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이미지

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ISBN : 9791195163526
· 쪽수 : 208쪽
· 출판일 : 2014-10-21
책 소개
목차
심사평_ 성석제 009
런던의 안식월_당선작_ 005
작가의 말_이승민_160
감정_작가 자선 단편_167
작가 인터뷰_197
저자소개
책속에서
내가 호텔 안으로 들어가 체크인을 하는 동안 그는 차에서 여행 가방을 가져왔다. 10년 전 한국으로 돌아갈 때 들었던 낡은 트렁크였다. 데런은 진작 재활용 분리수거함으로 들어갔어야 할 녀석을 내려다보며 잠기는 게 신기할 정도라고 했다. 여기저기 긁히고 찌그러져 있는 트렁크는 나만큼 낡고 지친 행색이었다. 녀석에게 묻고 싶었다. 넌 이곳이 인혜와 함께 살았던 그곳이라는 게 믿겨지느냐고. 10년 만에 이곳을 다시 찾은 이유를 실감하겠느냐고. 덜덜거리며 돌아가는 바퀴에서 연신 쇳소리가 났다. 바보 같은 소리 그만하고 어서 구차스러운 가방으로서의 운명이나 끝내달라고 애원하는 것 같다. 이번에도 나는 외면한다. 아직 아니야. 조금만 더 기다려.
티베트인 시위에는 피켓을 들고 행진에 참여하기라도 했지만 동성 결혼 합법화 시위 때는 어쩔 수 없이 거리를 두고 따라가는 것이 전부였다. 쳰은 우리 사이에 놓인 거리가 자신들이 없애고자 하는 딱 그만큼의 거리라고 했다. 솔직히 드랙퀸이나 반라 차림도 이 거리감을 만드는 데 일조했다고 얘기하자 쳰은 제발 데런을 닮아가지 말라고 말했다.
런던에 온 목적이 조금씩 희미해질수록 두려움은 불쑥 더 거세게 고개를 들곤 했다. 그것은 이곳에 온 목적을 절대 잊지 말라는 경고 같았다. 시위대를 따라가는 동안이나 갤러리에서 쳰과 농담 섞인 대화를 주고받을 때, 혹은 데런과 향수 노트에 대해 얘기할 때는 별다른 감정이나 상념이 끼어들지 않았다. 데런은 두려움보다 외로움이 더 커지고 있는 것 같다고 진단했고, 쳰은 두려움이나 외로움 모두 이름만 다를 뿐 같은 의미라고 말했다.
그리고 아무 연락도 없었다. 결국 저울은 쳰이 보여주었던 희망적인 반응보다 냉소적이었던 데런의 반응 쪽으로 기울었다. 기다림이 두려움으로 옮겨가려 할 때마다 나는 비가 내렸다 그치기를 반복하는 런던 거리를 정처 없이 쏘다녔다. 밀레니엄 브리지에서 한 시간 동안 템스 강을 내려다보고 있는 나에게 경찰이 다가와 이것저것 물어보고 가기도 했다. 리치몬드 파크에서는 말없이 사슴을 바라보고 있던 나를 동네 주민이 신고했다. 같은 자리에서 한 시간 동안 사슴을 구경한 사람이 내가 처음이라는 게 신고 이유였다. 다행히 런던 경찰은 친절했고 상대방의 이야기를 차분히 들어준 후 내가 타인의 의심을 살 만한 행동을 했다는 것을 이해시켰다. 다음부터는 한 시간 동안 사슴을 보지 말라는 이상한 당부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