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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시 > 한국시
· ISBN : 9791191751291
· 쪽수 : 128쪽
· 출판일 : 2022-11-30
책 소개
목차
1부
빈방, 히스테리아
마티네의 가을바다
붉은 우체통이 없다
푸른 물고기
엄지공주처럼
칠월
소리를 달아 둔다
호스피스
세상의 바깥
본포의 가을·1
본포의 가을·2
귀현리에서
연못
자운영·2
야경
2부
오월의 신부
도라지꽃·1
그녀의 뜰
고백
시 찾아오는 길 푯말을 세운다
젖무늬거울
램프가 켜진다
세월
용지호수의 밤
달빛 고향
남해에서
이름이 붙은 전설
고양이가 쥐를 잡는 이유
잠들지 않는 이유
여행수첩·2
詩가 있는 알코올 도수
3부
빗장 잠그는 날
시인
어머니
탱자나무 가시 웃고 있던 날
침범
혼불로 핀다
그림자 반죽
어두워졌다
통증 서랍
도라지꽃·2
그녀는 말하려 한다
머리를 감아올린 후
우동 한 그릇 비우는 사랑
내 사랑은
詩, 그 이후 바람에 닿다
4부
바람이 부는 이유
서어나무와 목단
세탁기
수선화
자화상·2
자화상·3
오동나무 거울·1
오동나무 거울·2
오동나무 거울·3
오동나무 거울·4
오동나무 거울·5
오동나무 거울·6
오동나무 거울·7
오동나무 거울·8
■시집 해설
생과 사의 경계에서 감응한 시혼의 기도
- 박윤배 시인
저자소개
책속에서
[서평]
박숙희 시인의 시에는 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울컥함의 배경에 무엇이 있는지, 들여다보고 싶어졌다. 진솔하다는 말과 절실하다는 말이 아마도 그 원인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픈 그의 시 속에는 고통 뒤에 얻는 순도 높은 사랑의 힘이 충만하다. 그가 던지는 메시지들은 아프지만 긍정적이다. 나보다 힘든 장애우들의 애환과 그런 애환에 다가가서 함께하는 박애의 사랑이 들어있다. 그가 몸 안에서 키우는 것은 병이 아니라 어쩌면 누군가에게 그늘을 주는 나무이기도 하다. 그런 그가 길 위에서 만나는 풍경들은 모두 길에서 나서 길로 돌아가는 생의 흔적이다. 박숙희 시인에게 이 시집은 알약이 되고, 박숙희 시인의 『오동나무 거울』을 눈으로 마음으로 읽은 독자들은 이 시집이 희망의 손거울이 되기를 나는 기원한다.
- 박윤배 시인
[시집 해설]
생과 사의 경계에서 감응한 시혼의 기도
박윤배 (시인)
1.
시인은 아파서 시를 쓴다. 즐거움이 커도 시를 쓴다. 동시에 놀라운 감탄 뒤에 그 감동을 기록하고 싶어서도 시를 쓴다. 모르던 지식을 알게 되어서도 시를 쓴다. 인간이 사는 세상은 늘 변화무쌍하며 나약한 인간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일은 연속적으로 일어난다. 각종 자연의 재난이 그러하고 인간의 우매함으로 저지른 많은 일에 의해서 예기치 못한 사건이 생겨난다. 작은 나비 한 마리의 날갯짓에도 지구 반대편에는 태풍이 동반한 쓰나미가 도시를 삼켜버리는 것처럼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시인의 생각 하나가 우주를 변화시킬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두 번째 시집을 상재하면서 해설을 부탁한 박숙희 시인의 시들 또한 책으로 묶여 발표되면 독자를 만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만난 독자는 그 이해의 폭이 다양하고, 감동의 정도 또한 천차만별일 것이다. 이러한 독자들 앞에 시인이 시를 묶어 책으로 낸다는 것은, 대단히 용기 있는 일이기도 하다. 