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오리 아니고 아오모리 (김연덕의 10월)
김연덕 | 난다
13,500원 | 20251001 | 9791194171935
2025년 난다의 시의적절, 그 열번째 이야기!
시인 김연덕이 매일매일 그러모은
10월의, 10월에 의한, 10월을 위한
단 한 권의 읽을거리
왠지 저는 너무 사랑하는 존재에게는 존대를 하고 싶어져요
최대한 말끝을 흐리며 긴 문장을 말하고 싶어집니다
2018년 대산대학문학상을 통해 등단한 김연덕 시인의 『아오리 아니고 아오모리』가 난다 시의적절 시리즈 10월 책으로 출간되었다. 10월은 애매하고 가볍고 아름다운 달. 3분기가 끝나고 한 해가 지나간다는 느낌을 주는 때이자 무엇이 시작되기 직전의 달. 한 해의 중간이라기엔 너무 많이 가버렸고, 끝이라기에는 아직 한 해의 이미지를 결정지을 수 있는 불확실한 달이 두 개나 남아 있는 때. 전반부를 마무리하고 후반부를 준비하는 어쩌면 새로운 시작, 하나의 꿈을 꾸고 다음 꿈을 위해 신체를 텅 비워야 하는 시간이 10월 아닐까 시인은 묻는다. 연덕 시인은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은 10월과 별다른 연이 없었기에 제각각의 얼굴과 마음으로 돌출된 원고들을 묶기 위한 이미지가 하나 필요했다고 고백한다. 또렷하면서도 평범하고 부드러운 이미지. 손안에 들어와 쓰다듬거나 포장하거나 여러 조각으로 잘라버릴 수도 있지만 안쪽부터 구조를 살펴보면 자신보다 큰 몸집과 시간이 들어차 있는 이미지, 10월에 한창일 사과를. 시인에게 사과는 거실에 함께 앉아 먹다보면 방금 먹었다는 것을 잊어버릴 만큼 흔한 과일이지만 사과 한 알은 심장이고 세계 전체이기도 하다. 그렇게 시인은 혼슈 최북단에 위치한 현, 사과 산지로 유명한 아오모리로 떠난다. 흰색처럼 나른한 태도의 노인들, 삼림박물관의 창백한 빛과 항구 공원에서 바라보았던 끝없는 수평선, 모든 가게마다 붙어 있던 네부타 축제 포스터와 그 안에 담겨 있던 축제의 외롭고 화려한 불빛 등…… 복잡한 생물의 뼈처럼 오래된 사랑과 오래된 이야기가 많아 자신을 겸손하게 만드는 도시, 한자로 쓰면 푸른 숲이라는 뜻을 지닌 아오모리로.
시인은 공항에 착륙하기 전 십 분간 비행기 창문을 가득 메운, 가도가도 끝나지 않고 이어지는 숲을 내다본다. 나무들이 내는 소리가 조용한지 시끄러운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한 사람이 감각하기에는 너무나 커다란 광경이었던, 여러 이야기와 감정이 느껴지는 색을 본다. 들어본 적 없고 나와 언어도 통하지 않는 나무들이 표현하는 감정들이 시인의 몸을 치고 지나가는 것을 느끼며. 어쩌면 나는 기억하지 못하는 내 내밀한 부분들의 아주 옛날 부분이 아오모리에 산 적이 있는 건 아닐까. 나무들이 빼곡하고 조금만 걸어도 수평선이 보이는 골목이 있는 도시. 지금껏 여행했던 모든 도시 중 노인들이 가장 많이 돌아다니던 도시. 고요함이 도시를 감싸고 있지만 그것이 걷는 이의 걸음을 압도하지 않고 그저 가지각색으로 몸을 뻗는 나뭇잎과 푸른 잔영과 햇빛의 형태로 존재하는. 의도도 제안도 없는 자연 속에서 몸의 감각과 하늘의 감각에 집중하며 자유로워지는 곳.
모든 것을 구구절절 말하지는 않지만 하나로 뭉쳐져 있던 풍경에 상처를 내 풍경의 안쪽을, 그 안의 사람을 보게 하는 시. 그렇게 연덕 시인은 다른 온도의 색으로 이뤄진 자신의 각진 내면이 아오모리에서 하나의 빛 그림자로 떨어지는 모습을 지켜본다. 일상과 불화하거나 현실의 면면들에서 서걱거리는 나 자신의 모습들과 화해하게 해주는 품이 넓은 아오모리. 이쪽에서도 날것일 수밖에 없는 생생한 삶의 모습을 응시하게 했던,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나도 그리움 속에서 이 도시의 현재를 내내 걷고 있을 나를, 그대로 다시 사랑하게 된 화해의 시간을 경험한다. 시인은 아오모리를 말할 때면 최대한 말끝을 흐리며 긴 문장을 말하고 싶어진다고 쓴다. 이렇게 범위가 큰 대상을, 그러니까 도시 전체를 사람과 같이 사랑해본 적 있었나 물으면서. 시인은 이제 아오모리를 사랑하는 사람처럼, 미워하는 사람처럼 신경쓰게 되어버린 것이다. 아오모리가 자신에게 성큼 걸어올 일은 없을 테니까 언제나 성큼 걸어나가는 쪽은 자신일 것이라고. 만나고 있음에도 벌써 만나고 싶다고 생각하면서, 진짜인 사랑 속에 살아 있다고 느낄 제 모습을 그리며. “무엇이 시작되기 직전처럼, 1월 1일처럼 느껴지는 10월 1일에 그 장면을 다시 열어본다. 그렇게 나는 공항 문을 열고 나가보았다.”(「거울 앞의 숫자」)
아오모리, 그 푸른 숲 이야기
아오모리로 떠난 건 순전히 사과 때문이었다. 혼슈 최북단에 위치한 현, 그리고 사과 산지로 유명한 곳. 아오모리에 대해 아는 건 그런 것밖에 없었다. 아오모리에 가서 많은 사과를, 사과 이미지들을, 그것들 사이에 둘러싸여 있는 멍하고 귀여운 사람들을 보고 와야지 싶었다.
