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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ISBN : 9791192828596
· 쪽수 : 280쪽
· 출판일 : 2024-08-30
책 소개
목차
책을 펴내며
불온한 외출 / 9
서부영화를 보는 시간 / 35
위대한 노보 씨 / 61
길 위의 길 / 89
흔들 머리 된다고 / 115
라스코 동굴로 가는 길 / 141
우물가의 삽화 / 169
리리의 꽃밭 / 197
로타네브와 베나토르 / 225
해설
외출을 위한 연장_장두영 / 255
작가의 말
저자소개
책속에서
표제 없는 책에 남아 있던 메모가 떠올랐다. 판면 밖으로 튀어나온 메모는 각기 다른 필체로 어우러져 있었다. ‘세상에 나서려거든 반대편에서 맞서라. 그러지 않으면 훗날 얻을 게 없다.’ 그 밑에는 색깔도 필체도 다른 문구가 떡하니 버티고 있었다. ‘한발 한발 나아가다 보면 세상은 좋아질 것이다’라는 두 개의 글귀가. 그중 하나는 미순이가 남긴 말일 거라고 확신했다.
‘세상에 나서려거든 반대편에서 맞서라. 그러지 않으면 훗날 얻을 게 없다.’ 반대편에서 맞서야 얻는다는 게 무슨 뜻일까. 세상은 언제든 뒤바뀌게 마련이니 반대편에서 부딪쳐야 세상이 바뀔 때 한몫 챙길 수 있다는 말이겠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세상이 천지개벽을 한다고 해도 개돼지로 살아야 하니까. 그렇겠지. 세상은 어차피 시소게임인 것을. 바뀌는 세월, 바뀌는 시국이 좀 더 느리거나 좀 더 빠를 뿐. 아무리 견고한 세상일지라도 변치 않고 영원할 수는 없을 테니까.
‘한발 한발 나아가다 보면 세상은 좋아질 것이다.’ 그랬다. 나 또한 그렇게 생각했다. 조금 조금씩 살기 좋은 세상이 올 거라고. 세월이 흐를수록 사람들끼리 싸우는 일도 줄고, 굶주리는 사람도 줄어들 거라고. 아니었다. 세기가 바뀌고 정권이 바뀌어도 세상은 여전히 아귀다툼이었다. 평화로운 세상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것이었을까. 더 많은 이들이 더 많이 다투고, 더 큰 사건과 사고로 온 세상은 시끄러웠다. 아무리 평화를 외쳐도 세상은 진흙탕 싸움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미순이를 믿는다. 그녀의 소망을 확신한다. 나는 지금도 그녀를 믿고 있다.
(「불온한 외출」)
밖에 있던 검은 모자가 들어왔다. 새우깡에 오징어 한 마리, 그리고 맥주를 빼 들었다. 맥주는 딱 3캔뿐. 맥주를 시원하게 마시기 위한 저들만의 전략일 거였다.
나는 바코드 리더기를 빼 들었다. 탕 타당 탕, 게리 쿠퍼의 총 솜씨를 떠올리며 레이저를 쏜다. 삑 삐빅 삑, 레이저 불빛이 발사된다. 어느 위치에 물품이 있어도 바코드를 정확하게 찍어 댄다. 삑사리 하나 없이 모두 백발백중이다.
“와, 진짜 빠르네요.”
“뭐가요?”
“찍는 거.”
빠른지 느린지를 아는 거 보니까, 녀석도 편의점 알바를 좀 했었나 보다.
“아, 그렇습니까.”
으쓱해진 나는 녀석에게 하나 더 보여 주기로 한다. 리더기 돌리기. ‘슝슝슝-’, 마치 게리 쿠퍼가 총을 돌리듯 리더기를 빙빙 돌린다. ‘투둑 툭’, 권총집에 총을 찔러 넣듯 리더기를 거치대에 올려놓기까지. 리더기를 돌리기는 쉽지 않다. 권총처럼 손가락을 끼울 수 있는 방아쇠울이 달린 것도 아니니, 리더기 돌리기에 관한 한 내가 게리 쿠퍼였다.
(「서부영화를 보는 시간」)
노보는 사무실에서 꼼짝하지 않고 로토피아의 형세를 지켜보았다. 훔쳐보는 재미라고나 할까. 노보는 요즘 그런 것을 만끽하고 있었다. 어리석은 자들의 시시비비를 내려다보는 것이 이토록 흥미로운 일이었던가. 보이지 않는 마력 같은 것을 손에 쥔 느낌이었다. 노보는 주민들의 관심을 돌릴만한, 그들의 공포를 재울만한 주민을 하나 더 유치하기로 했다.
노보가 점지한 36호 주민은 바로 무당이었다. 데이터 분석가 A의 보고서에 따르면 무당은 21세기 말까지도 그 명맥을 유지했다고 하는데…. 노보는 무당의 등급을 높이기로 하였다. 자그마치 3.3으로 AI 수치를 올려놓았다.
첨단 과학의 결정체인 로토피아에 무당을 들이다니. 인공지능 로봇이 살아가는 로토피아에 무당 로봇은 상상 밖의 선택이었다. 과학적 데이터를 능가하는 것은 신의 영역이었고, 신의 영역을 엿볼 수 있는 직분은 무당밖에 없었다. 과학으로는 도저히 밝혀낼 수 없는 불가사의, 가오리 블랙오션의 실종은 불가사의에 가까웠다. 과학 문명의 위력을 무시한 채 벌어지는 불확실성의 예측 불가능한 미래. 그 미래를 내다보는 신의 눈을 가진, 신의 뜻을 전달하는 이는 무당이 제격이었다.
노보의 판단과 결정에 의한 것이었겠지만, 노보는 무당을 통해 주민들이 흥미로워할 만한 사건을 하나 꾸미기로 작정했다.
(「위대한 노보 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