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이미지

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에세이 > 한국에세이
· ISBN : 9788991733633
· 쪽수 : 210쪽
· 출판일 : 2019-08-02
책 소개
목차
책머리에 - 오늘을 사는 이유
1부 나를 감상하다
2부 바람 무지개
3부 남동생의 시간들
4부 아줌마
5부 달그림자를 아시나요
작품해설 - 생활인의 일상성에서 캐어낸 값진 진실(문학박사 강돈묵)
저자소개
책속에서
유난히 추운 겨울이었다. 보일러가 돌아가는 방에서 솜이불을 덮고 있는데도 손에 냉기가 돌고 가슴이 떨렸다. 영하 10도의 날씨보다 춥고 살얼음 낀 골목보다도 추웠다.
입시 때문이다. 올해는 입시생 손녀가 둘이나 있어 그 혹독한 한파 때문에 내 체감온도는 영하 20도의 날씨가 되었다. 벌써 몇 년째다. 아이들이 고등학교에 들어가기만 하면 그날부터 집집마다 초비상이다. 이웃에 아들과 딸이 살아도 마음대로 놀러 한번 못 가고 산다.
“엄마, 오지 마세요. 요즘 중간고사예요.” (중략)
다행히 둘이 모두 대학에 갔다. 각자 원하는 대학이 아니라고 시큰둥하게 여기는데 나만 호들갑을 떨며 좋아했다. 남의 자식 일인데 왜들 그렇게 안부를 묻는지 물을 때마다 나는 <서울대학>이라고 시원하게 대답해 준다.
누구에게서 들은 대로 ‘서울 소재 대학은 서울대학, 약간 멀면 서울약대, 상당히 멀면 서울상대, 제법 멀면 서울법대’라는 일화를 전달하며 한바탕 웃는 것으로 답을 대신한다.
다행히 아이들마다 명랑하고 건강하게 자라는 것이 큰 재산이다. 내 아이 때부터 시작하여 손자들에 이어 한 번도 빠뜨리지 않고 상을 타 온다. 개근상이다. 그게 최고의 상이라며 남이나 나나 합창하는 말이다. 예전에 나도 빠지지 않고 받는 상이 개근상이었다. 좋은 유전인자가 흐르고 있음이 고맙고 감사한 일이다.(‘나의 체감온도’ 중에서)
“제발 좀 묶지 말아요. 불쌍해서 못 보겠네.”
아무리 성화를 하고 화를 내도 남편의 손은 고집불통이다. 헬렐레 늘어진 꼴이 더 불쌍하고 꼴불견이라면서 복도에서 벌을 서는 학생들을 바라보듯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본다.
이상한 일이다. 꽁꽁 묶인 부자유 속에서도 화초들은 잎을 틔우고 꽃을 피우며 하루도 거르는 날 없이 자기네의 소임을 다하고 있다. 주인을 잘못 만나 저렇게 고달프게 살아가는구나,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면서 군데군데 묶은 철사를 슬쩍 빼어버리기도 하지만 다음 날이면 용케도 그곳에서 다시 권력을 과시하고 있다.
얼마나 고충이 심할까. 어깨를 펴고 팔을 흔들고 싶은 자유가 얼마나 그리워질까. 말 못 하는 식물이라고 아무런 생각도 없을까. 농작물도 매일 쓰다듬고 이야기를 해주면 훨씬 빨리 자라고 생기를 뿜는다는데 화려한 속성을 지닌 화초는 더욱 감성이 풍부하지 않겠는가.
그 자리에 내가 서 있는 것만 같다. 자유로운 몸이지만 보이지 않는 감시 속에서 제한 거리를 지켜야 하고, 행동반경을 벗어나지 못하는 절제된 일상을 살고 있는 나의 삶도 저렇지 아니한가.(‘나를 감상하다’ 중에서)
자기의 삶 속에 말벗이 있다는 것은 정말 행운이다. 밥을 같이 먹는 사람, 쇼핑을 같이 하는 사람, 같이 여행을 하는 사람, 그리고 평생 동무가 되어 함께 서정을 나누는 사람들. 누구나 소홀히 여길 수 없는 소중하고 귀한 인연들이다.
몸에 다양한 영양소가 필요하듯 내가 처한 환경과 장소에 따라 적합하고 적절한 대상들이 모두 다르다. 다르지만 다 있어야 하는 사람들이다. 어디 사람뿐이겠는가. 작은 소지품 하나도 나를 찾아온 물건은 모두 소중하다. 하찮게 여긴 것도 언젠가는 필요하여 찾는 날이 있고 버린 물건도 다시 그리워지는 경우가 있다.
오늘 내 옆에서 나를 동행해 준 것은 나무 막대기 하나이다. 결이 거칠어선지 살아온 과거가 험난해 보이고 모양새가 처량하게 보인다.
그 막대기를 손에 들자 마음이 부유해졌다. 어느 누구보다도 고맙고 필요한 벗처럼 생각되어 손에서 놓지 않았다. 온몸으로 온기가 돌았다.
생기라곤 찾아볼 수 없는 헐벗고 초라한 막대기.
제 몸에 한 번이라도 잎을 피운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물 한 방울도 배어 있지 않은 쓸쓸하게 팽개쳐진 나무 졸가리일 뿐이다. 그런데 나를 만나는 순간 그 막대기는 당당하고 의젓하게 한 사람의 몸체를 끌고 가는 지팡이의 존재가 되었다.
그 지팡이처럼 나는 누구에게 따뜻한 존재가 되어 본 적이 있는가. 누구에게 따뜻한 존재가 되어 어렵고 힘든 고비를 함께 걸어 본 적이 있는가.(‘고요한 동행’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