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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판타지/환상문학 > 외국판타지/환상소설
· ISBN : 9791198556080
· 쪽수 : 184쪽
· 출판일 : 2026-09-28
책 소개
책속에서
《잠자는 숲속의 공주》는 어느 면으로 보나 단연 최악의 동화다.
이 동화에서는 어떤 방향성이나 도덕성도 찾아볼 수 없고 맹목적인 남성들의 우월주의만 들끓는다. 페미니스트들이 민간 설화에 나타나는 여성의 수동성을 말할 때 흔히 거론하는 대표적인 동화이기도 하다(“절정으로 치닫는데도 미녀는 줄곧 잠만 잤다”고 내가 좋아했던 젠더학 교수님은 말했다. “두 가지 의미로 말이지”). 《제저벨》지는 디즈니 영화 역사상 ‘가장 구시대적인’ 작품으로 〈잠자는 숲속의 공주〉를 꼽았는데, 〈인어 공주〉가 버젓이 존재하는 세상인 걸 감안하면 의미심장한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인어 공주〉에서 에리얼은 남자를 위해 자기 목소리를 포기했지만, 〈잠자는 숲속의 공주〉의 오로라는 애초에 목소리를 거의 내지 않는다. 오로라가 자기 영화에서 내뱉은 대사는 딱 열여덟 줄로, 왕자나 악당은 물론이려니와 대모 요정들보다도 분량이 적다.
심지어 민속학을 전공한 다른 너드들 중에서도 《잠자는 숲속의 공주》를 가장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로맨틱한 여자들은 《미녀와 야수》를 좋아하고, 평범한 여자들은 《신데렐라》를 좋아하고, 고스 타입의 여자들은 《백설 공주》를 좋아한다.
《잠자는 숲속의 공주》를 좋아하는 건 죽어가는 여자들 밖에 없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당연하지. 일어날 리가. 이건 먼지가 풀풀 나는 버려진 감시탑 안의 고물일 뿐이고, 피가 날 만큼 날카롭지도 않다. 나는 그저 지지리도 운이 없어 따분하게 죽어가는 여자일 뿐이고, 둘 다 특별할 게 하나도 없다.
나는 살짝 꼬인 눈으로 물렛가락의 뾰족한 쇠침을 내려다본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래컴의 그림에서 본 비련의 금발 머리 여인이 떠오른다. 저주의 그늘 아래에서 성장하는 건 어떤 느낌이었을까. 자기에게 주어진 그 이야기가 얼마나 증오스러웠을까. 그의 증오심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결국 공주는 물렛가락을 향해 손가락을 뻗었고 이야기의 그 잔인한 굴레를 벗어나기엔 무력했으니까.
샴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온다. “맙소사, 진.”
나도 모르게 손가락으로 물렛가락 끝을 꾹 누르고 있다. 침이 말랑말랑한 살 속을 파고든다. 내려다보니 손끝에서 빨간 눈물방울이 하나 맺힌다.
그러고는 정말 무슨 일이 생겨버렸다.
나는 공주님에게 환한 미소를 짓는다. 공주님의 완벽한 이마에 가느다란 주름이 두 줄 생긴다. “이름이 뭐야?” 내가 묻는다.
공주가 턱을 아주 살짝 치켜든다. “난 페르스포 레스트의 프림로즈 공주. 그러는 너는 누구니?” ‘넌’에서 우쭐거리는 기색이 감지된다. 말끝에 ‘시골뜨기’라는 말을 덧붙이고 싶은 눈치다.
저주를 잣는 물레를 부수고 저주를 잣는 물레를 부수고 저주를 잣는 물레를 부수고 저주를 잣는 물레를 부수고 저주를 잣는 물레를 부수고 저주를 잣는 물레를 부수고 저주를 잣는 물
“지니아 그레이. 음, 오하이오에서 왔어.” 나는 시선을 휴대전화로 돌려 문자를 보낸다.
무슨 프림로즈인가 등신인가 하는 공주라는데.
야, 그 물레 어디서 샀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