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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의 이해

의미의 이해

(찰스 퍼스와 구조주의 그리고 문학)

존 K. 세리프 (지은이), 이윤희 (옮긴이)
  |  
한국외국어대학교출판부 지식출판원(HUINE)
2016-09-13
  |  
1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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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의 이해

책 정보

· 제목 : 의미의 이해 (찰스 퍼스와 구조주의 그리고 문학)
· 분류 : 국내도서 > 대학교재/전문서적 > 인문계열 > 철학
· ISBN : 9791159011184
· 쪽수 : 216쪽

책 소개

세미오시스 번역총서 5권. 저자 셰리프는 문학텍스트의 의미가 이원적 기호학과 삼원적 기호학에서 각각 어떻게 다루어지는지 분석한다. 이를 위해 그가 선택한 것은 데리디의 '차연' 개념과 퍼스의 '중재' 개념이다.

목차

일러두기 · 5

폴 코블리(Paul Cobley)의 한국어판 머리말 · 7

옮긴이의 말 · 15

서론 · 29

제 1 부 구조주의 문학 이론에서 의미의 운명 · 39
1. 소쉬르로 시작하기: 문장과 텍스트의 유비 · 41
2. 비결정적 관계로서의 독자와 텍스트 · 61
3. 끝없이 지연되는 의미 · 77

제 2 부 의미는 삼원적 관계이다. · 99
4. 다시 시작하기: 퍼스의 기호 이론 · 101
5. 예술: 가능성의 기호로서 의미 · 125
6. 비평: 사실의 기호로서 의미 · 145
7. 이론: 이성의 기호로서 의미 · 181

찾아보기 · 207

저자소개

존 K. 세리프 (지은이)    정보 더보기
미국 베델 대학교(Bethel College) 영문학과, 어니스트 E. 리지(Ernest E. Leisy) 교수(명예교수)이다. 영문과 교수로 재직하는 동안 두 차례 베델 대학교의 임시 총장직을 포함, 교무처장직을 수행하면서 오랜 기간에 걸쳐 대학의 행정에 관여하였다. 저서로는「Charles Sanders Peirce’s Guess at the Riddle: Grounds for Human Significance」와「The Good-Natured Man: The Evolution of a Moral Ideal, 1660?1800」가 있다. 그 외「A prospectus for a pragmatic reading of Hawthorne’s The Scarlet Letter」을 포함, 기호학과 문학이론에 관한 논문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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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희 (옮긴이)    정보 더보기
고려대학교에서 활동기호학(Activity Semiotics)에 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세미오티카⟫가 선정한 2008년 최우수 논문상(Mouton d’Or Award)을 수상했다. 주요 논문으로는 《A dialogical semiosis of traveling narratives for self-interpretation: Towards activity semiotics》 《기억, 상상, 장소 경험을 통한 기호적 사고: 문화적 리터러시를 위한 자전적 글쓰기 <배움의 발견>을 중심으로》 등이 있으며, 옮긴 책으로 ⟪퍼스 기호학의 이해⟫ ⟪퍼스 철학의 이해⟫ ⟪의미의 이해⟫가 있다. 현재 한국외국어대학교 인문한국(HK) 세미오시스 연구센터의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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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폴 코블리(Paul Cobley)의 한국어판 머리말

