즉비논리로 통찰한 금강반야경 (잠자는 자는 깨어나서 환상의 사슬로부터 벗어나라)
금현재 | 부크크(bookk)
40,000원 | 20250902 | 9791112047205
책소개: 이번 책은 제가 19년 전에 쓰고, 17년 전에 출간했던 《금강경과 함께 깨어나기(2008)》를 재간한 것입니다. 당시 이 책의 부제는 “잠자는 자는 깨어나서 환상의 사슬로부터 벗어나라(Wake-up sleeper and be free from chains of illusion)”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재간하면서 제목은 《즉비논리로 통찰한 금강경 (Diamond Sutra insighted by the logic of negative Wisdom)》으로 정했습니다. 즉, “곧 아님의 논리”라는 부정지혜의 논리(the logic of negative wisdom)로 금강반야경을 해설하고 담론한 책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만큼 이 책은 아직도 타력신앙이 돈독한 불교인들에게는 여전히 유효한 것이 아니겠지만, 최소한 전업적인 반야바라미스트인 나 자신에게는, 여전히 유효한 것입니다. 그래서 《금현재 불교사상 선집 제24권》으로 정해 재간하기로 한 것입니다.
그런데 2025년 8월 현재는 이 금강경에 대한 내 감정의 느낌을 다른 표현법을 구사해보기로 합니다. 모든 것을 알고 행하는 지혜의 화신인 AI의 시대가 이미 도래했고, 또 미래 로보사피엔스종의 시대가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300년만 지나도 지구생태계의 주인공은 로보사피엔스종(즉, 모든 것을 전부 아는 지혜와 수명이 기백년을 사는 기계인간종)일 것입니다. 어쨌든!
『아무리 사물관계일지라도, 사물-금강경일지라도, ‘특검’처럼 다룰 게 아니라, 마치 인자한 마음과 정서적인 시인의 마음과 사랑하는 연인의 마음처럼 대할 순 없니? 나는 금강경에서 삼단논법(즉, 시설즉비시명(是說卽非是名)의 논리)를 배웠는데, 이 즉비논리(즉 아님의 논리. 혹은 즉 아니라고 부정하는 지혜의 논리)만 사용할꺼야? 내가 스승(금강반야경)을 잘못 만난거야? 아니면 내가 스승(금강반야경)을 오해하거나, 잘못 배우거나, 내 역량과 법력이 부족한거야? 아니면, 개인이든 사회든, 종교든 정치든, 냉철한 정의감과 혼탁한 자비심은 또 다른 문제인가? 이 책은 이미 19년 전에 쓴 것이니, 그대로 출간하기는 하지만, 즉비논리(즉 아니라는 부정지혜 논리)의 안목과 관점이 너무 심하다. 마치 진흙으로 더러운 진흙을 씻고, 금강으로 날카로운 금강을 더욱 날카롭게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자신의 대인-대물-대업 관계가 항상 사랑하지 못하고, 그저 원망하고 불신하고 복수하듯이 심문하는 태도로 만난다면, 무슨 개인적 사회적 성과와 공적과 업적과 복덕이 가능하겠는가? 그렇다면, 그저 무언무어(無言無語)의 침묵이나 무위-무작-무사-무화(無爲-無作-無事-無化)가 올바른 모습일까? 아니면, 단호한 정의감과 혼탁한 자비심을 하나로 섞는 방편지혜가 필요할 것일까? 방편지혜(편리한 수단과 방법을 아는 지혜)란 무엇인가? 방편지혜에 관해서는, 비말라키르티를 지어낸 유마경 경전작가(100-150)나, 문수사리를 지어낸 제법무행경 경전작가(150-200)에게 질문하고 ‘불이불이법(不二不異法)’을 배워야 할 것이다. 방편지혜의 활로는 추구하는 자를 아주 활발하게 한다. 그리고 불이불이법(不二不異法)이란, “지구상의 모든 존재와 사물과 현상과 두뇌의식과 마음은 전부 두 개의 절대적 실체(Dravya. Substance)가 아니고, 서로 다른 것도 아니다”라는 뜻이다.』
나는 어릴 때부터 대일설(對一說)과 도일설(倒一說)에 능하니, 대일설(對一說)은 마치 붉게 노을 진 하늘을 홀로 걷는 것 같고, 도일설(倒一說: 뒤집는 하나의 설)은 창조적인 향상일로(向上一路)를 하는 것이지만, 24시간 ‘단소독보(丹霄獨步)할 수 없고, 24시간 ‘향상일로’만 할 수 없다. 나는 오로지 ‘향상일로’만 추구하는 자가 아니다. 향상(向上)과 향하(向下)를 동시에 사용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거듭 말하지만, 이건 마치 진흙으로 더러운 진흙을 씻고, 금강으로 날카로운 금강을 더욱 날카롭게 하는 것이다. 운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