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시의 장소성
고봉준, 김응교, 박현수, 방민호, 손종업 | 경진출판
18,000원 | 20250930 | 9791193985991
시인에게 장소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이 책에는 한국 현대시가 장소와 어떻게 교호하고 장소성을 만들어냈는지 읽어내는 글 10편이 실려 있다. 총 4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1부는 식민지 시기 카프 시, 모더니즘 시, 그리고 일제 말기 시 속의 장소를 알아보는 글들이 실려 있다. 2부는 해방 이후 산업화 시기(1980년대)의 현대시와 장소를 알아보는 글들로, 1950년대의 김수영, 청계천의 심상지리, 1980년대 노동시에서의 장소 등에 대한 글들이 실려 있다. 3부는 1990년대에서 현재까지의 시와 장소 문제를 유하와 진은영 시를 통해 살펴본 글들이, 마지막으로 4부는 기형도 시의 출발과 장소의 관계, 시인들의 묘지 탐구에 대한 글들이 실려 있다.
1부는 일제 강점기의 근대 도시화와 관련된 한국 현대시의 장소성 창출 시도를 살펴보는 글들로 이루어져 있다. 첫 글은 선문대학교 ‘문학이후연구소’ 전임연구원인 이성혁의 〈카프의 ‘프로시’에 나타난 경성 ‘거리’의 장소성〉이다. 이성혁은 식민지 조선의 수도인 경성에 본격적인 근대화가 이루어지는 1920년대 중반, 이와 함께 ‘프롤레타리아 시’도 함께 등장했음을 조명한다. 도시의 근대화는 도시의 스펙터클화와 함께 이루어지는데, 이 스펙터클화의 이면에는 농촌에서 올라온 가난한 프롤레타리아의 삶이 있었으며, 이들과 연대하고자 하는 ‘카프’의 시인들은 그 이면을 격렬한 언어로 드러냈음을 이 글은 밝히려고 한다. 다음 글은 박현수 교수의 〈1930년대 모더니즘 시와 도시〉이다. 이 글은 모더니즘 문학이 단순한 기술의 문학이 아니라 근대 도시의 정신이 압축되어 있음을 밝히고 1930년대 모더니즘 시 작품과 도시의 특성이 어떻게 연관되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보고 있다. 특히 경성의 백화점이 당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었는지 밝히면서 이 백화점에 대결하고자 한 이상의 시에 주목하고, 나아가 지방 도시의 풍경이 어떻게 시화(詩化)되었는지 논한다. 1부 세 번째 글인 이경수 교수의 〈비애의 도시와 침묵의 자연〉은 일제 말기 시를 살펴볼 때 이 시대는 장소를 상실한 시대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면서 글을 시작한다. 이경수는 파시즘 정국 속에서 시인들은 지독한 상실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으며, 이 감각은 시에 반영되어 있다는 점을 오장환과 정지용, 윤동주 시를 횡단하며 논한다. 특히 만주의 공중목욕탕에서, 백석 시인은 연민과 연대의 시선을 획득하고 헤테로피아를 발견하고 있다는 점이 눈에 띈다.
2부는 해방 이후 한국전쟁을 거쳐 제도적 민주화가 이루어지는 1987년까지 기간의 시편들에 나타난 장소성을 살펴보는 글들로 이루어 있다. 2부의 첫 글은 이성혁 연구원의 〈해방과 전쟁 직후 거리의 시적 재발견〉은 김수영 시를 중심으로 해방과 한국 전쟁 직후 거리가 어떻게 시로 전유되어 장소화 되었는지 살펴보는 글이다. 김수영의 거리 연작은 전쟁으로 온갖 고난을 겪은 시인 자신의 주체성을 세우는 장소로 거리를 부활시키고 있으며, 이는 거리 공간을 다시 시인 자신의 장소로 전화시키는 것으로 나아간다. 2부 다음 글인 방민호 교수의 글 〈청계천의 ‘심상지리’를 찾아〉는 ‘청계천’이라는 장소에 초점을 맞추어 한국문학이 이 장소로부터 어떠한 영감을 받고 이곳을 문학화했는지 살펴보고 있다. 전태일의 죽음 이후, 현재 복개를 걷어낸 청계천 옆 청계천로를 걷는 일은 “노동문제를 ‘삶과 죽음’에 비추어 사유하는 길”이 되었으며 또 되어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청계천을 주인공으로 삼은 이 글은, 청계천이 “서울을 ‘물의 도시’로 존재하게 해주는 생명의 물길”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끝을 맺고 있다. 2부 세 번째 글인 고봉준 교수의 〈자본의 도시에서 노동의 도시로〉는 1980년대 성장한 ‘노동시’의 도시 형상화로부터 한국의 고도성장에 희생된 노동자의 삶을 조명하는 글이다. 1970~80년대에 걸친 군사독재 아래 경제는 고도 성장했지만 그 성장은 노동자의 저임금 장시간 노동에 따른 것이었으며, 이에 노동자의 저항 역시 점차 성장해나갔다고 고봉준은 설명한다. 특히 그는 1980년대 중반 이후 한국 노동시는 투쟁적이고 혁명적인 방향으로 나아갔다는 점에 대해 서술한다. 이때의 노동시는 노동자의 고통을 드러내기보다는 노동해방을 쟁취하려는 방향으로 나아갔다고 한다.
