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영광림 (말레이시아 거리의 타이포그래피 풍경)
후루프, 탄 수에 리, 로 씬 인, 탄 즈 하오, 팜 카이-청 | 소장각
22,500원 | 20241115 | 9791198252067
“타이포그래피는 우리 모두의 것이다.”
일상에 스민 친숙하기에 더 특별한 글자들,
우리의 삶만큼이나 다채롭게 빛나는 거리의 타이포그래피를 찾아서
낯선 나라에 도착해, 낯선 도시의 거리 속으로 첫발을 내디뎠다고 상상해보자. 우리가 익숙한 풍경에서 벗어나 정말 타국에 왔음을 절감하게 해주는 것은 생경한 얼굴들과 건물들, 코끝에 닿는 색다른 공기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귓가에 들리는 낯선 언어와 거리 곳곳에서 마주하는 낯선 글자들일 것이다. 우리는 그제야, 언어가 의미와 기능을 벗고 순수한 형태와 디자인으로 존재할 때에야 비로소 우리의 일상이 얼마나 다채로운 글자들로 가득한지 깨닫게 된다. 하지만 너무 익숙해서 무심히 지나치기 쉬운 일상의 글자들을 애정 어린 시선으로 관찰하고, 그 안에 담긴 누군가의 정성과 헌신, 빛나는 개성과 창의성의 가치를 포착해내는 이들도 있다. 2017년에 설립된 말레이시아의 타이포그래피 및 디자인 콜렉티브인 후루프(huruf, '글자'라는 뜻의 말레이어)는 일상적인 타이포그래피의 전통과 말레이시아의 다국어 문화를 탐구하고 그에 대한 인식을 제고하기 위해 힘써왔다. 『환영광림: 말레이시아 거리의 타이포그래피 풍경』은 이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후루프의 디자이너와 예술가 여섯 명이 말레이시아의 거리를 수놓은 타이포그래피의 가치와 의의를 역사적, 기술적, 개인사적 차원에서 다층적으로 조망한 책이다. 특히 표준화되고 획일화된 형태의 타이포그래피보다 주변 환경이나 시대의 흐름과 상호작용 하며 변화하는 창의적이고 개성 있는 디자인에 초점을 맞추어 간판, 표지판, 차량 라벨 등을 아우르는 다양한 종류의 타이포그래피를 소개한다. 이 책에서 우리가 목격하는 것은 그저 거리 곳곳에 생기 없이 박제된 글자들이 아니라, 탄생하고 성장하고 때로는 소멸하기도 하는, 우리 자신의 삶을 닮은 역동적인 글자들이다.
총 다섯 장(章)으로 구성된 이 책에는 제각기 다른 색깔과 질감을 지닌 글자들처럼 타이포그래피를 이해하는 독창적인 시각들이 담겨 있다. 탄 즈 하오의 「다국어 문화와 그 난점들」은 말레이시아에 말레이어, 영어, 중국어, 하카어, 타밀어를 비롯해 다양한 언어가 공존하게 된 역사적 배경과 다언어 표기가 타이포그래피와 텍스트의 레이아웃에 미치는 영향, 언어 간의 위계 등을 풍부한 사례와 함께 탐구한다. 탄 수에 리와 루이 리 웨이 이의 「간판 제작의 관습과 발전」은 말레이시아 거리 풍경을 이루는 핵심이라 할 수 있는 간판의 여러 가지 제작 방식과 시대에 따른 변천 양상을 상세히 소개한다. 석조, 목조를 비롯해 콘크리트, 플라스틱, 아크릴, 손 글씨에 이르기까지 간판을 제작하는 각종 기법과 재료에 대한 정보와 함께, 각 방식이 글자의 형태와 쓰임에 미치는 흥미로운 영향을 살펴볼 수 있다. 팜 카이-청의 「사람을 위한 타이포그래피: 통 유 상의 삶과 작업」은 저자가 말레이시아 파항의 작은 마을인 벤통에서 만난 독창적인 간판 화가이자 서예가 통 유 상에 관한 이야기다. 역사적 격동 속에서 대만, 홍콩, 말레이시아를 오가며 아름다운 글자를 쓰는 데 평생을 바쳐온 그의 삶은 타이포그래피에 단순히 미적인 아름다움뿐 아니라 그 작품을 탄생시킨 예술가의 삶과 철학 역시 담겨 있음을 보여준다. 로 씬 인의 「달리는 글자들: 상용차 라벨」은 법적으로 상업용 차량에 반드시 부착해야 하는 정보성 라벨을 만드는 사인라이터(signwriter)의 세계를 다룬다. 