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3시, 바람이 분다

_ 책을 내면서 4

1부 자줏빛 사랑
노을빛에 빠져버린 추억 16
마음속에 박힌 가시 22
제비꽃 반지 28
사랑 빚 32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 37
사람, 시간에 안긴 행복 43
100709 lovehs 47

2부 초록 그리움
기억의 집 53
존재의 형태 57
숙맥 교집합 62
빛바랜 우정 68
빈자리에 슬픔이 앉아 74
행복예감 78
시간 속에서 전설이 발효되다 81

3부 회색 삶
어둠을 빠져나온 찬란 90
공간 속 행복 95
갇혀버린 우울 99
행복이라는 보석이 있는 일상 104
인생은 확률게임 108
아, 아프다 112
지금, 충전 중 116

4부 노랑 추억
일탈 124
작은 우주 속에 담긴 비밀 130
가을을 닮은 친구 136
이별 연습 140
화사한 비늘 145
시선이 닿는 곳 150
휴게소에서 155
인생의 교차로에서 161

5부 분홍 꿈
허물 벗는 시간의 경계 168
인생의 핸들 174
바베트의 만찬에 초대되다 178
진통이 오는 시간 183
고치 속의 꿈틀거림 187
가지 않은 길 192
사랑 산책자 197

6부 세상 터치
거울 속의 나 205
스탠딩 라이프 210
보물은 어디에 214
길을 잃고 있음에도 218
그게 어디로 갔을까 223
셀프 장례 계획서 227
틈을 메우며 232
시간의 유혹 236

# 짧은 글 244

인생의 핸들

일하러 간다는 부담감이 없어서일까. 휴일이면 평소보다 훨씬 일찍 눈이 떠진다. 따뜻한 물 한 잔이 잠에 취한 몸속 장기들을 샅샅이 찾아다니며 부드럽게 깨운다. 밤사이 배부르게 충전된 노트북이 나의 손맛을 기다린다. 휴일 아침이면 컴퓨터 자판기 위에서 나의 하루가 열린다.

워밍업.
스포츠를 하기 전에 하는 준비운동이다. 가벼운 러닝이나 유연체조는 몸을 따뜻하게 하고 체온을 높여주어 운동에 효과적이다. 워밍업으로 관절이 부드러워지고 근육이 이완되어 몸의 유연도가 증가된다. 대뇌 흥분지수도 높아져 갑작스런 움직임이나 정신적 압박에도 대비하게 된다. 호흡 순환 기능이 개선되어 격렬한 스포츠 직후 나타나는 근육통도 완화해 준다.
워밍업은 사람뿐 아니라 생물이나 사물에도 적용된다. 겨울이면 기온 차가 심하지 않은 지하 2층에 주차한다. 바쁜 아침 시간에도 차의 시동을 걸고 한참 동안 워밍업을 한 후 운전하던 남편의 습관이 내 몸에도 뱄다. 자동차와 나는 서로를 보듬으며 나이 들어가고 있다.
최근 지인의 비싼 차를 탔다. 의자는 물론 유리창 손잡이와 좌측 케이스 위까지 자동차 전체가 따뜻하게 데워지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아, 이게 워밍업이구나. 비싼 차는 이런 것이 다르구나.’ 워밍업이 이렇게까지 중요한 줄 몰랐다. 몸이나 기능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부자가 된 사람은 습관부터 다르다. 오랜 세월 동안 관련 분야에 대한 관심과 애착은 물론, 자료검색이나 수집에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그래서 전문분야에 대한 장·단점을 파악하고 문제 개선에 적극적이다. 애인끼리의 사랑 전선 형성에도 준비운동은 해당된다. 상대방 기호나 특성을 관찰하며 호감을 얻기 위한 관심과 노력이 필요하다.

현재의 내가 있기까지 나는 워밍업을 잘하며 사는 것일까. 자아가 형성되는 이십 대까지 부단한 노력과 옹고집, 꿈을 향한 열정, 도전정신으로 나 자신을 채찍질하며 살아왔다. 충분한 준비운동이 있었기에 3·40대 젊은 시기를 앞만 보며 달릴 수 있었다. 비록 목표지점은 변경되었지만, 스쳐 지나온 인생길에서 부딪힌 풍경과 사람은 따스했다.
이제는 질주하던 고속도로를 빠져나와 한적한 국도로 진입해야 하는 것 아닌가 고민해 본다. 오십 대라는 생체나이를 세어보며 짧은 시간 목도 축이고 스트레칭도 했으니, 다시 운전석에 앉는다. 가속도에 의해 따뜻이 데워진 인생길. 앞에 펼쳐진 몇 갈래 길목에서, 핸들을 어느 방향으로 향해야 하나 잠시 생각에 젖는다.
휑한 오후의 겨울 들판이 게걸스럽게 햇빛을 빨아들인다. 좁은 길이 잔주름처럼 산허리에 꾸부정하게 걸쳐 있다. 구름 걸린 앙상한 나뭇가지마다 봄을 준비하는 희망으로 분주하다.
내 인생의 핸들은 아직도 낯선 길을 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