퍼스 기호학과 관련해서 1989년은 경이로운 해였다. 그렇다, 나에게는 확실히 그렇게 보였다. 나는 몇 가지 유사성을 지닌 두 권의 책이 그 해에 한꺼번에 출판되었다는 것이 매우 중요하게 느껴졌다. 두 권중 하나는 빈센트 콜라피에트로(Vincent M. Colapietro)의 저서인 Peirce’s Approach to the Self (1989)였다. 영예롭게도 나는 이미 그 책에 대한 장점들을 언급한 적이 있었다(코블리 2014). 다른 한권은 지금 내가 소개하려는 책으로, 셰리프(Sheriff)의 저서인 The Fate of Meaning: Charles Peirce, Structuralism, and Literature (1989)이다.
나는 두 책 모두 출간된 지 몇 년이 지난 후에야 처음 접할 수 있었는데, 그 때 나는 처음으로 정교수가 되었었다. 그 당시는 후기구조주의가 막바지에 다다랐다. 이것을 내가 바로 그 당시에 인지했었던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나는 영국의 폴리테크닉 대학교(UKpolytechnic)에서 수년 동안 ‘기호학’으로 통하는 과목을 가르치고 있었는데, 이 과목은 ‘교양과정’의 일환이었으나 후에는 ‘커뮤니케이션’ 학위과정이 되었다. 강의요목은 후기구조주의―나와 나이가 지극한 한 학자가 여기에 속했다―와 ‘이론’ 리퓨즈닉스(refuseniks, 소련당국에 의해 탈출이 금지된 시민, 여기서는 이론 거부자의 의미-옮긴이)(이 분들은 나이가 훨씬 더 들었다) 사이에 끼어있는 상태였다. 그 시대의 ‘정체성 정치학(identity politics)’의 대대적인 부상과 ‘포스트 모더니즘’ 출판의 대박으로 나는 후기구조주의가 잘 진행되고 있다고 확신했었다. 나는 후기구조주의 죽음에 대한 소문들에 대해 믿는 것은 고사하고, 그러한 소문조차도 듣지 못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콜라피에트로와 셰리프의 책, 이 두 권의 책은 후기구조주의 관점의 자기만족적인 유명론 이후, 퍼스의 실재론의 새 시대를 예고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했다. 소쉬르와 언어적 전회 이후 두 권의 책은 진지한 학자들에 의해 집필되었으며, 이들은 언어에 관하여 논증의 로코코식 복잡성을 상세하게 잘 알고 있었다. 두 권 모두 후기구조주의 회의론에 대해 신중하게 고찰했다. 하지만 그들은, 목욕물을 버리려다 목욕시키던 아이까지 버리는 수를 하는 것처럼, 후기구조주의에 대해 전적으로 회의적이었던 자들이 기구조주의가 미래에 끼칠 긍정적인 영향을 희생하면서까지 후기구조주의를 버렸다는 점을 설명하고 싶어했다(그들은 회의주의자들이 후기구조주의를 완전히 없애버리려던 것을 반대했다-옮긴이). 특히 셰리프는 데리다의 연구를 비판하였는데, 그 당시에 데리다의 연구는 파리식 이론의 하이 스패로우(High Sparrow)(미국 TV 시리즈 <왕좌의 게임Game of Thrones>(2011)에 나오는 극히 경건한 압제자의 이름-옮긴이)로 간주되었고, 이는 고고한 척하는 많은 시종들에게는 영감이 되었다. 셰리프가 지적하듯이, 데리다는「그라마톨로지』에서 퍼스에 대해 피상적인 관심만을 보인다(p. 187). 셰리프는 적기를, “내가 생각하기를”,

소쉬르와 데리다가 그들의 시스템으로 그렇게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이유는 그
시스템이 근본적인 면에서 미완성이기 때문이다. 즉 그것은 모든 실존적인 것은
배제하고 심지어는 기호 사용자의 역할까지 배제하여 오로지 추상적인 형식만을
유지했다(p. 151).

셰리프가 보여주듯이, 이와는 대조적으로 퍼스에게 기호, 대상, 의미는 우리에게 한꺼번에 오거나 그렇지 않으면 전혀 오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내가 처음부터「의미의 이해』를 참고했던 이유는 퍼스의 모든 의도들에 관해 이해하고 싶어서였다. 특히, 나는 일차성, 이차성, 삼차성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파악하기를 원했다. 나는 이원체에 기반한 미오시스 모델보다 삼원체로 간주되는 기호가 무슨 이유 때문에 더 역동적인지 알아야 했다. 세리프의 책을 읽게 된 것은 좋은 선택이었다. 왜냐하면 이와 같은 문제들은 이 책의 핵심적인 부분에서 이례적으로 분명하게 다루어졌기 때문이다. 한국의 독자들도 곧 알게 될 것이지만, 실제로 퍼스의 10개 시호분류법(Decalogue)에 대한 세리프의 논의는 여타의 사람들의 논의보다 탁월할 것이다(아마도 머렐(2000: 37-54)의 것보다도 더 탁월할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논의는(기호학에 대한 논의 뿐 아니라) 후기구조주의에 대한 비판과 문학이론에 대한 초점까지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특히 인문학자들의 이해를 돕고 퍼스에 관한 설득력 있는 상세한 연구를 전달했다.
「의미의 이해』에서 셰리프의 관찰이 빛나는 곳은 다음과 같다. 즉,

퍼스는 예술가도 아니고 예술 비평가도 아니지만, 예술의 유의미성이 일차성인
그것의 자질이지 삼차성인 그것의 관습이 아니라는 점을 인식했다. 나는 이후에,
현재 많은 문학이론가들로 하여금 문학을 다른 언어 사용과 구별하는 것을 불가
능하게 만드는 것은 그들이 삼차성에, 즉 언어의 상징적, 형식적, 관습적 성격에
초점을 두기 때문이라는 점을 입증하려고 한다(p. 140).

셰리프는 퍼스가 예술을 자의성이나 인공물이 아닌 ‘가능성’으로 지각했다는 것을 보이려고 한다. 후기구조주의의 유아론(solipsism)은, ‘언어’(예를 들면 언어적 소통)와 담화가 인간의 의식을 결정한다는 믿음으로 문학을 많은 자기-지시적인 상징들로 만들었다. 하지만, 셰리프가 지적하듯이,

우리가 언어로부터, 삼차성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으면서
도 퍼스는 우리에게 삼차성(언어적, 상징적 기호)이 상징적으로 일차성을 재현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의 기호 이론에 따르면, 문학예술은 결코 의식에 즉
각적일 수 없는 즉각적 의식의 자질을 보여주고, 그려내고, 상징화하는 데 사용되
는 언어(레마적 상징)이다(p. 144).

