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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사회과학 > 여성학/젠더 > 여성학이론
· ISBN : 9788972971924
· 쪽수 : 396쪽
· 출판일 : 2025-12-22
책 소개
“자기이론의 전범이고, 내게는 올해의 책이다.” - 양효실
미국사회학회 ‘아시아 및 아시아계 미국인 부문’ 우수도서상 수상작
《전쟁 같은 맛》 그레이스 M. 조의 첫 책
말해지지 못한 것을 번역하고, 삭제되고 조각난 존재를 복원하기
사회적 존재로서의 유령을 탐구하는 대담하고 아름다운 시도
죽은 자의 존재감을 느껴본 적 있는가? 살아 있는 사람임에도 희미하고 투명한 배경 같다는 느낌, 혹은 죽은 사람의 무언가가 내 곁을 떠돈다는 느낌을 경험해본 적 있는가? 한국계 미국인 학자 그레이스 M. 조는 자라는 내내 가족 안에서 유령처럼 존재하는 어머니를 느꼈고, 그것의 진상을 파악하는 것을 자기 삶의 과제로 삼는다. 그의 또 다른 책 《전쟁 같은 맛》이 어머니의 삶을 예술적으로 풀어낸 회고록이었다면, 저자의 첫 책인 이 연구는 그러한 목표를 가지고 시작한 탐구가 어머니와 유사하게 유령적 존재가 된 이들로 확장되고, 그들의 전말을 온전히 추적하고자 한 분투의 결과물이다. 특히 한국과 미국 양쪽에서 유령이 된 양공주를 탐구하는 이 책은 다음의 질문에 답하고자 한다. 당사자가 지각하지 못한 트라우마를 어떻게 대신 보고 들을 수 있는가? 어떻게 삭제된 기억을 복원해 역사의 구멍을 메울 수 있는가? 유령적 존재가 연구의 대상이 될 때, 그 탐구와 기록은 어떻게 가능해지는가?
저자는 책 전반에 걸쳐 양공주가 한국전쟁, 기지촌 생활, 미국 이주를 거치며 어떻게 등장해 어떤 트라우마를 경험하고 어떻게 삭제되었는지 보여준다. 그리고 그 삭제가 어떻게 유령을 생성했는지, 유령이 어떻게 산 자들 주위를 배회하며 그들에게 영향을 미쳐왔는지 밝힌다. 저자는 배회하던 유령이 산 자의 몸을 빌려 말한다는 것을 발견하고, 그 몸들이 경험하는 환시나 환청을 비정상적 광기가 아니라 유령의 존재를 관찰할 수 있는 새로운 통로로서 볼 것을 제안한다. 이를 통해 유령 연구가 트라우마에 대한 새로운 형태의 지각을 짜맞추는 창의적인 힘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저자는 이 연구를 통해 유령의 배회를 삭제된 존재가 기억되는 역사의 한 양식으로 위치시키고, 미결된 역사에 윤리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현재적 장소로 설정하고자 한다. 유령에게 배회당하며 정동적 유대를 형성한 몸들은 그들과 비슷한 몸/유령들을 찾아내는 정치적 힘을 가지기 때문이다. 이렇게 양공주는 위안부, 환향녀뿐 아니라 동두천 옛 성병관리소 철거 저지를 위해 싸우는 이들과도 동시대적으로 연결된다.
유령을 목격하기 위해 시도한 연구 방법론 또한 흥미롭고 새롭다. 유령을 목격하기 위해서는 파편화된 이미지, 감정, 목소리들 속에서 트라우마의 흔적을 읽어내야 한다는 관점 아래, 저자는 한인 디아스포라들의 구술사, 문학, 공연/전시, 꿈, 자문화기술지 등 다양한 양식에 흩어져 있는 유령의 상흔들을 그러모은다. 그리고 실제와 허구, 자기와 타자, 언어와 비언어, 의식과 무의식, 학문과 예술의 경계를 넘나드는 실험적 글쓰기를 펼쳐 보인다. 미학자 양효실은 이 책을 “동시대 페미니즘·퀴어·장애학의 실천으로 부상 중인 자기이론의 전범”이라고 평했고, 출간 당시 세계적으로 저명한 사회학회인 미국사회학회(ASA)에서 ‘아시아 및 아시아계 미국인’ 부문 우수도서상을 수상했다.
유령 연구란 무엇인가?
