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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세계의 소설 > 기타 국가 소설
· ISBN : 9788932475875
· 쪽수 : 248쪽
· 출판일 : 2025-12-10
책 소개
근대 성심리학의 출발점이 된 문학적 사건
『모피를 입은 비너스』는 정신의학과 문학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탄생한 독특한 작품이다. 젊은 귀족 제베린은 우연히 만난 과부 반다에게 자신의 은밀한 욕망을 고백한다. 그는 모피를 두른 여신 같은 여인의 노예가 되어 채찍질당하고 굴욕당하기를 갈망한다. 처음에는 당황하던 반다는 점차 지배자의 역할에 빠져들고, 두 사람은 주인과 노예라는 관계를 명문화한 계약서까지 작성한다. 이들은 이탈리아로 떠나 환상을 현실로 만들지만, 시간이 지나며 역할극은 통제 불가능한 방향으로 치달아간다.
자허마조흐의 작품은 1886년 리하르트 폰 크라프트에빙이 『성의 병리학』에서 여러 사례의 성도착증을 정리하며 ‘마조히즘’이라는 용어를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20세기 중반 질 들뢰즈는 『마조히즘』이라는 획기적인 연구를 통해 마조히즘이 사디즘과는 전혀 다른 독자적 세계를 구축하고 있음을 밝혔다. 들뢰즈는 마조히즘이 단순히 고통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계약과 규칙, 과정을 통해 고통을 통제하는 훨씬 미묘하고 복잡한 현상임을 논증했다. 『모피를 입은 비너스』는 채찍, 모피, 계약서 등의 상징들로 가득하지만, 이러한 장치들은 궁극적으로 권력 관계의 전복과 재구성을 다루는 문학적 실험이다.
자허마조흐 자신의 삶 역시 작품 못지않게 극적이었다. 소설 속 반다는 작가의 연인이었던 파니 폰 피스토르를 모델로 한 인물이며, 자허마조흐는 실제로 작품 속 제베린처럼 그녀와 주종 관계를 명문화한 계약을 맺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후에 그의 아내가 된 반다 폰 자허마조흐는 1907년 남편 사후 회고록을 출간해 그들의 기이한 결혼 생활을 폭로했다. 이처럼 작품과 현실이 뒤엉킨 자허마조흐의 삶은 문학과 인생의 경계가 얼마나 모호할 수 있는지를 보여 준다.
권력과 욕망에 대한 철학적 성찰
『모피를 입은 비너스』의 진정한 가치는 남녀 간 권력 역학에 대한 예리한 통찰에 있다. 소설은 꿈의 틀 구조로 시작되는데, 화자가 모피를 두른 비너스 여신과 대화를 나누는 장면은 독자로 하여금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의심하게 만든다. 비너스 조각상에 대한 숭배는 작품 전반에 걸쳐 반복되는 모티프로, 남성이 여성의 신성한 아름다움 앞에서 스스로를 복속시키는 이교적 숭배 행위를 상징한다.
제베린의 욕망은 단순한 성적 일탈이 아니라 당대 사회 구조에 대한 도전으로 읽을 수 있다. 자허마조흐는 남성 특권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를 상상하려는 혁명적 시도를 감행했다. 19세기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의 절대적 지배와 남성의 완전한 복종이라는 설정은 그 자체로 전복적이었다. 흥미롭게도 반다 역시 제베린의 환상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변화한다. 처음에는 제베린의 욕망에 당혹스러워하던 반다는 점차 지배자의 역할이 주는 쾌감에 눈을 뜨게 된다.
작품은 남녀 권력 역학뿐 아니라 마조히즘의 메커니즘에 대해서도 흥미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반다는 19세기의 급속한 산업화가 성적 도착을 낳았을 수 있다고 추측하며, 마조히즘을 이교적 자연 상태로의 회귀 욕구로 해석한다. 이는 근대 문명이 인간의 본성을 억압하고 왜곡한다는 낭만주의적 비판과 맞닿아 있다. 작품은 괴테, 슈토름, 호프만의 전통을 잇는 독일 노벨레의 정교한 액자 구조를 따르면서, 충격적인 내용을 고전적 형식 안에 담아냄으로써 당대 독자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켰다.
목차
모피를 입은 비너스
부록 자허마조흐의 두 개의 계약서
주
해설 『모피를 입은 비너스』 세계로의 안내
판본 소개
레오폴트 폰 자허마조흐 연보
역자의 말
리뷰
책속에서
“사랑에 있어서 평등은 있을 수 없습니다.” 나는 진지하고도 엄숙한 투로 대답했다. “상대를 지배할 것인지, 아니면 상대에게 지배를 받을 것인지 둘 중에 하나를 택해야 한다면, 나 같은 경우에는 아름다운 여인의 노예가 되는 편이 훨씬 더 매력적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사사건건 바가지나 긁어 대며 괴롭히려 드는 여자가 아닌, 차분하고도 자의식에 찬 엄격함으로 상대를 다스릴 줄 아는 여자를 어디서 만날 수 있을까요?”
“그런 여자를 찾는 게 그렇게 어려운 것만은 아닐 텐데요.”
“그렇다면 혹시……”
“이를테면 나 같은 여자는 어때요?” 그녀는 깔깔대고 웃으며 몸을 뒤로 젖혔다. “나는 폭군의 기질을 갖고 있어요. 또 필요한 모피도 갖고 있고요. 그런데 간밤에 보니 당신은 나를 정말 두려워하는 것 같더군요!”
“오! 제발 그렇게 해 줘요.” 나는 한편으로는 떨리고 또 한편으로는 황홀감을 느끼며 외쳤다. “결혼은 평등과 합의에 바탕을 두지만, 이와 달리 가장 강렬한 열정은 서로 상반된 것들로부터 나옵니다. 우리는 거의 서로 적대적으로 마주 서 있는 양극이지요. 내 사랑은 바로 그러한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미움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두려움이지요. 그런 관계로 보면 한쪽 사람은 망치가 되어야 하고 다른 한쪽은 모루가 되어야 합니다. 나는 모루가 되고 싶어요. 자기가 사랑하는 여자를 무시하면서 행복할 수는 없어요. 나는 한 여자를 떠받들고 싶어요. 그 여자가 나를 잔인하게 대해 줄 때만 그렇게 할 겁니다.”
“그러나 제베린.” 반다가 거의 화가 난 듯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나를 사랑하고 또 나 역시 사랑하는 당신과 같은 남자를 내가 함부로 다룰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
그녀의 작고 따스한 손의 어루만짐을 느끼고 또 반쯤 감은 눈동자로 사랑스레 나를 내려다보는 그녀의 눈길을 받으며 나는 달콤한 도취에 사로잡혔다.
“내가 사랑하고 숭배하는 여인의, 아름다운 여인의 노예가 되는 거죠.”
“그 대가로 당신을 학대할 수 있는 그런 여자를 말이죠.” 반다가 내 말을 가로막으며 깔깔대고 웃었다.
“그래요, 내 몸을 묶은 다음 내게 채찍질을 하고 발길질까지 해 대는 그런 여자죠. 그러면서 정작 다른 남자 품에 안겨 있는 여자죠.”
“그리고 당신에게 질투심을 불러일으켜 당신을 미칠 지경으로 만들고 당신이 그 운 좋은 연적과 맞서게 한 다음, 당신을 연적의 야수 같은 손에 내맡겨 버리는 그런 간이 큰 여자겠죠. 안 그런가요? 마지막 장면은 별로 마음에 들지 않나요?”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 반다를 쳐다보았다.
“당신은 내 상상을 초월하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