자신의 내면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일이기도 하거니와 요즘 독자보다 시인이 더 많다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많은 문학 잡지에 발표되는 시인 중에는 정말로 시를 잘 쓰는 시인도 많다. 그렇게 잘 쓴 시가 많은 틈새에서 자신의 시는 어떻게 살아남을지 시인은 가끔 고민하게 된다. 그러나 잘 쓴 시만이 독자를 감동하게 만드는 게 아니라는 것이 이번 박숙희 시인의 시를 읽은 솔직한 감정이다. 박숙희 시인에 시를 대하는 내내 나는 가슴이 아팠다. 평소에 잘 울컥하지 않는 냉정한 가슴을 가졌다고 나름 나를 믿었는데, 이게 뭔가? 시가 나를 울컥하게 하다니! 박숙희 시인의 시에는 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울컥함의 배경에 무엇이 있는지, 들여다보고 싶어졌다. 진솔하다는 말과 절실하다는 말이 아마도 그 원인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태어나서 죽음에 이르는 순간까지가 한 편의 시다.’라고 말한 고은 시인의 말 속에서 사는 일의 사소하지만 별것 아닌, 일상의 체험들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시들을 최근 내가 써야 할 시라고 생각하던 나는 박숙희 시인의 시 속에 드러난 그의 체험들을 시를 통해 보면서 내가 지금 얼마나 사는 일에 사치스러운가? 안일한 일상을 붙들고 시를 쓰겠다고 끙끙거렸던가? 생과 사를 넘나들 만치 아픈 몸으로 정신을 갈고 닦은 그의 시혼이 빚어낸 언어의 결정체인 그의 시들은 한 편으로서의 완벽하지 않은 시들도 더러는 있다. 이는 조탁의 과정이 힘들기도 했을 그가 와병 중에 쓴 시인 것이고 어떤 성급함까지 읽히고 있어, 오히려 오랜 퇴고의 작업으로 다듬어 빚어낸 시보다도 그가 아팠던 사람임을 먼저 생각하면 더 큰 울림이 되어 여백을 탕탕 친다. 그의 시를 중에서 아팠던 날의 기록을 고스란히 남긴 시들 중 하나를 보자.
꽃잎이 나에게 말을 하기엔
구토를 참아 내기엔
봉분의 사랑을 이야기하기엔
이곳에서 손 뻗어 닿고 싶은 사람
사이에 둔 채석강만큼 저 멀리에 있다
하루를 사랑하는 하루살이가 부러워지는 건
내가 호스피스 병동에 들었기 때문이다
예기치 않게 엄습해오는 죽음들 앞에서
비상 탈출구가 보이지 않아
싸인펜과 물 종이와 내가 함께 번진다
안으로 삼켜진 울음을 다져야한다고
거대한 목선이 무너진다고
지금 지구를 그려 보여
지구를 지금 어디에다 그려 보여
종이에 싸인펜의 물이 스미는
나는 꼭 그만큼의 시간에 잠을 잔다
내가 묶인 이곳은 호스피스 병상
벌린 입속에서 고엽제 증발하는
환자여
떨지 마라
-시 「호스피스」 전문
시인이 이 시 속에서 자신을 기록하고 있는데 ‘호스피스 병동 침대에 묶여 있고, 물이 종이에 싸인펜이 물에 스미는/ 나는 꼭 그만큼의 시간에 잠을 잔다’라고 자신의 고통을 이야기하고 있다. 밀려오는 통증 속에서도 머리맡에 둔 그것은 종이와 싸인펜과 물인데, 무너지는 목선과 안으로 삼켜진 울음 속에서도 시인은 아마도 뭔가를 쓰겠다고 머리맡에 둔 싸인펜을 통해 동그라미 하나 기어이 그리려는 의식의 어떤 몸부림을 보여주고 있다. 아마도 그렇게 그려진 동그라미는 자신이 숨 쉬고 있는 지구 윤곽의 모습일 뿐이어도 어떻게든 몸을 마음껏 움직일 수 없는 이런 고통의 현실을 벗어나려는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손 뻗어 닿고 싶은 곁의 사람조차 채석강쯤을 사이에 두고 저편에 있는 것으로 느껴진다는 것은 몸을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현실의 한 표현인 것이다. 오죽 갑갑했으면 ‘하루를 사랑하는 하루살이가 부러워지는 건’이라고 시인은 병상의 감정을 기록하고 있겠는가. 위의 시 「호스피스」는 단지 병실의 기록이며 시집의 시들 중 많은 시에서 그러한 고통의 잔재들과 아픔이 전편에 은유로 내재 되어 있다.
2.