언어, 의식, 실증 바깥의 존재가 탐구의 대상이 될 때
한국계 미국인 사회학자인 그레이스 M. 조는 한국전쟁 이후 한반도에 머무른 미국 상선의 선원이었던 미국인 아버지, 그리고 그와 결혼해 미국으로 이주한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미국에서 디아스포라로 자라면서 몇 가지 경험을 한다. 어머니의 희미한 존재감과 그의 과거에 대한 집안의 침묵, 저자의 십 대 시절 발병한 어머니의 조현병, 그리고 스물세 살에 처음으로 알게 된 ‘양공주’라는 단어. 그 순간 “나라는 사람을 있게 한 폭력의 역사와 난데없이 마주”친 저자는 “가족에 관한, 그리고 내가 태어난 나라와 나를 받아준 나라, 그리고 나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서사를 만들어내는 것”을 목표로 하는 학문적 여정을 시작한다.
저자는 대학원에 입학해 한국전쟁 당시의 일들과 미군 기지촌의 노동자들, 미국으로 이주한 ‘전쟁 신부’들의 경험을 연구하고자 했지만 이 작업은 결코 녹록지 않았다. 전쟁이 남긴 트라우마는 너무 고통스럽거나 위험해 입 밖에 내기 어려울 때가 많았고, 기지촌의 매춘부로 일했던 경험은 당사자 개인과 그들의 가족, 한국 정부에게도 숨기고 싶은 역사였기 때문이다. 전직 기지촌 여성들은 자신들의 경험을 숨기거나 속였고, 심지어는 저자의 어머니처럼 정신질환으로 인해 온전한 서사를 구사하지 못했다. 이들에 대한 한국과 미국의 공적 담론 또한 부재했다. 실증주의적 전통의 사회과학계에 속하던 저자는 실증의 렌즈로는 이들의 존재를 포착하기 어렵다고 느낀다. 이를 계기로 그의 연구 질문은 다음의 형태로 나아가게 된다. “겹겹이 삭제된 층들이 셀 수 없이 많은 상황에서 과연 어떻게 진실을 알아낼 수 있을 것인가?” “트라우마의 주체도 지각하지 못하는 트라우마를 어떻게 보고 들을 것인가?”
저자는 트라우마 당사자와 정서적으로 깊게 연결된 몸, 바로 그들의 자녀들로부터 활로를 찾는다. 그는 홀로코스트 생존자 자녀들에 관한 연구가 보여주듯, 한국전쟁 생존자 자녀들 역시 부모가 숨긴 과거의 트라우마에 의해 지속적인 영향을 받고 있음을 발견한다. 그들은 손에 잡히지 않거나 보이지 않는 힘의 형태를 한 침묵이 자신을 배회하고 있다고 느끼고, 배회하는 것들에 무의식적으로 이끌리며, 가족 내의 침묵에 집착하거나 직접적으로 경험한 적 없는 트라우마를 지각한다. 라캉에 의하면 ‘불충분한 애도’ 때문에 생겨나, 데리다에 의하면 ‘계속해서 돌아오는 것’이 유령이라고 했다. 그렇게 저자는 실증주의의 관점을 벗어던지고 ‘유령 연구’를 시도한다.
유령 연구란 무엇인가? 비이성을 일축하는 전통적 사회과학의 범주를 넘어서는 것, 승인받지 못한 것, 얼핏 봤을 땐 부재하지만 숨 막히는 존재감을 가지고 현실에 작용하는 것, 현재 안에 들어 있는 과거를 연구하는 것이다. 유령은 단순히 죽거나 사라진 사람이 아니라 사회적 존재이며, 이들을 연구하는 일은 사회와 망자의 관계, 그중에서도 특히 불의에 희생당한 사람들과의 관계를 재고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유령에 관한 탐구는 잊힌 폭력의 역사를 기억하는 한 양식이자, 그것에 윤리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현재적 장소가 된다.
한국사 뒤편에 묻혀 있던
양공주의 유령화 과정을 추적하기
그렇다면 누가 왜, 어떻게 유령이 되는가? 저자는 트라우마가 은폐되고 침묵당해 제대로 해소되지 못했을 때 유령이 생성된다고 말한다. 이 책의 2~4장을 통해 그는 양공주의 유령화 과정을 추적한다. 2장은 먼저 그 최초의 트라우마가 생겨난 현장인 한국전쟁 초기로 되돌아가 미군에 의한 학살의 참상을 생생히 보여주고, 이러한 전쟁의 트라우마가 양공주라는 유령의 토대가 된다는 점을 드러낸다. 양공주는 한국의 분단과 미국에의 종속을 고통스럽게 상기시키는 존재가 되고, 한국인들이 전쟁 기간 경험한 공포, 비통함, 수치심, 분노, 감사, 갈망과 같은 혼란을 투사하는 스크린이 된다.