궁극적으로 퍼스는 의미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는 세 범주에서 일어나는 방식으로, ‘실재하는 것’과 접촉하는 존재의 가능성에 대해 지속적으로 관심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유아론을 거부했었던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도 퍼스는, 언어적 전회라는 이른바 냉철한 화신에 직면하여, “그의 말이 지나친 낙천주의자처럼 들리도록 하지 않으면서” 유아론을 거부한 것으로 보인다(p. 143).
세리프의 책에서 특별히 독창적인 점은, 퍼스의 10개의 기호분류법과 연관하여, 문학을 자기-지시적인 표준적 방법보다는 세미오시스의 활동으로 간주한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문학은 레마적 상징(8번 기호)이며, 한편 문학비평은 다이센트 상징(9번 기호)으로 상정되며(p.146) 그리고 문학이론 일반은 10번 기호인 논증이다(p. 182). 각 레마적 상징은 단지 문학작품이 읽혀지는 ‘역사적 맥락’이 아닌 이전의 세미오시스의 맥락이라는 ‘기반’을 요구한다(예를 들면 문학 작품에 대한 이전의 경험들). 그러므로 계속되는 혹은 ‘끊임없는’ 세미오시스의 잠재성에서,

만약「니콜라스 니클비 Nicholas Nickleby』(레마)의 해석체가 새 기반을 가진 새
기호가 된다면, 그 새 기호의 해석체는 그 새 기호를 “이해하지”만 이전의 기호를
“해석한다.” 사용되면서 이해된 기호는 뒤따라오는 기호 속에서 해석된 대상이
된다(p. 156).

물론, 대다수의 인간 기호는 어떤 면에서 관습적인 기호들―법칙기호-이다. 왜냐하면 그 기호들은 사회성에 뿌리를 두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셰리프가 입증하듯이, 사고에서는 모든 것이 삼차성이다(p.183). 하지만 문학작품을 논증―문학에 대한 문학―으로 구분하는 데리다와 그 외 사람들의 잘못을 직설적으로 입증하기 위해서 그가 사용하는 10개 기호분류법은 결정적이다. 문학이 10번 ‘기호의 의미화’라고 주장하는 것이 해석행위를 위한 함의점을 가질 수 있다고 세리프의 분석은 지적한다. 간략하게 말하자면, 이는 옳거나 혹은 틀린 해석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수반한다.
물론 퍼스 이후에 실용주의는 결정불가능성보다는 실질적인 결과에 관심을 갖는다. 셰리프는「의미의 이해 The Fate of Meaning 』 이후에 그의 훌륭한 저서인「찰스 샌더스 퍼스의 수수께끼에 대한 추측 Charles Sanders Peirce’s Guess at the Riddle』(1994)를 출간하였고, 나중에 나타니엘 호손의「주홍글씨』에 대한 비판적 독해(acritical reading of Nathaniel Hawthorne’s The Scarlet Letter)를 집필하였는데, 이는 가칭 <퍼스와 호손: 헤스터 프린의 변호 Peirce and Hawthorne: Vindication of Hester Prynne >라는 제목의 단행본으로 출간하려고 처음부터 생각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셰리프는 그 당시에 대학교 출판부들이 개별 작가나 혹은 작품에 대한 비판적 분석을 출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현재 출판사의 많은 출판 관계자들도 여전히 그러하듯이, 그들에게 퍼스식의 비-포스트모더니스트(non-postmodernist)의 접근은 의심할 여지없이 매우걱정스러운 일이었다. 결국 그 저술은 논문의 형태로 출판되었다(셰리프 1999). 셰리프가 최근에 나에게 말했듯이,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는, 자신이 살아야 할 다른 삶들이 있었기 때문에 월든 호수를 떠났다. 그리고 나도 동일한 이유로 퍼스의 학문적 연구에 관한 집필을 중단했다고 생각한다.” 그는 강의 전임의 교수직으로부터 자리를 옮겨 1997년 베델 대학교(Bethel College)의 교무처장이 되었고, 2010년 7월, 은퇴하기 전까지 일 년 임기로 두 차례의 임시 총장직을 수행한 것을 포함하여 대학 행정일에 몸담고 있었다. 그 때 이후로 셰리프는 <현대비평이론> 과목이나 그가 흥미 있다고 생각하는 다른 주제들을 거의 매해마다 가르쳐왔다. 하지만 대학의 행정가로서 그리고 다른 역할을 맡았을 때에도, 셰리프는 “찰스 샌더스 퍼스에 관해 쓰는 것에 몰두하였던 연구만큼 나의 삶, 쓰기, 말하기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던 것은 없었다고 나는 생각한다”라고 했다. 퍼스에 의해 고취되었으며 학문 사이의 교류로서 시도되었던 기호학은, 그 자신이 먼저 배움의 과정이라는 실질적 결과에 관심을 갖는 셰리프의 실용주의(Sheriff’s pragmatism)와 일치되어야 한다. 이것은 문학이 실제적으로 어떤 것에 대한 것이라는 이유로 이루어지는 문학연구와 전적으로 일치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은, 그것의 홍보 진영으로서의 후기구조주의와 함께 문학―그리고 모든 예술적 생산―이 그 자체에 관한 것이라는 점을 효과적으로 강조하였을 것이다. 이는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문학은 세미오시스이기 때문에, 그것은 세미오시스에 의해 앞서며 그리고 동일한 것에 의해 계승된다. 하지만 문학이 문학(적) 세미오시스에 대한 것이라고만 단언하는 것은 제한적이고 무모하다. 더욱이 그것은 어떻게 문학이 포스트모더니즘을 선도했는지, 어떻게 포스트모던 지시성(referentiality)이 포스트모더니즘을 선도했는지, 그리고 어째서 문학이 포스트모더니즘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그렇게 대중적인지에 대해 거의 설명을 하지 못한다. 의미의 운명은 과거의 한 때에 마치 그것이 림보에서의 체류인 것처럼, 혹은 끝나지 않는 순환의 형식주의의 그림자에서 유보되어 있어야 하는 것처럼 보였었다. 그러나 1989년 이후, 의미의 운명은 재발견과 재개를 경험하였다. 재개의 많은 부분은, 파리식 유행의 패션 가능성에 방해받지 않은 채, 끊임없이 전진하던 기호학의 행진 때문에 이루어질 수 있었다. 그러한 행진의 과정 중에 간과되었던 이정표, 어떠한 방법으로 나아가야 하는지 강한 암시를 주며 우리에게 우리가 존재해야 할 곳에 어떻게 도달해야 하는지 알려주었던 이정표는 이 머리말 뒤에 나오는 책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폴 코블리(PAUL COBLEY)
영국 미들섹스 대학교(Middlesex University), 언어와 미디어학과 교수
세계기호학회(The International Association for Semiotic Studies) 회장


