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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시 > 한국시
· ISBN : 9791193615324
· 쪽수 : 152쪽
· 출판일 : 2025-06-19
목차
** 시인의 말
1부 ‘알리바이가 눈부시다’의 어원
점프 위블 - 프레세나 핑크 빙하 12
‘알리바이가 눈부시다’의 어원 14
양계장 근처 또 다른 날개 16
어쩌면 노랑 18
허공을 체포하다 21
엄마는 외계인 24
S의 정오 26
발등에 별빛을 28
무거운 악수 30
뒤축을 읽는 시간 32
물고기연 35
2부 봄,비 올라 비올라
봄,비 올라 비올라 40
그녀의 노루 43
소리를 단풍이라 믿을 때 46
나, 눈감고 천 번쯤이 된 적 있다 48
‘바’와 ‘수’의 동류항 50
노란 탁란 52
파도를 돌려요 54
전지적, 그들의 앞치마 시점 - 새우먹는 애인들 57
끝없는 잠행潛行 - 백제금동신발 60
화아악 62
유쾌한 철새 64
3부 작은 물이 돌아오는 골목
그러고 보면, 68
맛있는 농담 71
끄터리 풍경 74
어쩌다 파, 그래도 파 76
작은 물이 돌아오는 골목 78
표지판, 식지 않는 81
그때 수돗가에서 하늘을 올려다본 나는, 기다란 이라고 외쳤다 84
밤비와 치통 87
죽여주게 웃는 법 90
이혼이 타고 있어요 93
뜻밖의 민들레 96
4부 옆집과 옆집의 옆집과 옆집
전자동 죽음 100
찍고 간 102
오발탄 104
옆집과 옆집의 옆집과 옆집 106
개구리 家 109
못갖춘마디 112
불시착한 서술어 115
알베도 효과 118
그래, 그래도 120
그 저녁이 너의 속눈썹에 갇힐 때 122
밑줄과 비명 124
** 해설
저녁의 뒤축┃강연호(시인, 원광대 교수)
저자소개
책속에서
무거운 악수
웃음은 끝이 둥글어 어디든 날아가 구멍이 되었다
수천 년 쌓인 소리의 층을 아래에서 위로 쓰다듬는다
너의 시선이 적신 벼랑마다 물의 방이 생겼다
물도 오래되면 채석강처럼 길게 누워 잠들었다
누군가의 서재처럼 암벽 안으로 깊이 들어갈수록
다닥다닥 붙어있던 비린 소리의 생애, 금 간 파찰음들이
이따금 돌가루처럼 뚝뚝 떨어졌다
해풍의 발가락들은 얼마나 깊은 수심을 건너왔기에
돌의 벼랑을 닮은 발톱들 하얗게 목이 쉬었을까
아무도 잠그지 못한 파도소리, 절벽으로 올라가 단단한 높이가 되었고
문어 낙지 망둥어들이 드나들었던 입구들까지 해식동굴은
가슴에 안고 있었다 모나고 각진 돌의 등뼈에서 휘파람 소리가 났다
손을 대면 속살처럼 만져지는, 수십 층 착하고 순한 잎들
절벽이 안고 있는 주름 모두 해와 별의 지문이라는 걸 그때 알았다
달빛은 돌의 상판을 매일 두드렸던 부드러운 망치일까
네가 뜨거워진 손을 내밀자 너보다 더 많은 네가 앞서 나가
돌의 손을 잡아주었다
그 순간 칠천만 년 전, 백악기 중생대를 발바닥에 묻힌
거인의 발소리가 들렸다 신神들이 물이랑에 실려 보낸 두꺼운 돌 사이에
가름끈 대신 갈매기 깃털 하나 끼워놓는다면
손수건처럼 날려 보낸 나의 새들도 다시 소리를 가질 수 있을까
물멍하다 아주 바다가 되어버리기 전 어두워진 밀물에 너의 저녁을 씻고
붉게 빠져나오는 노을이 보였다
봄,비 올라 비올라
날개의 밥은 봄이죠 구름이 나비를 닮아
비올라 비이올라 비이가올라 비이가올라나
허공에서 이리저리 글썽이다 길쭉하게 뛰어내리는 비
그날 밤, 거미가 밤마다 현絃 좀 만지던 집에 문득 입성한
하이힐이 궁금한가요?