3장은 한국전쟁 전후 기지촌 매춘의 역사적·정치적 조건들을 개괄하며 양공주가 군사화된 실천들에 종속되어 있는 한편, 한국의 트라우마적 역사에 의해 구성됨을 보여준다. 그리고 한미 관계의 특정한 국면에 따라 양공주의 몸이 가시화되었다 비가시화되었다를 반복하며 한국의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들이 경합하는 전장이 된 과정을 다룬다. 이 과정에서 기지촌 여성이 경험한 실제 폭력과 트라우마는 단단히 함구됨으로써 유령이 생성된다.
4장은 미군과의 결혼으로 미국에 이주한 10만여 명의 양공주들로 시선을 옮긴다. 미국의 이민자 연구는 미국 내 한인들이 아시아계를 통틀어 가장 동화가 잘 된 ‘모범 소수 인종’이라고 평가하지만, ‘명예 백인’이 되는 일은 디아스포라의 역사에 내장된 트라우마적 기억들을 삭제할 것을 요구한다. 또 저자는 군인 신부로서 한인 여성들의 결혼 생활이 가족으로부터의 배척, 생활고, 가정폭력, 정신 질환으로 점철돼 있다는 점을 짚고, 이 모든 트라우마가 ‘아메리칸 드림’이라는 미국의 공적 담론에 의해 부정됨으로써 그들이 더욱 더 유령 같은 존재가 되었음을 보여준다.
광기를 재사유하고 역사를 현재화하는
정치적 행위자로서의 유령
이렇게 유령이 된 존재는 무엇을 하는가? 그는 자신이 말하지 못하는 것을 대신 말해줄 몸을 찾아 시공간을 가로질러 퍼져나간다. 유령은 독자적인 행위자성을 갖고서 자신에게 정동적으로 연결된 몸 주위를 배회하고, 그 몸들에게 트라우마적 이미지와 목소리를 퍼뜨린다. 트라우마를 체현한 이 몸들은 종종 그것을 조현병적 환시와 환청으로 경험하는데, 저자는 이러한 광기를 정신병리적 비정상성으로만 여기는 해석을 거부하고, 삭제된 것을 독해하는 생산적인 수단으로 새롭게 의미화한다. 서평가 정희진이 말하듯 저자는 “극복(re-covery)의 서사를 새로운 발견(dis-covery)으로 전환”시킨다.
또한 이 책은 트라우마를 체현한 몸들이 보고 듣는 이미지와 목소리를 ‘무대에 올려’ 보여줌으로써 유령의 영향을 개인적인 영역에서 사회적인 영역으로 끌어낸다. 이러한 시도는 유령에 정치적인 힘을 불어넣는데, 비슷한 트라우마와 취약성을 공유하는 몸들과 유령들이 서로를 찾아내고 정동적인 유대를 빚어내게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양공주의 유령은 청나라에 끌려갔다 돌아온 조선의 환향녀부터 일제 시대의 위안부, 미군 기지촌에서 일하는 각국의 이주노동자 여성들과 연결되고, 지금 동두천의 옛 성병관리소 철거 저지를 위해 싸우는 이들, 더 나아가 전쟁과 국가폭력에 희생된 모든 이들과 연결됨으로써 이 유령이 지금 우리의 주변 또한 배회하고 있음을 느끼게 한다. 이로써 우리는 특정한 역사를 과거만이 아닌 현재의 순간으로, 이곳만이 아닌 저곳의 장면으로 확장하여 감각하고 연대할 수 있다.
유령을 어떻게 기록하고 재현하는가?
