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이미지
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ISBN : 9791168552241
· 쪽수 : 320쪽
· 출판일 : 2024-02-16
목차
작가의 말 7
제1장 난데없는 고백 11
제2장 청혼 21
제3장 준호 27
제4장 이상주의란 무엇인가? 29
제5장 작별 43
제6장 고구마꽃 55
제7장 나뭇잎 편지 65
제8장 열 살배기와 스무 살배기 75
제9장 밀짚모자 87
제10장 연극 연습 97
제11장 왕진 107
제12장 빗방울 129
제13장 피리장이 143
제14장 밀회 157
제15장 현기증 163
제16장 가질 수 없는 사람들 175
제17장 친화력 187
제18장 작은 해바라기 197
제19장 방문 213
제20장 추석 선물 225
제21장 성묘 237
제22장 광희 253
제23장 풍경 소리 261
제24장 어떤 오빠와 어떤 누이 273
제25장 우박 277
제26장 첫눈 283
제27장 꿈 291
제28장 약속 299
제29장 가솔린 무지개 307
마지막 장 새벽 317
주注 320
저자소개
책속에서
그리고 또한 내가 그렇게도 애지중지하던 안정된 생활과 그 속에서의 자잘한 기쁨들은 일찍이 내 인생에 퍼부어진 검은 소낙비 뒤에 떠오른 아름다운 호선의 무지개가 아니라 운명이 조소하듯 찔끔 흘려놓은 진창의 가솔린 무지개에 불과했었다는 것을.
제1장
난데없는 고백
내가 그를 만난 것은 실로 우연한 일이었다. 그날 나는 보험금 지급 문제로 자동차 보험회사 사무실에 갔었는데 그 역시 무슨 볼일이 있어 온 것 같았다.
“듣자니까 꽤 복잡한 문제가 있는 듯한데, 괜찮으시다면 제가 좀……”
그는 초면임에도 불구하고 별로 주저하는 기색도 없이 나에게 말을 붙였다. 보통보다 조금 큰 키에 그저 그런 체격, 오십보다는 육십에 가까운 얼굴, 소박한 옷차림에 역시 소박한 인상…… 첫눈에 비친 그의 모습은 대강 그러했다.
“아뇨, 다 끝났는걸요. 고맙습니다.”
남의 도움을 받아야 할 만큼 어려운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절차상 필요한 몇 가지 골치 아픈 서류들도 거의 갖추어진 상태였기 때문에 나는 당연히 그의 제안을 거절하였다.
“그러면 잠깐 차라도 한잔……”
그는 승강기 앞에까지 따라나오며 나에게 자꾸 말을 시켰다. 단순한 친절 외에 뭔가 꼭 할 말이 있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나는 마음이 내키지도 않았을뿐더러 준호가 학교에서 돌아올 시간이 되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마음이 급했다. 그 당시 초등학교 1학년이었던 준호는 아파트 열쇠를 따로 가지고 다니지 않았었다. 그래서 그가 돌아올 시간이면 내가 꼭 집에 있어야 했다.
“전 집에 가야 해요. 아들이 학교에서 돌아올 시간이 되었거든요.”
막 문이 닫히려는 승강기 안으로 들어서며 내가 말했다. 나는 그가 혹시 뒤따라 내려오는 게 아닌가 하고 공연히 긴장이 되었으나 다행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리고는 그 일을 잊어버렸는데, 그로부터 얼마간 시간이 지난 후에 그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
“나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전 아주머니께서, 아주머니라고 불러도 괜찮겠죠? 너무 젊어 보이셔서……”
약속 시간보다 조금 일찍 커피숍에 들어서자 그가 내 쪽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그는 나보다도 더 일찍 나온 모양이었다.
“그럼요. 전 아줌마인걸요.”
“전 아주머니께서 한마디로 거절해버리면 어쩌나 하고 걱정했습니다. 그러면서도 한 편으론 나와주실지도 모른다고 기대했었지요.”
“그런 식의 요청을 물리칠 만큼 전 마음이 강하지 못해요.”
그는 나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의 신분을 밝힌 다음 한 번만 만나줄 것을 간곡히 청하였던 것이다.
“제 전화번호는 어떻게 아셨어요?”
“보험회사 사무실에 친구가 있어서…… 정말 죄송합니다.”
“그럼 제가 어떠한 처지에 놓여 있는지도 다 아시겠네요?”
“용서해주십시요. 처음부터 아주머니의 신상에 관해 들추어볼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용서해드리죠. 제 남편이 사고로 세상을 떠난 것은 비밀이 아니니까요. 아저씨 외에도, 아저씨라고 불러도 괜찮겠죠?”
나는 조금 전의 그의 말을 흉내내며 가볍게 웃었다. “그때 당신이 웃어주지 않았더라면 당신에게 청혼할 용기를 내지 못했을 거야.”라고 그 후로 그는 가끔 말하곤 했다.
“그럼요. 전 아저씬걸요.”
그 또한 나를 흉내내며 웃었다.
“아저씨 외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고 지금쯤은 아마 다들 잊어버리고 있을 텐데요, 뭐.”
“사람들이란 남의 불행에 관해선 쉽게 잊어버리지요.”
“그편이 오히려 자연스러운지도 몰라요. 사람들이 남의 불행까지 끝끝내 잊어버리지 않는다면 세상이 얼마나 우울하겠어요?”
“딴은 그렇군요.”
그는 진지한 태도로 내 말에 동의했다.
“그래서 아저씨는 저를 위로하려고 나오신 건가요? 그렇다면 제가 손수건을 눈에 대고 있지 않아 실망하셨겠네요?”
나는 그가 전혀 낯선 사람이라는 사실이 오히려 편안하여 그간에 쌓인 피로와 근심 따위로부터 잠시나마 도망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지요. 아주머니를 위로할 생각이었다면 그때 바로 연락을 취했을 겁니다. 하지만 위로받아야 할 사람이 바로 저였기 때문에 내내 망설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