신 이승만李承晩 박사와 김구金九 선생, 이시영李始榮 선생, 오세창吳世昌 선생 같은 위대한 인격자를 이 운동의 영도자로 추대하여 이 영수들의 지도방략指導方略을 금과옥조로 삼아 수화불사水火不辭 절대 실천함에 현명적懸命的이었다는 점이다.
이 세 가지가 합쳐지니 그 단결의 공고함이 강철 이상이요, 그 운동의 열렬함이 실로 백열적白熱的인 것이었다. 물론 본회의 중앙본부와 지방 각급 지부가 혼연일체가 되어 유기적인 연락과 기동성 있는 기획으로써 과감하고도 신속하게 운동을 전개하므로 반공 반탁 독립운동이 활발하게 추진된 것이다.
다음에 구명究明하여 높이 평가할만한 점은 본 국민운동을 전개하여 유종의 미를 거두게 된 것은 본회 전 간부들이 현명한 이성으로 냉철한 비판력을 늘 발휘하여 영도자를 선택할 줄 알았다는 점이다. 본회 창립 당초부터 수년간 본회 육성과 본 국민운동 전개를 적극적으로 지도해주신 부총재 김구 선생이 총재 이승만 박사의 독립노선과 갈라질 때 일인의 이의나 일분의 주저도 없이 전 간부가 총재 이승만 박사의 운동노선으로 총단결하여 미동도 하지 않고 최후목적 달성까지 일로매진하였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승만 총재의 운동노선이 진선진미한 성공적인 독립노선이게 한 소이연所以然은 당시의 미군정 최고책임자 하지 중장과 대결하여 그를 굴복시켜서 이승만 박사의 독립노선에 협조하도록 미국무성 당국자로 하여금 대한정책을 일대수정하게 할 뿐만 아니라, UN 당국자들이 또한 이승만 박사의 독립노선을 이해하고 이를 원조하도록 그 분위기를 조성한 데 있었다. 이는 또한 영명한 이승만 총재의 심계원모深計遠謀 하에 그 명을 받들어 3년간이란 긴 세월동안 미국 수도 워싱턴과 UN본부가 있는 뉴욕에서의 숨은 활동, 즉 외교공작이란 뒷받침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국민운동을 너무나 과감하고도 열렬하게 전개한 탓으로 중앙과 지방에서 수시로 공산도배들에게 불의의 습격을 받아 그 가옥이 파괴될 뿐 아니라 동지들 생명까지 희생된 불상사가 부절하였는데, 그 중에도 10월 영남 일대 폭동에는 각 지방에서 국민회 각급 지부 동지들이 막대한 희생을 당하였다. 이와 같이 국내에서의 고귀한 희생을 바쳐가면서 전개한 독립운동은 미국을 비롯한 UN 우방들의 깊은 이해와 협조를 얻어서 1948년에 5ㆍ10선거를 거쳐 민주방식에 의한 국권회복이 성취된 것이다.
이 대한민국이란 극동의 반공민주보루국가가 건립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후 탄생한 세계평화기구인 UN이 거둔 최대의 광휘光輝 있는 수확인 동시에 또한 세계역사상 최초로 이룩한 인류협동정신의 거룩한 구현이다. 다시 말하면 진보되어가는 인류사상에 최초로 창조한 협동과 자유와 평화의 이상적 산아産兒, 가장 거룩한 옥동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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