아픈 그의 시 속에는 고통 뒤에 얻는 순도 높은 사랑의 힘이 충만하다. 그가 던지는 메시지 들은 아프지만 긍정적이다. 나보다 힘든 장애우들의 애환과 그런 애환에 다가가서 함께하는 박애의 사랑이 들어있다. 그가 몸 안에서키우는 것은 병이아니라 어쩌면 누군가에게 그늘을 주는 나무이기도 하다. 그런 그가길 위에서 만나는풍경들은 모두 길에서 나서 길로 돌아가는 생의 흔적이다. 고성군 마암면 삼락리 푸른 횟집을 다녀와서 그는 시 「푸른 물고기」를 썼고, 본포저수지, 창원군 용지리 387번지, 귀현리, 용지호수, 남해, 사량도 등 살아있는 몸이 발로 다녀온 곳을 나름 꼼꼼히 기억하고 그러한 곳에서 얻은 영감을 시로 기록하듯쓰고 있다. 아마도 자신이 몸이 아프기 시작하면서 지난 시절에 가본 추억의 장소들이 하나씩 소중한 기억의 자산임을 깨달아서 여러 지명이시 속에 등장하는것은 아닐까? 그중 한 편을 보면
누군가 사진을 찍어 하얀 벽에 걸어 놓았다
송미찻집 벽에 걸려 있는
액자 속의 수선화 사진
뭍사람들이 차를 마시며 나누었던
기억을 담고 있다
누군가 사진을 찍어 놓았어요
등대길의 수선화
길은 저만치 사라지고 등대만 보이네요
시간의 틈 속에서 자라고 있는 등대의 하늘
하늘에는 그대의 산 그림자 그려 두었고
바닷가 물빛 여울목에서 자라고 싶어 하는
하루라는 섬
그늘이란 집을 손에 쥐고
떠나려 하네요
그대 흔적을 남겨두기 위한 파도 소리
길고도 긴 등대 길의 오두막집에서
밤이 내리는 시간
내 젖은 가슴으로 안아도
떠나려 하네요
벽의 손님이었던 나를
구릿빛 거울에 담아서
거울의 그림자에게 보여드릴 때
그대는 조용히
나만의 문에 잠겨 버렸습니다
바람이 불고 간 등 뒤의 자리에 서서
벽의 손님이었던 나를 기억하며
이젠 벽에 걸린 사진액자 속의 수선화
꽃 지는 자리도 아름다워
해를 해로 가려 그늘집 지어 주어야
살아갈 수 있겠니
라고 말하는
- 시 「수선화」 전문
정지선이 없는
활주로에 오른다
구름 위를 오른다
동백꽃 암술이고 싶었다고
그니
그니를 생각하며
시계 초침 움직일 때마다
목화구름
흉터자국을 만들어
하늘 위를 올랐다
자궁 속
활주로에
피어나는 설국
- 시 「여행수첩·2」 전문
여행지의 한곳인 등대가 있는 어느 섬이나 바닷가에 있는 송미찻집에서 액자 속 수선화 사진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만나고 있다. 과거 한때 이곳에 손님으로 왔었던 자신을 흰 벽에 걸린 수선화는 기억하고 있다고 시인은 믿는다. 사실은 변함없는 사진 속 수선화임에도 시인은 감정을 통해서 자신을 기억하길 바라는 그 감정이 얼마나 절실한 가늘 보여주고 있다. 행여나 자신이 병을 앓다가 생을 마감한 후에도 잠시나마 자신의 시선을 붙들었던 한 송이 수선화는 거기서 자신을 기억해 줄 것으로 믿는다. 이렇듯 평범환 사물과 말 걸기는 시인의 독백으로 ‘해를 해로 가려, 그늘집 지어 주어야/ 살아갈 수 있겠니/ 라고 말하는’ 의 차원으로 애틋한 마음을 녹여내고 있다. 이렇듯이 여행은 시인에게 있어서 꿈꾸기의 다름 아니다. 낯설기 그지없는 새로운 영혼의 영지를 찾아가는 시인의 발은 새로운 길 위를 걷고 싶어 한다. 모태의 자궁 속도 알고 보면 물이고 그런 물에서 나와 물로 회귀하는 그 길 위의 행로는 여행이다. 시인의 여행 수첩이라는 시에서도 ‘정지선 없는 활주로’ ‘자궁 속에 활주로에 피어나는’ 자신을 설국이라 비유하고 있는 점 또한 주목된다. 또 다른 여행지에서 쓴 시 한 편을 더 보면
누가 그 길을 따라 걸어 들어 갔던가
저수지 물살 아래 길이 놓여 있다