옮긴이의 말

왜 의미의 운명인가?


본 번역서의 원제는 The Fate of Meaning: Charles Peirce, Structuralism, and Literature이다. 저자 셰리프(John K. Sheriff)는 이 책에서 문학텍스트의 의미가 이원적 기호학과 삼원적 기호학에서 각각 어떻게 다루어지는지 분석한다. 이를 위해 그가 선택한 것은 데리다의 ‘차연(differa nce)’ 개념과 퍼스의 ‘중재(mediation)’ 개념이다. 의미의 운명이란 곧 의미가 다루어지는 과정과 그 결과를 통틀어 가리키는 말인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의미의 의미에 관한 고찰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셰리프에 의하면 이원적 기호학 안에도 두 개의 서로 다른 관점이 존재한다. 로고스중심주의와 해체주의의 사유를 대변하는 두 개의 관점은 각각 구조와 구조성을 중심 삼아 기호와 의미의 관계를 규정한다. 전자는 형식으로서의 정태적인 구조를 주목하고, 후자는 그러한 구조가 해체되고 다시 구조화되면서 구조가 재생산 되는 과정, 곧 역동적인 구조성을 주목한 것이다.
구조의 역동성을 주목한 해체주의의 시각은 구조주의의 정태성보다는 진일보한 것이다. 그러나 해체주의 역시 기표와 기의의 관계가 자의적이라고 하는 전제를 버리지 않았다. 기표와 기의의 연성이란 동기부여(필연적인 연결성)가 결여된 상태의 연결성, 곧 자의적 관계라는 것이다. 구조에 집중하는가 아니면 구조성에 집중하는가의 차이는 단지 기표와 기의가 하나의 의미로 연결되는가 또는 다수의 의미로 연결되는가의 차이일 뿐, 이원적 기호학의 영역을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로고스중심주의에서 언어에 대한 관심은 사고가 언어에 어떻게 반영되었는지를 확인하는 과정이다. 반면 해체주의 시각에서는 언어자체의 물질성에 집중한다. 그래서 기호의 지시 대상보다는 텍스트 내의 기표와 기의 관계에 관심을 쏟는다. 주체의 사고가 아닌 기호자체에 대한 관심에 집중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언어중심적인 사유는 삼원적 기호개념의 사고중심의 사유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삼원적 기호 개념도 해체주의 시각에서처럼 언어와 사고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 하지만 언어가 인간의 사고를 그대로 재현할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비트겐슈타인의 “나의 언어의 한계는 나의 세계의 한계를 의미한다”라는 말을 서로 다르게 해석할 만큼, 기호와 의미의 관계에 대한 두 기호학의 해석의 시각은 서로 상반된다. 언어 중심적 관점은 ‘인간의 사고가 언어의 감옥에 갇혀 있다’고 믿지만, 반면 사고 중심적 관점은 ‘언어를 수단으로 하여 인간 사고의 합리성이 발전한다’고 해석한다. 퍼스와 데리다의 기호사상은 유사한 점이 많다. 특히 해석활동과 관련하여 그러하다. 데리다가 다루는 언어기호는 소쉬르의 음성언어에 국한되지 않고 쓰기로서의 기호 활동(semiosis)까지 확장된다는 점에서 퍼스의 기호에 대한 정의를 받아들였다. 데리다의 해체주의 기호이론에 의하면, 기호가 재현하는 대상은 ‘알려진 개념’과 ‘알려지지 않은 개념’을 동시에 포함하기 때문에 차이와 지연을 유발한다. 따라서 기호의 해석과정은 차이와 지연 때문에 의미가 확정되지 않게 된다. 데리다의 해체주의는 퍼스의 기호정의를 차용함으로써 언어기호의 구조를 탈구축할 수 있었으며 이를 통해 해체주의는 역동적인 기호개념으로 확장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두 기호이론은 전혀 다른 성질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데리다의 해체주의는 기호의 의미가 여전히 이원적인 기호 개념을 전제로 텍스트내부의 구조에 머문다. 의미의 원천은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기표는 기의가 되고, 기의는 다시 기표가 되며, 이러한 과정을 통해 의미는 끊임없이 지연될 뿐, 최종적으로 확정되지 않는다. 