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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예술/대중문화 > 디자인/공예 > 디자인이야기/디자이너/디자인 실기
· ISBN : 9788994207919
· 쪽수 : 272쪽
책 소개
목차
들어가며 서문: 패션을 바라보는 눈
1부: 패션은 어떻게 무의미해지는가 질 샌더 대(對) 질 샌더 알렉산더 맥퀸의 죽음 톰 포드, 사라지는 패션 잉여의 종말
2부: 옷은 어떻게 유의미해지는가 스타일과 코스프레 VAN, 복제 착탈식 패션의 프로토타입 패스트 패션의 도래
3부: 패션과 옷의 또 다른 길 페티시와 롤리타, 망가진 마음의 힘 패딩 전성시대 케이(K), 패션의 미래가 될 가능성 비싼, 페미니즘
맺으며: 어제의 옷, 내일의 패션 찾아보기
저자소개
책속에서
2009년을 기준으로 보자면 그해 가을겨울인 FW부터 2011년까지 매우 이상한 다섯 번의 시즌이 찾아왔다. 온워드 홀딩스의 질 샌더 그룹은 공식적이고 법률적으로 '질 샌더(JIL SANDER)'라는 이름을 사용하며 라프 시몬스가 디자인한 질 샌더를 계속 선보였다. 라프 시몬스는 아마도 질 샌더라는 브랜드가 만들어낼 법한 이미지를 가지고 질 샌더라는 브랜드 로고를 달고 컬렉션을 만들면서 그 이름을 더욱 공고히 한다. 하지만 정작 프라다에서 쫓겨난 진짜 질샌더는 유니클로의 모회사인 패스트 리테일링 소속으로 자신의 작품을 선보인다. (…) 긴 시간이 흐른 후 만약 이 옷들이 발굴된다면 패션사를 연구하는 학자는 과연 어느 쪽을 질 샌더의 옷으로 평가하고 어느 쪽에 '유사 질 샌더'의 딱지를 붙일까.
톰 포드는 패션에 흐릿하게 남아 있던 영속성의 불길을 완전히 잠재웠고 패션이 혹시 예술 비슷한 건 아닐까 의심하던 식자들에게 "아니야"라는 10조 원쯤 되는 크기의 목소리로 답을 내놨다. 이건 물론 톰 포드 혼자 만들어낸 시장의 모습은 아니다. 큰 회사에서 괜찮은 연봉을 받으며 안정된 생활을 하던 사람들, 음악 등 대중 예술로 갑자기 거부가 된 스타 등등이 최상류층 흉내내기에 어느 정도 질려가고 있었고 새로운 롤 모델, 스타일 모델을 찾고 있었다. (…) 1900년대 초중반 기나긴 전쟁이 끝나면서 랑방이나 샤넬, 디오르 같은 디자이너들이 최상층을 차지했고, 이제 유한계급의 시대가 저물어가고 후기 자본주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톰 포드 같은 디자이너들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동일한 가처분소득을 가지고 있다면 우선 써야 하는 곳은 당연히 필수품들이다. 스타일에 대해 생각할 여유가 사라지고 실패했을 경우 회복해야 할 기회비용이 더욱 커지면서 사람들은 모험을 두려워하게 된다. 간단히 말해 자기 맘에 드는 A와 회사 다닐 때 입을 B가 있는데 A, B 둘 중 하나밖에 못 산다면 선택은 B다. 그게 싫다고 회사를 떠나면, 특히 21세기 한국 사회라면 다시 정상 루트로 복귀할 길이 묘연하다. 회사도 잡고 A도 가지고 싶다면 극복해야 할 정신적 에너지가 과도해진다. 그러므로 어느새 아예 마음속으로 처음부터 선택지는 B로 세팅된다. 실험적인 디자이너들이 사라진 자리에 남는 것은 기존 레시피를 두고 벌어지는 치열한 경쟁뿐이다.
현재를 과도기 상황으로 인식하고 유니클로 시그널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는 건 유력한 방법이 될 수 있다. 즉 유니클로를 입고 있으면 '아, 저는 옷을 입어야 한다니까 입고 있습니다만, 유니클로를 입고 있으니 저 따위로 옷을 입고 있다니 하는 생각은 말아주세요'라는 신호를 보내는 거고 받아들이는 사람도 '아, 쟤는 유니클로를 입고 있으니 코디나 옷 쇼핑에는 별 관심이 없고 다른 재미있는 걸 하고 있겠구나'라고 생각하는 사회적 동의가 성립된다면 모두가 득을 보는 이상적인 균형 상태가 만들어진다. (…) 마지막으로 왜 하필 일제냐 같은 반론이 어딘가에서 있을 수 있는데 이것은 글로벌 규모의 작업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비행기를 타고 어느 나라에 떨어져도 '아, 쟤는 유니클로를 입은 애구나'라는 마찬가지 평을 들을 수 있다면 심지어 세계의 안정에도 작게나마 이바지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유니클로 정도가 이런 일이 가능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