3부는 1987년 ‘6.10 항쟁’ 이후 제도적 민주화가 정착된 후 한국시에 나타난 공간 인식과 장소성의 창출에 대해 살펴본 두 편의 글이 실려 있다. 1987년 이후의 한국 사회의 제도적 기반은 지금도 지속되고 있어서 이 두 편의 글은 그 현재성이 더욱 짙다고 할 수 있다. 첫 번째 글은 ‘문학이후연구소’ 전임연구원 이정현의 〈환멸을 통과하는 산책자의 슬픔〉이다. 이 글은 1990년대 시대상을 잘 보여준 시인으로 평가받는 유하의 시편들을 살펴보고 있다. 특히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는 1980년대와는 달리 소비문화가 정착한 90년대의 사회상을 풍자적으로 보여주는 시집이다. 저자는 2000년에 출간된 유하의 ≪천일마화≫에서의 경마장이 “질주만이 미덕인 세계”를 상징한다는 점에 주목하고, 이에 유하는 “다른 방식으로 세계의 속도에 저항하고자” 했다는 점을 드러낸다. 다음 글인 최진석 교수의 〈시와 정치의 아토포스〉는, 2000년대 활발하게 활동하고 지금도 역시 활발하게 시를 쓰고 있는 진은영 시를 살펴본다. 진은영이 제시했던 ‘아토포스’ 개념을 그는 갖고 온다. 아토포스는 토포스(장소)의 부재를 의미하지만, 한편으로 그것은 “특정한 시점에 특정하게 자리 놓여진 인간과 사물의 얽힌 관계가 들어서는 곳”을 의미해서 특정한 “장소 바깥의 장소”를 뜻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토포스의 시는 정치와 만나면서 토포스의 피와 살을 갖게” 되며, “사건의 장소는” “발화의 지향이 달라지고 듣고자 하는 자세를 바꿀 때마다 새롭게 펼쳐지는 지평의 개방”이라는 저자의 결론이다.
4부는 시인이 처음 겪었던 장소와 마지막으로 머무는 장소에 대한 에세이 두 편을 실었다. 시인의 최초 장소는 어디인가를 김응교 교수는 기형도 시를 통해 보여주고 있고, 시인이 마지막으로 머무는 장소인 묘지에 대한 사유를 손종업 교수는 보여주고 있다. 김응교 교수의 〈안개의 성역, 데부뚝 방죽 마을〉은 기형도 시인이 살았던 집에서부터 그의 등단작인 〈안개〉의 배경이 되는 ‘데부뚝 방죽 마을’의 모습과 분위기를 현장 답사를 통해 생생하게 보여주고, 이 기형도가 자란 장소가 어떻게 시에 녹아들어 있는지 논증하는 글이다. 이를 통해 저자는 “작품이 쓰여진 공간을 가봐야, 작품이 어떻게 탄생되었는지, 그 공간을 체험한 작가가 신체적 글쓰기로 쓴 단어 하나 하나가 몸으로 체험”된다고 결론짓는다. 4부 두 번째 글이자 이 책의 마지막 글은 ‘문학이후연구소’ 소장인 손종업 교수의 〈시인들의 묘지를 찾아서〉이다. 그는 ‘메멘토 모리’가 삶에서 가지는 중요성을 말하면서 시인들의 묘지가 어디에 있는지, 나아가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지 생각해보자고 제안한다. 그가 제안하는 것은, 실제로 시인들의 묘지를 사람들이 찾아가는 일은 쉽지 않으므로, 디지털 묘비명 콘텐츠를 만들자는 것이다(문학이후연구소는 현재 이 작업을 실행에 옮기고 있다). 이는 구체적으로 시인 묘지를 지도 위에 표시하고 관련 정보를 제공하는 식의 콘텐츠로 제작될 수 있다고 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