반면 데리다에게 기표는 이미 기의였고, 둘은 하나이며, 따라서 둘 사이의 매개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구조성은 단지 차이에만 그 기반을 두며, 이러한 구조성의 결과로 둘 사이에 ‘틈(gaps)’이 생기게 된다. 틈은, 모호하며 확정되지 않는, 상이한 의미들로 채워진다. 따라서 데리다의 해체주의적 관점에서 볼 때 의미의 운명은 끊임없이 지연되는 차연일 뿐이다. 해체주의 방법이 해석 이론에 기여한 점은 적지 않다. 신학은 이 해석학 이론으로 인해서 성경 텍스트 해석에 있어서 하나의 중심적인 의미를 고집하는 대신,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는 점을 인정하게 되었다. 이 같은 긍정적인 영향력에도 불구하고, 셰리프가 명징하게 지적하듯이, 해체주의는 삼원적 기호학과 달리 해석주체의 매개 역할에 대한 자율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해체주의는 단지 구조성에서 나타나는 ‘틈’이라는 신비한 요소에 집착함으로서 기호의 의미를 단 하나로 규정할 수 없다거나 의미의 이론적 부재를 드러낸다. 불확정적이며 규정되지 않는 심연으로서의 틈이 움직이는 구조를 재현할 수 있다고는 하지만, 이러한 구조는 해석하는 인간의 정신과는 무관한 이원적 관계의 구조성일 뿐이다.
하지만 퍼스가 제시한 삼원적 기호개념은 두 요소를 중재하는 제3요소(a Third)의 존재를 인정한다. 따라서 의미는 기표와 기의의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제3요소의 해석하는 능력, 즉 삼원적 관계에 달려있다. 이것이 이른바 삼원적 성질(triadicity)이다. 이에 따르면 이원적 시스템에서 의미의 부정(indefiniteness)을 주장하게 되는 것은 필연적이다. 기호의 의미를 해석하는 제3요소가 부재하기 때문이다. 이원적 기호학에서는 해석의 주체를 인정하지 않는 탓에 해석의 주체가 있는 자리를 단지 틈, 혹은 심연의 신비로운 요소라고 설명한다. 셰리프가 의미에 관하여 ‘최종적 부정(final no) 후에 오는 긍정(yes)’이라고 표현할 때, 틈과 심연은 삼원적 기호 시스템에서는 기호의 의미를 찾기 위한 배움의 조건이 될 뿐이다.
이 점은 셰리프의 중요한 논지이며, 이를 입증하기 위해 셰리프는 데리다와 퍼스의 사유를 관련지으면서, 연속성의 개념에 기반하여 두 사유를 연결한다. 셰리프의 이 같은 구성은 의미를 이해하는 우리의 시야를 확장시킨다. 즉 의미는 심리학적 주체를 통해 부여되는 대상의 가치라든지 혹은 구조성을 통해 끊임없이 지연되는 의미의 이론적 부재가 아니라, 기호의 대상을 해석하는 활동을 통해 그 효과로 나타나는 의미라는 점이다.
해체주의에서, 선언된 의미에 관한 최종적인 부정(의미가 확정될 수 없다는 점에서 혹은 의미를 만들지 못하는 인간의 무능력에 대한 인정이라는 점에서)은 텍스트 외부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텍스트 구조로 환원되게 만든다. 이 같은 최종적 부정 후에 오는 긍정은 상징을 해석하는 정신인 해석자의 자율적 능력을 인정한다. 이는 해석활동을 통해 만들어지는 의미에 대한 긍정과 다름이 없다.
요약하면, 기호의 구조에서 의미는 구조성의 효과로 나타나는 차연 혹은 흔적이라는 개념으로 이해된다. 의미는 잠시 확정되다가 불확정성으로 사라지는 반복을 거듭하는 유희의 대상이 된다. 한편, 삼원적 기호학에서는 의미는 삼원적 성질(triadicity), 즉 중재(mediation)의 개념을 통해 결정되어가는 역동적인 과정 속에서 이해된다. 이때 해석체는 단순하게 둘을 연결하는 매개(medium)가 아니라 이원적인 두 요소를 이분법적(dichotomous)에서 변증법적(dialectical)으로 변형시키는 제3의 요소(a Third), 즉 수단(means)으로서 실재하며, 이러한 점으로 인해 기호는 자신의 의미를 소통한다. 삼원적 기호학을 옹호하는 리처즈(I. A. Richards)는 퍼스의 해석체 기능에 주목하며, 이를 “해석체의 혁명적 독트린(the revolutionary doctrine ofinterpretant)”이라 불렀다.