늪 아래 물소리로 만든 길이 있다
풍경이 낯선 사진 속에 알을 낳던 새
시간 속으로 돌아가
하늘을 베어 물고 날아오른다
남겨진말새떼소리아득한내밀창에비치는거울이되어간다
흩어져놓인일기장은긴머리푸는으악새기억속으로
가을을수놓는저수지배경이되어간다
길의 처음이 물속인지 물 밖인지는 알 수가 없어
오늘이라는 저수지 물소리로 만든 길 위에 누워
머리를 감는다
돌아갈 곳 어디라고
늪 위에 앉은 새
- 시 「본포의 가을·1」 전문
시인인 그가 세상에 나와서 그가 돌아가는 길은 물의 길이다. ‘길의 처음이 물속인지 물 밖인지는 알 수가 없어’라고 말하는 그의 길은 알 수가 없다고 말하지만, 그는 그렇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 세상의 모든 길은 물속에서 나와 물속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어느 가을날 본포에 와서 시인은 깨달은 것이다. 물 위에 오래 발 담근 새가 돌아갈 곳이 어디라고? 묻는 동작을 보면서 길 위의 시인은 물이라는 거울에 자신을 비추어 보고 있다.
3.
박숙희 시인은 결국 물의 시인이다. 그에게 물은 생명의 시작인 것이며 바슐라르가 말처럼 잔잔한 물은 그에게 거울이다. 물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면서 인간은 나르시스에 빠지게 되고 고통 또한 생겨난 것이다. 그의 시 전편에 걸쳐 나타나는 물의 이미지는 자신의 죄를 비추는가 하면 치유의 도구가 되고 있다. 아마도 그의 사주는 불이 아닐까. 마치 자신의 뜨거운 속을 물을 통해서 물을 바라봄으로 안정을 찾으려는 무의식의 한 표현이라고도 보인다. 물을 빼놓고는 그의 시는 이해되지 않는다. 그가 꿈꾸는 세계는 물에서 나서 물로 돌아가는 것, 물과 거울을 동일 대상으로 볼 때 그의 자화상은 결국 물이라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언어로 읽은 결과물일 것이다. 시 속에 등장하는 그의 여행시의 현장 또한 물이 있는 곳을 찾고 있음이 또 한 그를 증명하기에 충분하다. 시 「마티네의 가을바다」 -엉겅퀴 꽃잎에 숨소리 지었던 그 사람/ 한 장의 잎새로 떨어지던 날/ 바다에 갑니다. 시 「푸른 물고기」-새우처럼 휜 등으로 서서는/ 간사지 멀리 돌아올 파도에 귀를 열어둡니다. 시 「칠월」 -저수지의 물살 소리마저도/ 휠체어 바퀴 소리를 싣고 사라질 것이다. 시 「호스피스」 비상 탈출구가 보이지 않아/ 싸인펜과 물 종이와 내가 함께 번진다. 시 「본포의 가을 2」 - 오늘은 강 하나 흘러갈 뿐, 등등 물을 소재나 배경으로 다루지 않는 시들은 찾아보기 힘들 정도다. 아래 시 두 편은 아픈 자신의 내면 풍경을 다루고 있다. 시 「빈방, 히스테리아」 는 자신을 빈방으로 설정한 시이고, 잘라내는 행위의 절박함을 통해서 빈방이라는 침묵의 거처로부터의 탈출을 시인은 소망하고 있다. 시 「엄지공주처럼」은 그런 자신을 역설적으로 사랑의 힘을 믿는 자신의 마인드 컨트롤mind control을 통해 희망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시이다. 시인에게 있어 시란 치유의 힘이고 자신의 고통도 웃는 웃기는 안경을 쓰고 사모아 섬을 찾아가는 과정을 상상을 통해 그려 놓음으로 어떤 해탈의 경지까지를 보여주고 있다. 생각으로 아픔을 지우려는 처절한 몸짓을 드러낸 시 「엄지공주처럼」은 독자들에게 현실의 고통을 이겨낼 메시지를 줄 수 있는 시로 읽혀진다.
