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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어린이 > 동화/명작/고전 > 국내창작동화
· ISBN : 9788996882244
· 쪽수 : 450쪽
책 소개
목차
1. 고양이 장례식
2. 고양이달을 찾아서
3. 아리별과 아리나무
4. 엄지의 축제
5. 빛으로 나온 어둠
6. 밤의 바깥
7. 동전의 앞면이 뒤집히는 순간
8. 거인과 고깔모자
9. 초록여왕과 함께 사라진 것
10. 구름 위로 날다
11. 한 여름의 음악회
리뷰
책속에서
나는 노아의 눈을 한참 동안 들여다보았다. 맑고 투명한 소년의 눈동자. 한참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자 노아가 진지하게 말했다.
“살면서 누군가의 인생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은 적 있어? 혹은 누군가로 인해 네 삶이 완전히 뒤바뀌어 버린 그런 적은? ‘그 누군가를 만나지 않았다면’ 하고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하고 절대적인 인연이 네게 있었는지를 묻는 거야, 지금.”
나는 말문이 막혔다.
“내가 너에게 그럴지 몰라. 너는 나와 친구가 되기 위해 네가 평생을 옳다고 믿어 온 것들을 통째로 버려야 할 수도 있어. 내가 믿는 가치들이 너를 끊임없이 시험에 들게 할 테니까. 의심이 언제라도 너에게 손을 내밀 테니 믿는 법을 배우는 게 좋아. 의심하는 순간 나는 네가 기대한 것과 완전히 다르게 네 인생을 틀어 놓고 말테니까.”
“그렇지 않아. 대부분 그냥 스쳐 갔으니까.”
노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도 있지. 어떻게 될진 아무도 몰라. 그런데 알게 됐을 즈음엔 이미 되돌릴 수 없을 거야. 그러니까 지금 선택해야 돼. 날 믿을지, 믿지 않을지.”
노아는 간절히 내 대답을 기다렸다.
“나는… 난….”
나는 고개를 숙이며 조그맣게 말했다.
“너의 얘길 들려 줘.”
노아가 가만히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 고양이달 2 챕터. ‘고양이달을 찾아서’ 중에서
노아는 초록사람이 왜 그토록 초록여왕의 선택을 두려워했는지 알 것 같았다. 선택을 받는다는 것은 자신의 뜻대로 삶을 살 기회도, 원하는 꿈을 꿀 기회도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선택받은 대로 주어진 일을 하고, 주어진 목표를 달성하면 그걸로 끝이었다. 노아는 마침내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고양이달. 노아에게 가족이었고, 친구였고, 소녀였던 고양이달을 찾는 것. 노아의 꿈은 언제나 고양이달에게 향해 있었다. 언젠가 꿈을 이루리라는 희망의 이면에는 불확실성이 자리했다. 노아는 ‘꿈을 이루지 못하면 어떡하나’하고 불안에 떨 때마다 그것을 고통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애초에 꿈꿀 기회조차 없는 매미들에 비하면 그 얼마나 배부른 사치였단 말인가. 아무리 간절히 원해도 일말의 가능성도 없는 나무새나 산, 기형동물에 비하면 노아의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원하는 대로 마음껏 꿈꿀 수 있고, 희망을 잃지 않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꿈을 지닌 노아의 삶이야말로 매일이 축제였다. 그걸 깨닫고 나니, 노아는 쏟아지는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축제가 막바지에 접어들고 있었다.
- 고양이달 9 챕터. ‘초록여왕과 함께 사라진 것’ 중에서
“어른이 된다는 건 어떤 건가요?”
링고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입을 뗐다.
“아무리 많이 사랑해도 덜 좋아하는 것처럼 대할 수 있게 됐지?”
“그게 어른이 된 거라고요?”
노아가 의아하여 물었다. 링고가 말을 이었다.
“내 감정만 중요할 순 없는 거니까. 상대의 감정을 먼저 살피고 자신의 감정을 숨길 줄도, 포장할 줄도 알게 되지. 무엇보다 중요한 건 떼쓰지 않는 거야. 내가 좋아하는 만큼 상대도 날 좋아해 달라고 말이지. 상대의 마음이 나와 똑같을 수 없음을 인정하고 부담이나 상처를 주지 않도록 조심하는 마음을 가지게 될 때, 비로소 어른이 됐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구름아이는 사랑한다고 말해 달라고 했어요. 그럼 구름아이는 어른스럽지 못한 건가요?”
“그때 네 감정이 어땠는데? 진심으로 구름아이를 사랑했니?”
노아는 고개를 저었다.
“저에겐… 시간이 필요했어요. 그렇지만 구름아이에겐 기다릴 시간이 없었으니, 보채는 것도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에요.”
“사정이 그렇다고 해서 상대에게 사랑을 강요할 순 없는 거야. 그렇지 않으면 분명 부담을 느끼거나 미안한 마음을 갖게 될 테니까, 그렇지?”
“그건….”
노아가 말끝을 흐렸다. 링고가 말을 이었다.
“구름아이가 진짜 어른이었다면 너에게 먼저 마음을 쓰고 배려해 줬겠지. 아무리 어른스러운 척 굴어도, 사랑한다고 당당히 말하는 얼굴 뒤로 더 깊은 교감과 보살핌을 갈구하는 아이의 얼굴이 보일 거야. 겪지 않고도 다 아는 것처럼 말해도, 겪어야만 아는 것들을 아쉬워하는 얼굴. 사라짐을 초연하게 받아들이는 얼굴 뒤로 두려움에 떨고 있는 아이의 얼굴. 그들이 성장할 수 있는 시간이 허락되지 않은 것이 안타깝구나.”
노아는 낮에 만났던 구름아이의 얼굴을 머릿속에 천천히 떠올렸다. 노아가 본 것과 링고가 말하는 것들이 너무 달라 혼란스러웠다. 노아는 생각했다. 왜 나는 보이는 얼굴 뒤에 가려진 그들의 진심을 하나도 보지 못했던 걸까. 링고가 말했다.
“어른이 되면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을 통해 상대를 더 잘 헤아릴 수 있단다. 그러니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다면 이미 어른인 거지. 이다음에 어른이 되더라도 모든 걸 꼭 다 볼 필요는 없단다. 그게 꼭 좋은 것만은 아니니까. 천천히 어른이 되렴. 아주 천천히.”
- 고양이달 10 챕터. ‘구름 위로 날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