틈, 심연, 장벽의 신비

셰리프는 삼원적 기호학에서 상징과 분리불가능한 해석체의 개념을 부각하고, 데리다의 해체주의 기획이 그가 퍼스의 기호에 대한 정의를 차용한 것이라는 점을 관련지으면서 둘을 병치하고 있다. 이런점에서 두 사람의 입장은 기호학적 관점에서 보면, 많은 부분에 있어서 유사점을 공유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미에 관한 한, 그들의 기호이론은 서로 다른 시스템에 기반을 두었기 때문에 각각 ‘최종적 부정’과 ‘긍정’이라는 다른 입장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셰리프는 이 점을 그들이 취했던 기호 개념을 통해 보여주었으며, 그래서
그의 설명은 더욱 설득력을 얻는다.
데리다와 퍼스의 기호학적 관점은 두 사람이 어떻게 인간을 바라보는지에 대한 암시로도 읽힌다. 셰리프는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해체주의는, 의미를 경험하는 주체로서의 인간의 자리가 언어 구조의 구조성으로 대체됨으로써, 의미를 찾는 것이 불가능하게 된 인간의 무능력을 인정하도록 하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심리학적인 확정불가능성으로 인해 의미가 지연되는 이원적 기호개념과는 다르게, 삼원적 기호개념에서는 삼원적 성질(triadicity)의 논리에서 의미가 발견된다. 따라서 셰리프가 궁극적으로 도달하려는 곳은 삼원적 기호학에서 기호의 대상을 해석하는 해석체로서의 해석자의 역할과 기능이다. 이것이 셰리프가 퍼스의 기호학을 소개하는 방식이다. 이러한 방식은 ‘문학 텍스트에서의 의미’를 주제로 데리다와 퍼스가 대화하는 것을 경험하는 효과를 준다.
문학텍스트에서 의미를 다루려는 셰리프의 목적은 미학적 경험을 통해 의미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삼원적 기호학에서 논리적으로 입증해 보이는 것이었다. 이러한 노력은 해석 주체로서의 해석자의 위치를 확인하고, 실천적 기호 해석 대행자로서의 해석자의 지위를 찾는 데 있다. 이는, 셰리프가 비유적으로 말하는 ‘최종적 부정 뒤에 오는 긍정’에 의해 가능하다. 즉 의미는 이원적인 언어 기호에 기반을 둔 심리학적 주체가 만드는 의미의 불확정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인정하고, 이어서 기호-대상-해석체의 삼원적 관계의 논리에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셰리프는, 데리다의 틈의 이론이 의미에 대한 논리적 분석 이후에 의미를 기표와 기의 사이의 틈으로 사라지게 하면서 무(無)의 형이상학으로 되돌아가게 한다고 지적한다. 셰리프의 이러한 지적은, 데리다의 틈의 이론이 의미를 심리학적 관점에서 다루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회귀는 데리다가 의존하는 이원적 기호 개념에서 비롯된다. 현상에 대한 기호학적 분석을 유지하려면, 기표와 기의 사이의 틈의 결여는 중재적인 성질을 갖는 제3요소인 해석체를 통하여 재현되어야 한다. 즉 서로 다른 범주에 속하는 처음이자 마지막인 각각 제1요소(a First)와 제2요소(a Second)를 중재하는 정신을 갖는 제3요소(a Third)로서의 해석체의 개념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문학 텍스트에서 의미를 찾고 구성하는 주체는 기호가 자신의 맥락과 능력에서 자신의 대상을 자신의 해석체에게 드러내는 기호의 과정에 참여하는 실질적인 해석자가 된다. 따라서 틈, 혹은 심연은 심리학적인 요소에 의존하지 않고, 해석체-기호의 기반(ground), 즉 이전의 인지, 맥락적 경험이 수단이 되어 틈을 연결한다. 이러한 기호과정은 해석활동의 타당성과 자율성을 동시에 확보하며, 해석자에게 실질적인 의미의 경험으로 나타난다.
