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케이드 프로젝트 2014-2020 비평 일기
조재룡 | 파란
27,000원 | 20210810 | 9791187756972
시인이 될 것 심지어 산문으로도
이 책은 좀 두껍습니다. 520쪽이나 됩니다. 그렇긴 하지만 책 두께 때문에 미리 겁을 먹거나 지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 책은 첫 쪽부터 차근차근 읽어도 되지만 마음 내키는 대로 아무 데나 펼쳐 읽어도 되고 그러다 훌쩍 건너뛰어 읽어도 상관없기 때문입니다. 실은 그래도 되는 책입니다. 메모를 모은 책이니까요. 〈아케이드 프로젝트 2014-2020 비평 일기〉라는 좀 긴 제목을 단 이 책은 조재룡 평론가가 페이스북에 칠 년 동안 적은 비교적 짧은 글들을 일자순으로 묶은 것입니다. 이 책에 실린 글들은, 예컨대 “비 오는 밤, 산책하러 나가기 위한 필수 조건” 여섯 가지라든지, “자주 확인하게 되는 진부하면서도 놀라운 열 가지 사실들” 세 묶음, “원고 늦게 주기로 유명한 분들, 베스트멤버 10인”의 명단과 공포스럽다 못해 가히 경이롭기까지 한 그들의 유유자적함, ‘요술 공주 밍키, 모래 요정 바람돌이, 엄마 찾아 삼만리, 황금박쥐’ 등 “어린 시절 보았던 만화영화 주제가” 목록, ‘포수형, 스나이퍼형, 산고형, 추적 탐사형, 차후 반성형’ 등 “평론가의 유형에 관한 하나 마나 한 고찰”, 매번 실패할 걸 뻔히 알면서도 굳은 마음으로 적곤 하는 새해의 결심들, “인공지능-나/나-인공지능”이 시도한 무작정 글쓰기, 그리고 대학 강의안 초안과 그 진행 과정, 로베르 데스노스와 레몽 크노의 시 번역 초안과 그 노트, 시와 소설과 무협지와 망가와 애니메이션과 영화에 대한 독서 노트 등 유쾌하고 재미있는 내용들로 가득합니다. 물론 앞에 적은 항목들은 이 책의 백 분의 일도 되지 않습니다. 결코 과장이 아닙니다. 무려 칠 년 동안 쓴 글들을 모은 책이니까요. 아니 그보다 이 책을 펴낸 조재룡 평론가는 현재 한국에서 가장 섬세하고 유려한 문장을 쓰는 비평가이자 철두철미한 번역가이고 또한 불문학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이 책의 대부분은 문학 그중에 특히 시를 읽고 글을 쓰고 번역을 하고 공부를 하는 사람의 고통과 절망과 분노와 희열과 반성과 고백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책은 페이스북에 게재한 짧은 글들을 모은 것이지만, 그 모든 글들은 번뜩이는 사유가 탄생하고 익사이팅한 비평이 개시되는 순간이자 장소입니다. 예컨대 이렇게 말입니다: “시는 말을 다급하게 말아 쥐고 속절없이 무너질 때 빛난다. 말의 힘을 부리는 능력에서 한발 양보하면 시는 그것으로 끝이다. 꽃피울 수 없는 바위 위에서 전개하는 이 싸움은, 결구를 예견할 수 없으며, 삶을 정화하는 데는 실패하지만, 우리를 빈손으로 살게 하지 않는다. 난해하다고 알려져 푸대접을 받았던 시의 낱말들을 헤아리고, 문장의 조직과 움직임을 움켜쥐려 몇 시간 골몰히 파다 보면, 결국 시에서 무언가를 배우는 것은 나, 비평가라는 결론에 다다르게 된다. 이때 이상한 환희가 행간에서 솟아오른다. 길은 항상 막다른 골목에서 열린다.” 맞습니다. 이 책의 모든 페이지들은 도무지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을, 그러나 결국 무언가를 배우는, 그리하여 “이상한 환희”가 솟아오르는 “막다른 골목”들인 셈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시’입니다. “시인이 될 것 심지어 산문으로도”라는 보들레르의 말을 조재룡 평론가는 이 책을 통해 실천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