저자는 실제로 활동하는 여러 사인라이터를 직접 만나 이 특수한 직업을 택하게 된 배경과 고유한 작업 방식, 즐겨 쓰는 필기도구 등에 대해 조사하고 예술가와 직업인 사이의 경계를 탐구한다. 마지막으로 데이비드 호 밍 안의 「일상의 문자들: 버내큘러 타이포그래피와 그 미덕」은 전문적인 디자이너가 아니라 일반 대중이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탄생시킨 토착적 디자인을 가리키는 '버내큘러(vernacular)' 타이포그래피를 소개하고 그러한 '비전문적' 디자인이 지닌 예측 불가능한 매력과 창의적 가치를 강조한다. 다년간의 경험과 꼼꼼한 자료 조사를 통해 쌓인 지식과 통찰이 빼곡히 담긴 이 책을 길잡이 삼아 말레이시아의 거리를 걷다보면, 눈앞에 이국의 풍경이 펼쳐지는 것 같은 생생한 실감과 더불어 지금 이 순간 우리 주변에서 빛나고 있는 낯익은 글자들 역시 새로운 눈으로 보게 될 것이다.
歡迎光臨, Selamat Datang, Welcome……
다양한 언어가 어우러진 말레이시아의
만화경 같은 풍경 속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인도양과 태평양을 연결하는 통로에 위치한 말레이시아는 활발한 교역과 이주, 그리고 영국 식민주의의 역사를 거치며 다양한 언어를 사용하는 여러 민족이 함께 어우러져 살아왔다. 그로 인해 말레이시아 거리의 간판에는 보통 말레이어, 중국어, 영어 등 여러 언어가 함께 담겨 있다. 이런 다국어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이 책에는 저자들이 현지에서 직접 촬영한 풍부한 사진 자료가 수록되어 있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마주치는 각양각색의 도판들과 더불어, 표지와 본문 디자인 또한 말레이시아의 다국어 간판을 연상시키도록 구성하여 시각적인 재미를 선사한다.
현실의 굴곡을 따라 자유롭게 유영하는 일상적 타이포그래피의 미학
저자들이 주목하는 타이포그래피는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디자이너가 디자인 프로그램으로 오차 없이 완벽하게 설계한 글자들이 아니다. 직접 손으로 그리고 만드는, 그렇기에 균일하지도 표준화되지도 않은 글자들, 가상의 디지털 공간이 아닌 현실에서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글자들이다. 심지어 길거리의 플라스틱 도로 분리대 표면에 마커로 삐뚤빼뚤하게 적어놓은 안내문마저 흥미로운 레이아웃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탐구 대상이 된다. 누군가는 그저 '낙서'로 치부할 일상의 문자들을 포용함으로써 타이포그래피의 세계는 훨씬 더 넓고 흥미진진해진다. 그리고 그 세계의 문은 우리 모두를 향해 활짝 열린다.
현장의 생기와 사람의 온기로 가득한 친근하고 따뜻한 르포르타주
『환영광림: 말레이시아 거리의 타이포그래피 풍경』에 담긴 타이포그래피에 대한 논의는 미학적인 이론에만 머무르지 않고, 실제로 글자들이 살고 있는 거리의 한복판으로, 글자를 만드는 장인들이 일하는 작업장으로, 재치 있는 손 글씨 간판이 걸린 가판대로 독자들을 이끈다. 그런 현장 속에서 타이포그래피는 시각예술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누군가의 생계이고 노동이며 삶이다. 저자들이 다루는 주제는 다양하지만 다섯 편의 글을 관통하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그건 바로 글자 뒤에 있는 '사람들'을 잊지 않는다는 것이다. 현장에서 그들의 목소리를 듣고, 기록하고, 기억하기 위해 엮어낸 이 책의 생생함과 다채로움은 그 자체로 저자들이 지향하는 타이포그래피의 미학을 닮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