머리카락을 자른다
립스틱을 자른다
계절을 자른다
거울 앞에 서 있는 사랑을 자른다
빈방인 걸 느끼게 하는 빈방을 자른다
깨어진 거울의 얼굴
거미줄을 감아올리고
방바닥에 펼쳐 놓은 검붉은 빨래
발뒤꿈치로 밀어낸다
사랑 그 쓸쓸한 저녁과 함께
불빛에 흔들리는 그녀
야윈 침묵에 또 자라날게
머리카락과 립스틱인 걸 알기에
거울 앞에 선 그녀
이번엔 누워 따라오는
그림자를 자른다
- 시 「빈방, 히스테리아」 전문
웃는 웃기는 안경이 필요하다
나비들의 작은 입술로 부는
나팔 소리
완전한 결정체의 탄생을 알리는
신호음이었던 거야
바람 막을 안경이 있어야지
꽃을 클릭할 수 있었어
그녀의 사랑엔 조건이 없지
한 페이지 분량의 자유
보석상 여자의 이야기로 들려주고
입학 사진을 안경테로 찍으며
어둡던 사십 대 골덴바지
붉은 노을빛으로 물들인다
나는 꽃잎에게
입김을 불어 본다
오래도록 묻어두었던 젖가슴
몽우리도 다시 본다
그녀 아직은 붉다고
사모아 섬에서의 사랑은
- 시 「엄지공주처럼」 전문
시집에 실린 전편에서 위 두 편의 시는 매우 함축적으로 시인의 내면 풍경을 잘 묘사한 시로 보이며, 공감대가 깊고 다의적인 해석이 가능한 시로 보인다. 대상을 두고 세밀한 묘사와 다감한 감정을 교환하는 시인의 행위는 꽃과 나를 동일화시키는 시각이 마치 바로 앞의 누군가에게 속삭이는 듯한 친근감이 있어, 호소력 짙은 시를 빚어내는 시인의 탁월한 능력을 충분히 보여주는 시이다.
4.
물은 거울이란 가정에 덧붙여 그의 시는 기도의 시다. 우리의 토속 신앙 속의 크고 오래된 나무를 숭배의 대상이 되기도 했거니와 아프리카의 여러 부족과 인디언들도 큰 나무 앞에서 가지는 경건함은 나약한 인간에게 있어 커다란 나무가 땅의 소원을 하늘에 올리는 대상이자 하늘의 계시를 가장 먼저 받는 어떤 기원의 대상이 되었던 것처럼 박숙희 시인이 만난 저수지 물가의 수령이 깊은 커다란 오동나무는 마치 자신을 비추는 또 하나의 거울이 되고 있다. 시인은 자기 자신이 이렇듯 나약함을 알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는 자신보다 어려운 사람들의 그늘이 되어 주고 싶어 한다. 마음만이 그런 것이 아니라 그의 실천적 삶을 담아낸 시편을 소개하면 시 「칠월」, 「혼불로 핀다」, 「그녀는 말하려 한다」, 「세탁기」 등에서 시인의 심정은 참 따뜻하다.