셰리프의 논증에서 핵심이 되는 것은 의미의 문제를 철학적, 언어학적, 혹은 심리학적으로 다룬 것이 아니라 논리적(기호학적)으로 고찰했다는 점이다. 셰리프는 의미에 대해 다룬 데리다의 해체주의를 철저하게 기호학적 관점에서 분석한다. 퍼스와 데리다의 의미에 대한 개념은 역동적인 기호과정(semiosis)에서 설명될 수 있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그러나 셰리프는, 이 두 사람의 입장이 근본적으로 각각 이원적 기호학과 삼원적 기호학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에 이에 따라 의미의 운명이 달라진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퍼스에게 의미는 기호의 의미이며, 이는 세 가지 영역에서 의미가 된다. 즉 퍼스에 따르면 의미는 3가지 영역에 따라 기호(문학텍스트)가 자신과 갖는 관계의 의미이며, 기호(문학텍스트)가 자신의 대상과 갖는 관계의 의미이며, 기호(문학텍스트)가 자신의 해석체와 갖는 관계의 의미이다. 이는 각각 가능성의 기호로서의 의미, 사실로서의 의미, 이성의 기호로서의 의미가 된다. 이 같은 기호의 의미는 해석자의 경험을 통해 실현된다. 즉 가능성의 기호의 의미는 감각적 경험인 느낌으로 나타나고, 사실의 기호로서의 의미는 텍스트가 재현하는 대상에 대한 인지적 경험으로서 정보나 지식으로 나타나고, 이성의 기호로서의 의미는 텍스트가 해석자에게 실질적인 유의미한 효과에 대한 배움의 경험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원적 기호 개념에 바탕을 둔 데리다의 해체주의는 이 같이 앞의 세 단계에서 나왔던 자율적 주체, 즉 문학텍스트를 미학적으로 경험하는 자율적 주체를 배제하고 문학의 이론만을 다룬다.
앞에서 언급되었듯이 데리다의 해체주의는 주체의 미학적 경험이 아닌, 텍스트 내의 관계에 기초한 기호활동을 통해 해석의 지평을 확장한다는 측면에서 역사, 철학, 신학 등 해석학을 중요하게 다루는 영역에서 긍정적으로 수용되었고 또한 실질적인 영향을 미쳤다. 특히, 성경 해석학에서 데리다의 해체주의적 해석방법의 수용은 성경 텍스트에서 하나의 의미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읽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 상이한 의미가 존재할 수 있다는 점을 통해 다양한 해석가능성을 열어 놓았다. 하지만 이러한 경향은, 부분적 지식이 확장되고 발전되는 기호과정을 통한 해석활동이 아니라, 이미 온전한 지식을 텍스트를 통해 확증하는 주관적인 관점을 드러내며, 개별적인 해석의 타당성을 확증할 수 없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고 여겨진다.
기호는 대상을 그것의 닮음의 형식에서 대신하거나, 혹은 대상과 관련하여 그것을 재현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을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한다. 진정한 기호는 해석이 되어야 한다. 상징을 상징화하는 것은 사고의 과정을 경험하는 것이며, 이는 기호의 운동이 우리 안에 있는 것이지, 우리가 기호의 운동 안에 있지 않다는 것을 경험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사고 안에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사고가 우리 안에서 생각한다”(퍼스 CP 5. 289 n1)는 것이다. 따라서 상징을 사용하는 정신은 해석하기를 선택하는 것이지만, 이러한 선택은 실존적이다. 왜냐하면 상징이 우리의 사고에 존재하며, 그 상징이 없으면, 사고의 성장이 없기 때문이다.
퍼스 기호이론에서 텍스트기호의 의미는 독서행위의 세미오시스 과정의 효과로 나타난다. 문학텍스트에 재현된 저자의 정신(스토리)을 가능성의 기호로 인식하며, 저자와 독자의 정신의 유비를 통해 새로운 관계를 구성(내러티브)함으로써 사실의 기호를 인지하고, 이 관계(내러티브)를 설명하는 논증과정(내레이션)을 통하여 이성의 기호를 해석한다. 그러므로 해석자의 세미오시스 과정은 텍스트를 실용적으로 독해하도록 하는 틀로, 해석자는 기호를 중재로 한 사고활동을 통해 의미의 세 모드인 센스(sense), 의미(meaning), 유의미성(significance)을 경험한다.