삭제의 잔해를 더듬어 기워낸 혼종적 글쓰기 실험
저자는 이 책에서 유령을 탐구하는 것만큼이나 독특한 또 한 가지 과제를 수행하는데, 그것은 바로 유령을 기록하는 글쓰기이다. 트라우마 경험은 한 줄의 정돈된 서사로 설명되기 어렵고, 폭력의 피해자에게 일관된 서사를 요구하는 것 자체가 인식론적 폭력임을 책 전반에 걸쳐 보여주면서, 저자는 선형적인 서사의 형식이 아닌 회귀적이고 다층적인 형식의 글쓰기를 시도한다. 이 책의 본문 곳곳에는 (검은색 바탕의) 픽션이 섞인 짧은 삽화(揷話)가 들어 있는데, 이는 한국전쟁 생존자, 미군과 결혼한 한인 여성의 구술사, 군인을 대상으로 성을 판매하는 한국인과 생존 위안부와의 인터뷰, 양공주가 주요한 등장인물인 대중 매체의 언설들, 디아스포라 한인들이 양공주를 다룬 문학과 영상과 공연/전시, 저자 자신의 꿈과 자문화기술지 등을 바탕으로 한 텍스트이다. 이 삽화에서 저자는 서로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를 중첩시키고, 목소리들 간의 경계를 의식적으로 흐리고, 실제와 허구를 얼기설기 엮는다. 이러한 글쓰기는 “다른 서사들을 엮어낼 수 있는 파편들을 모으고, 선택적 인용과 이 연구에 관련이 있는 사안들의 증폭을 통해 증언의 외관을 훼손하고 뒤틂으로써 그 대상 혹은 근원과 연결시키는 강력한 기억의 형태”이다. 저자가 이러한 시도를 감행하는 이유는 이것이 공식 기록에 남아 있지 않은 역사를 기록하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평론가 신형철의 말처럼 ‘알고자 하는 대상의 진실을 가장 정확하게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 글 쓰는 이의 사랑’이라면, 이 대담하고 시적인 글쓰기 실험은 저자 자신의 어머니를 향한, 트라우마로 얼룩진 자신들의 역사를 용기 있게 이야기한 여성들을 향한, 삭제되고 추방되고 조각난 모든 이들을 향한 치열한 사랑의 결실일 것이다.
목차
한국어판 서문 9
감사의 말 15
프롤로그 삭제의 짜임 21
1장 유령에 살 붙이기 61
2장 트라우마의 계보 99
3장 사라진 양공주를 찾아서 161
4장 명예 백인이라는 판타지 225
5장 디아스포라의 비전: 트라우마를 보는 방법들 279
에필로그 추모하며 339
해제 유령이 배회하는 역사_김은주 347
주 357
찾아보기 391
책속에서
불확실성 속에는 모든 버전의 과거가 현재 속에 살아 있게 하는, 그리하여 다른 종류의 진실에 가까운 역사—침묵당한 자들이 목소리를 찾고 지워진 자들이 가시성을 획득하게 되는 역사—로 이어지는 급진적인 개방성이 있다. 우리가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사회 세계social world는 유령에 의해 세대를 가로질러 대물림되는 말해지지 않은 강력한 기억을 통해 움직임을 얻는다. (...) 우리의 몸은 부모와 조부모들이 말할 수 없었던 것을 물려받는다. 과거는 물질적인 방식으로 우리를 빚어낸다.
너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 내 가족 안에서 일어난 어떤 특정한 일이 아니라, 침묵이 어떻게 내 일상의 짜임을 규정하게 됐는지에 대해서 말이야. (...) 어머니가 말없이 저녁을 먹는 가족들 속에서 왜 존재하지 않는 사람처럼 느껴졌는지 완전히 살을 붙여 이해하는 데는 시간이 걸렸어. 시간이 갈수록 나는 어디나 이런 식은 아니라는 걸 알게 되고, 나의 호기심은 쌓이고 쌓이다 그 자체로 역동성을 가지고 굴러가게 돼. 우리 가족의 비정상성은 거의 감지되지도 않던 침묵에 있었어. 때때로 우리 집 구석구석을 휘젓고 다니다가 종내는 배경으로 자리를 잡은 그 침묵.
결혼을 통한 미국 이주는 군인 대상 성노동에 연루된 한인 여성들에게는 자신의 성노동을 합리화함으로써 과거의 낙인을 지울 기회를 상징한다. 그렇게 되면 성노동임을 더 이상 알아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미국 땅에 발을 들인 이 여성은 이제 자신의 한국 가족들에게 아메리칸 드림에 참여할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신성한 지위를 획득한다. 전쟁 신부는 한인의 미국 이주를 개척한 다음 지정학적 폭력을 가정의 영역 속으로 사라지게 만드는 인물로 작용한다. 무엇보다 물 샐 틈 없이 보초를 서는 가정이라는 공간보다 사회적 트라우마를 파묻기에 더 좋은 곳이 있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