공책 속에 묻어 있어야 할 사각거림을 잎사귀들이 들려줍니다
습작은 연필의 움직임과 함께 그렇게 내 곁에 있습니다
오동나무 이야기는 황혼병에 걸렸나 봅니다
나 또한 황혼병에 걸렸습니다
저수지 둘레의 땅은 질척하고 군데군데 징검다리 되어 주는 풀무더기
공책 속에 묻어 있는 진흙탕을 달래줍니다
누구도 흔적을 남기기 싫어하니 질투가 나더군요
풀무더기 보다 아픈 건 아니니 지나온 길은 변하는 것 없더라
외로움에 미쳐버린 사랑을 보는 것 같았다라고 말하며 나는 바람을 쫓아서 뛰어야 했습니다
항균작용에 의해서 생겨난 신열은 나를 더 아프게 해서
입에 네 알의 약봉지를 털어 넣었습니다
식도를 따라 넘어감을 감지하고는 오동나무가 몸을 부르르 떠는 겁니다
- 시 「오동나무 거울·7」전문
가슴이 녹아
한강 물이 된 그는 시각장애인 1급이라며
시인의 꿈을 말한다
손끝의 온기가 점자가 되어 눈으로 흐른다
상상으로 보이는 눈빛
기다림을 안고 있는 등꽃
그녀의 마음 가닿아 언제나 혼불로 핀다
행복리 사람들이 밭의 야채를 가져간다고
불평하는 목소리
봄날 춤사위가 되어 하늘로 쏘아 올린다
그들의 말에
붉어져 가는 영산홍 곁
손, 손, 손, 손을 숨기고 싶다
진정한 마음으로 오는지 느낌으로 안다고 말하는
그녀 곁에서
시야가 뜨거워지는 순간
그녀가 내 곁에 닿아도
나 청각장애인 1급 판정을 받는 날
황현순 그녀를 보며
꿈을 말한다
그녀와 나 시의 혼불로 핀다
- 시 「혼불로 핀다 - 황현순 님」 전문
위의 시 「오동나무 거울·7」은 스케일이 상당히 큰 연작시이다. 1부에서 8부까지 전체를 읽고 나면 오동나무에 대한 시인 나름의 해석과 나이가 들수록 속을 비워가는 오동나무의 생애가 마치 전통여인을 연상케 한다. 옛날 사람들이 딸을 낳으면 마당가에 오동나무를 심는다고 했던가? 불모산 저수지 가에 있는 어느 매운탕집 마당 가에 심어진 나무인 것 같은데 그 식당집 노파를 연상케 하는 그 오동나무에게 시인은 어떤 주술을 걸어 둔 것인지? 그 오동나무는 저수지를 거울처럼 내려다보면서 자신 또한 시인의 얼굴을 비춰주는 손거울로 우뚝 서 있다. 마치 어떤 신령함으로 시인의 어떤 그리운 대상이 되는 오동나무는 문득문득 안부를 묻는 전화를 걸게 하는 것이다. 멀리 뻗은 뿌리 끝에서 또 어린 나무하나를 밀어 올리는 나무는 마치 어머니에게서 딸로 이어지는 여인의 한을 느끼게 한다. 마치 나이테 깊은 장롱 위에 올려둔 오래된 손거울이라고 묘사된 오동나무에서 시인은 몸의 신열도 사랑병도 말끔히 낳게 해 달라는 기도를 올린다. 그리고 자신의 처지와 같은 사람들에게 찾아오라는 권유도 넌지시 해본다. 오동나무를 쓰다가 어느새 오동나무가 되어버린 시인은 이제 약봉지의 약을 털어 넣지 않아도 될 만큼 낳았다 한다. 불어오는 바람을 쥔 꽉 쥔 무녀의 방울들 오동나무의 커다란 손에 들려지는 날을 시인은 기다리고 있다. 마지막으로
침대 하나에다 보름달을 적셔 놓고
눈을 뜨면
평면 속의 여자를 만난다
새벽을 열어주는 여자와 평면 속의 유화
모딜리아니의 모자 쓴 여자
세월을 읽고 있다
불빛의 온기를 찾아서 공작새 깃을 펼쳐 보인다
공작새 문양은 새벽을 열어주는 여자
첫 마음으로 노크를 한다
오래전 미소가 걸려 있다고 눈인사를 한다
속삭인다 어떻게 오랫동안 그렇게 지낼 수 있어요
나와 함께 밥을 먹고 오후의 햇살을 가슴에 품고 사랑한 글자들을 노을 위에 올려놓고 풋풋한 사과향을 그리워하고 가방 속 중고차 내역서와 함께 밤을 읽고 떠나간 그의 얼굴도 묻고 그 여자의 방 평면 속에 유화로 그려진 여자
나는 그 여자가 되어간다
- 시 「자화상·2」 전문
모딜리아니의 그림 속 화가의 아내이자 모델인 그녀가 되어간다고 그의 시 「자화상·2」 마지막 연에서 진술하고 있다. 늘 고개를 한쪽으로 비스듬히 기울인 그 여인은 이미 과거의 여인일 터 이제 고통을 툴툴 털고 일어서는 박숙희 시인에게 이 시집은 알약이 되고, 박숙희 시인의 「오동나무 거울」을 눈으로 마음으로 읽은 독자들은 이 시집이 희망의 손거울이 되기를 나는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