퍼스 기호학 독해 시리즈

본 번역서「의미의 이해: 찰스 퍼스와 구조주의 그리고 문학』는 “퍼스 기호학 독해 시리즈”로 기획된 마지막 책이다. <퍼스 기호학 독해시리즈>는 퍼스 기호학의 이론, 위상, 적용의 영역에서 퍼스 기호학의 핵심적 내용을 심층적으로 고찰하고, 그의 학문적 위상을 조망하며 그것이 실생활에서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가를 확인함으로써 퍼스 기호학을 더 깊이 있게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한 의도로 기획된 것<퍼스 기호학 독해 시리즈>는 모두 세 권으로 이루어졌다.「퍼스 기호학의 이해』와「퍼스 철학의 이해』,「의미의 이해: 찰스 퍼스와 구조주의 그리고 문학』가 그것이다. 2013년에 출간된「퍼스 기호학의 이해 A general introduction to the semeiotic of Charles SandersPeirce』(제임스 리슈카 지음, 1996)는 퍼스 기호학을 기호 문법, 비판 논리학, 사변 수사학의 세 영역으로 구분하여 체계적 그리고 심층적으로 설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퍼스의 기호학에 관한 핵심적이고 기초적인 개념을 제공한다.
2016년 5월에 출간된「퍼스 철학의 이해 Peirce: a guide for theperplexed』(코르넬리스 드발 지음, 2013)는 퍼스의 과학 분류에서 기호학이 차지하는 위치와 그것이 각 학문과 갖는 유기적인 관계를 통해서 퍼스의 기호학을 포괄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시야를 제시한다. 특히 퍼스의 현상학과 범주론, 진리와 실재의 개념을 거쳐 우주론까지 이어지는 그의 기호 사상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며, 이러한 기호학의 바탕 위에서 그의 실용주의 철학을 이해하는 토대가 마련될 것이다.
이번에 번역된「의미의 이해: 찰스 퍼스와 구조주의 그리고 문학The fate of meaning: Charles Peirce, structuralism, and literature』는 퍼스의 삼원적 기호 이론을 후기구조주의 비판을 통해 비교, 설명하고, 이를 바탕으로 미적 경험, 문학비평, 그리고 문학이론의 세 영역에서 다루어지는 문학텍스트의 의미를 고찰한다. 이런 점에서 본 번역서는 의미 이론이라고 불리는 퍼스의 실용주의(pragmaticism)와 관련하여, 퍼스의 기호학을 한층 깊게 연구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게 될 것이다.
본 번역서를 통해서 본 역자는 지난 4년간 번역에 몰두하면서 느꼈던 부담감에서 이제 벗어나게 되었다. 한편으로는 기쁘면서 동시에 아쉬움도 남는다. 가장 큰 아쉬움은 세 권의 책에서 퍼스가 사용한 기호학적 개념을 일관되고 동일한 용어로 표기하지 못한 것이다. 몇몇 부분에서는 오자나 탈자도 눈에 들어온다. 퍼스 자신이 새로운 단어로 만들어 쓴 탓도 있지만 본인의 미숙함으로 인해 매끄럽지 못한 번역과 잘못된 번역을 바로잡지 못한 것도 아쉬움으로 남는다. 개정판의 기회가 주어지면 이런 부분들을 수정하고 보완할 것을 약속드리며 사과의 말씀을 대신하고 싶다.


감사의 말

본 번역서가 출간되는 데 도움을 주신 분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먼저 번역을 허락해 준 저자 셰리프(J. K. Sheriff) 교수님께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아울러 한국어판 머리말 집필에 흔쾌히 응해 준, 세계기호학회(IASS) 회장 폴 코블리(Paul Cobley) 교수님에게 감사의 뜻을 표한다. 그리고 본 번역서 출판을 지원해 주신 한국외국어대학교 인문한국(HK) 세미오시스 연구센터 전기순 소장님과 김백기 소장님을 비롯하여 연구센터 선생님들께도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특히 원고를 세심하게 읽으시고 도움이 되는 제안과 코멘트를 해 주신 세미오시스 연구센터 강병창 선생님, 동양미래대학교 서준호 선생님에게 감사의 뜻을 표하고, 교정 작업에서 번역된 원고를 꼼꼼하게 읽고 잘못된 곳을 바로잡아준 고려대 조은상 군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또한 한국외국어대학교 지식출판원의 신선호 팀장님과 김민정 선생님께 출판과정이 순조롭게 진행되도록 애써 주신 것에 감사드린다. 마지막으로 사랑과 격려로 곁에서 힘이 되어준 남편 크리스에게 감사와 사랑의 마음을 전한다.

2016년 8월
이문동 연구실에서
이윤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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