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과 국제정치, 승자의 역사기록, 태조 이성계의 역성혁명
조선왕조실록(탁양현 엮음) | 퍼플
10,100원 | 20180901 | 9788924056969
歷史的 史實과 實際的 事實
歷史에 대한 대표적인 誤解 중 하나가, 역사는 분명한 사실의 기록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나름대로 公證되었다는 歷史書에 기록된 것이라면, 眞實(truth)로서 결정되어진다. 그런데 역사는 史實(historical fact)의 기록이며, 事實(fact)의 기록인 것은 아니다.
實狀, 事實을 기록한다는 일은 物理的으로 불가능하다. 21세기 첨단의 시대라고 해도 그러하다. 현대사회는 과학기술의 발전에 힘입어, 온갖 기록매체가 이용되고 있다. 그리고 記錄者의 樣相도 아주 다양하다. 이제 역사 기록은 전문적인 歷史家들만의 專有物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도 발생한 역사적 事件 全部를 기록한다는 것은 不可하다.
예컨대, 한 개인의 日常이나 日記를 살피더라도, 하루 중 자기에게 의미와 가치를 지니는 인상적인 사실만이 기억되거나 기록될 따름이다. 더욱이 하루 중 대부분의 상황은, 아주 인상적인 사건을 제외한 日常事들은 며칠만 지나더라도 망각되어버린다. 그저 取捨選擇된 것이 기록될 따름인 것이다.
集團의 역사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史實은 기본적으로 역사적으로 기록될 만한 의미나 가치를 지닌 것이어야 한다. 그런 것이 史實이다. 그러한 과정에서, 역사는 勝子와 强者에 의해 기록되기 마련이다. 그러니 대부분의 역사 기록자는 승자 혹은 강자이다. 물론 패배한 敗子로서, 패배의 痛恨을 기록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역사서들은, 자칫 歪曲되거나 逸失되어버리기 십상이다.
예컨대, 필자의 경우에도, 지난날 철학과 대학원에서 십수 년을 지냈지만, 그 세월동안에 딱히 기억되는 일은, 집단적 下剋上에 의해, 하릴없이 벼랑 끝으로 내몰리던, 필자의 씁쓸한 상황 뿐이다. 당시 필자에게 집단적으로 폭력적 비난을 쏟아붓던 자들은, 당시의 사태가 이미 의미없이 망각되어버렸거나, 失笑를 날리며 지난날 지극히 稚氣어린 짓거리였다고 회상될 것이다.
하지만 필자로서는, 인생의 방향성을 바꾸어버린 侮辱이었으며 羞恥였다. 물론 당시에 필자가, 다소 집단의 구미에 맞지 않는 言行을 하여, 빌미를 제공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自稱 他稱 대한민국 最高의 지식집단이라는 곳에서, 그처럼 천박하고 유치한 체험을 해야만 했던 필자로서는, 당최 당시의 기억이 망각되지 않는다.
그리고 당시 유독 앞장서서 온갖 천박한 말을 지껄여대던 자들은, 이후 대학이나 연구소에 임용된 것 같지도 않고, 지금은 어디에서도 소식을 알 길 없다. 그저 우둔하여 교수나 동료들의 부추김으로 앞세워졌지만, 결국 부질없는 소모품으로 전락해버린 듯하다. 흔히 裏面의 진실을 알지 못하는 대중들을 개돼지라고 卑下하는데, 그들의 꼴이야말로, 한순간 이용된 후 兎死狗烹되어버린, 개돼지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인상적인 사건은, 이제 필자에게는 하나의 歷史的 史實이 되었다. 혹여, 그런 집단적 상황을 체험해보지 않았다면, 설마 그럴까 하며 의아해 할는지 모른다. 그런데 ‘가방끈 길이’가 제아무리 길더라도, 인간존재의 행태는 별다르지 않다. 汝矣島 國會議事堂에 모인 자들이, 가방끈이 짧아서, 三尺童子도 하지 않을 그런 천박하고 유치한 짓거리를 恣行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래서인지 우연찮게 잔뜩 먹물 들어버린 필자의 신세가, 자꾸만 조선왕조의 雜多한 黨爭의 상황 따위에 오버랩되었던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닌 듯하다. 역사는 진실된 것도 아니고, 선한 것도 아니며, 아름다운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역사를 美化하려는 움직임이 있다. 이는 매우 그릇된 것이다.
이 글을 읽는 그대의 삶은 어떠한가. 아주 진실되고 선하며 아름다운가. 살다본면 온갖 거짓과 악함과 추함이 발생하기 마련이다. 그대의 삶이 행복만 가득한 천국과 같은 것이던가. 그래서 인생이란 派瀾苦海를 표류하는 일이라고 하지 않던가. 역사는 어떠한 경우에도 왜곡되어서는 안 된다. 그런데 나쁜 의도에서 역사를 일그러뜨리는 일도 왜곡이지만, 좋은 의도라면서 역사를 꾸며대는 일 역시 왜곡임을 유념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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