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정에 대하여 (분노, 공포, 애도, 수치 … 감정의 지리학)
필립 피셔 | 앨피
18,000원 | 20231010 | 9791192647203
문학과 인간 내면에 대한 독창적인 고찰
열정이란 무엇이고 어떤 작용을 하는가?
서양 지성사에서 가장 오랫동안 이어진 복잡하고 필수적인 문제인 열정의 의미와 작용을 본격 고찰한 책. 미국문학계의 거목으로 하버드대학 영문과 펠리체 크라울 리드 석좌교수인 저자는 철학과 문학, 미학의 교차점에서 인간의 근원적인 감정에 관한 세밀한 지리학을 구축한다.
저자는 말한다. “강한 감정이나 열정은 어떤 인지 가능한 세계를 만들고, 이 세계는 열정적인 또는 격렬한 상태를 경험하는 순간에만 나타나는 구분선으로 만들어진다.” 그래서 이 책이 다루는 열정은 크게 분노/공포/애도/수치의 네 가지 범주로 구획된다. 슬픔과 기쁨, 놀라움과 동요, 굴욕과 실망, 감격과 기대, 불안과 당황, 안타까움과 우울 등 우리가 일상에서 느끼는 다양한 감정들은 이 네 범주에 귀속되거나, 엄밀히 말해 이 책이 말하는 ‘열정’이 아니다. 열정은 우리 경험의 유일무이한 단독성이기 때문이다. 열정은 사회도 망각하고 미래도 망각하는 철저한 몰입 상태이기 때문이다.
문학의 관점에서 철학을 비판하다
저자의 가장 중요한 저작으로 꼽히는 이 책에서, 피셔는 아리스토텔레스ㆍ스토아학파 등 서양 고대철학과 흄ㆍ스피노자ㆍ칸트 등 서양 근세철학은 물론이고 키르케고르와 하이데거, 현대 합리적 선택이론과 법률 사상 등을 두루 섭렵하며 호메로스의 《일리아드》, 셰익스피어의 《리어왕》과 《로미오와 줄리엣》, 멜빌의 《모비 딕》을 새롭고 흥미진진하게 해석한다. 이 책이 다른 문학 이론서와 다른 것은, 철학으로 문학을 읽는다기보다는 문학의 관점에서 철학을 비판한다는 점이다. 피셔에 따르면, 분노ㆍ공포ㆍ애도ㆍ수치 등 격렬한 열정은 수천 년 동안 서양철학이 지속적으로 다스리고 억누르려고 했던, 인간의 불완전성을 드러내는 불순하고 불필요한 감정들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감정들이다. 철학이 열정을 다스리려다 실패했다면, 문학은 오히려 이 열정의 분출과 폭발을 표현하려 했다. 왜 그런가?
열정 없는 문학, 열정 없는 삶이란
문학은 경험을 표현하는 방식이며, 열정을 경유하지 않고는 경험을 표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열정이 없다면 문학은 존재할 수 없다. 격정에 빠진 인물들이 없었다면, 모욕에 분노하고 상실을 애도하는 아킬레우스와 리어왕, 격렬한 사랑에 빠진 로미오와 줄리엣, 살인적인 질투에 사로잡힌 오셀로, 모비 딕에게 다리를 잃고 분노하는 에이햅이 없었다면, 세계문학의 고전들을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공포와 연민이라는 격정의 상태 없이 그리스 비극을 생각할 수 있을까? 때로는 특정한 열정을 기반으로 문학 장르 전체가 결정되기도 한다. 슬픔은 비가elegy를, 공포는 고딕소설을, 동정과 연민은 감상소설을 낳았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노예 아닌 ‘자유인’, 피셔가 말한 ‘공유된 공포’에 기반한 연민을 느끼는 인간이라면 이 책을 읽으며 몇 번이고 분노와 공포, 애도와 수치 … 이른바 열정을 경험할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