그렇다면 24시간 비 오는, 삼거리 목욕탕에 가보세요
그녀 매미처럼 온몸으로 울어본 듯, 호리병 곡선이야 끝내주지만
금값도 나름이죠 절대음감까지 바닥나 처분할 게 없는 여자
한때 드레스에 힘 좀 줬던 비올라연주도 그날 이후 끼니가 되지 못했죠
때밀이 손님 뜸한 날, 냉탕과 온탕을 오가듯
비올라 현絃과 꽃들의 예보를 수시로 곱하고 빼보는 여자
연주와 사고 후유증에 조바심을 걸칠 때
투명해서 슬픈 날개에 빗소리처럼 들려오던 마지막 박수 소리
때타월 낀 두 손으로 도돌이표가 태반인 세월의 등 밀다 보면
어느새 그녀 안에 출렁이는 어둡고 불규칙한, 마지막 음계들
(이젠 견딜 만해요 매미도 굼벵이로 7년 참아야 울 수 있잖아요)
아무리 덜어내도 복리로 늘어가는 통증의 늪에서
그날의 악몽을 대야로 퍼내듯 거칠게 물청소하는 그녀
눈을 타고 흐르는 젖은 머리칼에 문득 얼굴을 들면
목욕탕 타일벽에 일렬로 목을 맨 샤워기들
삐걱, 삼거리 밖 새벽을 삼킨 뿌연 안개
비올라꽃 만삭인 어느 집 화단에 잠시 멈춰선 그림자
화분과 화분 사이로 일어난 바람의 활 비브라토로
으- 응- 앵… 으- 응- 앵… 비올라 켜듯 들려오는 환청
목젖 어디쯤 딱딱해진 그녀 눈물, 별이 되어 쏟아질 시간이에요
밤비와 치통
말하자면 이것은 뒷모습들만 사는 집에 관한 줄거리
인간이 만든 발명품이었다 딸꾹질하듯,
고시원은 취준생을 끝없이 뱉어냈다
젖은 소리에 이토록 많은 뼈가 들어있었다니,
H의 창을 두드리는 빗소리에서 밤새 종이구기는 소리가 쏟아졌다
식은 컵라면처럼 제 몸을 부풀리던 달이 고시원 지붕을 빠져나갔다
분식점 여자가 TV에 담갔던 시선을 꺼내 이쪽으로 보았다
오래전 물길을 분실한, 낡은 물푸레나무 식탁에 라면을 올렸다
H는 고향 앞바다를 데려와 테이블 앞자리에 앉혔다
버섯 같은 섬 몇 라면 그릇에 띄웠다 고향 노을을 소환한 매운 국물 속에서
볼펜이 찢어버린 어제와 해송 껍질 같은 아버지의 손등이 그와 마주쳤다
고시원으로 돌아왔다 새벽까지 프린터기가 취업을 출력했다
속수무책은 책상과 책임을 혼동했다
그것들은 내일 날씨처럼 믿으면 안 되었다 그곳에서 죽음과 뒷모습은 동급이었다
죽음이 사는 고시원 옥상은 어떤 국어기출문제보다 비유체계가 탄탄했다 하루는 저무는 것이 아니고 납작해지는 거였다 어떤 날에는 방과 방 사이 허술한 벽 속에서 바퀴벌레들이 밤새 치통처럼 자랐다
통증도 오래 묵으면 권력이 되었다 손바닥만 한 창이 딸린 방
좀처럼 오지 않는 내일에 감금된 채
밤새 거리에 왁스칠하는 빗줄기를 멍하니 내다보았다
노량진 어느 고시원 커튼이 침묵의 아가미를 닫고 돌아누웠다
얼마 전까지 노숙자였던 옆방의 중년이 초저녁부터 잠꼬대를 했다
낡은 벽이 충혈된 눈으로 그것들을 밤새 받아 적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