이미지. 아무리 생각해도 10월과 내가 별다른 연이 없었기 때문에, 흩어져 떨어지는 원고들을 묶기 위해서는 이미지가 하나 필요했다. 내 상상력의 빈약함을 상쇄시켜줄 만한 또렷하면서도 평범하고 부드러운 이미지가. 손안에 들어와 내가 쓰다듬거나 포장하거나 여러 조각으로 잘라버릴 수도 있지만, 안쪽부터 구조를 살펴보면 나보다 큰 몸집과 시간이 들어차 있는 그런 이미지가. 그러자 곧 붉은 사과의 이미지가 떠올랐다. 책이 출간될 10월에 한창일 사과. 사과는 심장 같고 지구 같고 세계 같지만 거실에 함께 앉아 먹다보면 방금 먹었다는 것을 잊어버릴 만큼 흔한 과일이다.
그렇게 간단한 생각으로 아오모리행 비행기표를 끊었다. 한국에 돌아오면 청송이나 예산, 문경 같은 다른 사과 산지들까지 돌아다녀볼 생각이었다. 이곳과 저곳의 사과가 어떻게 다르고 어떻게 비슷한지, 사과를 홍보하는 방식이나 과수원들이 나뉘고 모인 모양에 대해, 사과와 사람들의 마음이 얼마큼 연결되어 있는지 비교해볼 생각이었다. 제각각의 얼굴과 마음으로 돌출된 도시들을 나만의 이미지로 함부로 묶으려 했던 것이다.
사과로 이곳을 전부 파악해보겠다는, 계획적이고 어리석은 마음으로 아오모리로 떠났다. 그리고 그곳을 돌아다니며 나는 원고의 방향을 완전히 수정해야 함을 깨달았다.
青森. 아오모리를 한자로 쓰면 푸른 숲이라는 뜻이다. 아오모리 공항에 착륙하기 전 십 분간 비행기 창문을 가득 메운 빼곡한 숲이 보였다. 험준한 산세 사이사이 옛날 사람들처럼 서 있던 북쪽 나무들. 나는 몸의 방향을 창문 쪽으로 더 틀어 가도가도 끝나지 않고 이어지는 숲을 내다봤다. 나무들이 내는 소리가 조용한지 시끄러운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내가 다 감각하기에는 너무나 커다란 광경이었고, 색에서 여러 이야기와 여러 감정들이 느껴졌다. 들어본 적 없는 그 이야기들이, 나와 언어도 통하지 않는 나무들이 표현하고 있는 감정들이 빠르게 내 몸을 치고 지나갔다. 사과 한 알로 그곳을 점령해보겠노라고 애쓰던 내가 시작부터 다른 색에 휩쓸려버린 것이다.
기쁘고 당황스러웠던 순간들은 여행중에도 계속되었다. 흰색처럼 나른한 태도의 노인들, 삼림박물관의 창백한 빛과 츠츠미가와 료쿠치 항구 공원에서 바라보았던 끝없는 수평선, 모든 가게마다 붙어 있던 네부타 축제 포스터와 그 안에 담겨 있던 축제의 외롭고 화려한 불빛……
사과 이야기를 할 필요도 다른 사과 산지들을 돌아다녀볼 필요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오로지 사과 때문에 아오모리로 떠날 수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는 묶을 수 없었고 결코 묶이지도 않던 아오모리에 대해 지금부터 이야기해보고 싶다. 온통 붉은 잎과 붉은 나무들로 가득한 요즘, 푸른 숲青森 이야기를 이어가보고 싶다. 복잡한 생물의 뼈처럼 오래된 사랑과 오래된 이야기가 많은 도시는 나를 항상 겸손하게 만든다.
P.S. 5월부터 8월까지 이 책을 썼고, 책을 완성하기 직전 나는 아오모리에 다시 가게 되었다. 첫 방문 후 두 달 반 만인 2025년 8월 9일, 아오모리행 비행기에 몸을 실은 나는 책의 몸체가, 책의 감정과 정신이, 그리고 책 자신이 더듬어가며 여전히 궁금해할 아오모리의 어둡고 밝은 부분들이 조금 바뀌어가고 있음을 느꼈다. 아오모리에 다시 도착하기 전, 상공에서부터 말이다. 난기류 속에서 어지러워하면서, 미세하게 달라져가던 책의 낱장들을, 그래서 앞부분과 약간은 헐겁게 연결될 수도 있을 책의 피곤한 얼굴을 여기 그대로 남겨둔다.
언젠가 이 책과 함께 세번째, 네번째 방문하게 될 아오모리 역시 어떤 방식으로든 낡아가거나 새로워질지 기대하면서.
-「작가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