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증 (엮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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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증은 1930년 목회자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집은 넉넉지 않았지만 새벽마다 모든 가족이 예배를 드리는 경건함이 있었다. 일제 말 아버지가 신앙 때문에 투옥됐을 때 그는 어린 소년이었다. 해방이 되고 그가 대학에 입학해도 그때의 고통은 가시지 않았다. 박상증은 이를 피해 미국으로 건너갔다.
기독교는 그에게 어려운 질문이었다. 미국 유학 중 그는 이 답을 천천히 써내려 갔다. 기독교에는 두 가지 길이 있었다. 개인 구원과 사회 구원. 두 길은 달라보였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속에 세계를 하나로 보고 일치를 추구하는 ‘에큐메니즘’, 이 사회 구원의 길이 그에게 더 도덕적이고 매력적이었다.
1961년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강의를 하다 학교에서 해임됐다. 세계적 이념 대결, 미국의 매카시즘, 한국의 반공주의가 박상증을 사회참여의 길로 떠밀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간사로 활동하는 동안 기독교 청년지도자 양성에 주력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의 지원 아래 청년 지도자들은 한국의 민주화를 견인하는 세력으로 성장했다.
한국 교회는 독재정권에 대항해 민주화운동 세력의 방벽을 구축해 가고 있었다. 1967년 세계기독교연합기구 세계교회협의회 간사로 부임한 그는 본격적으로 해외에서 한국 교회를 지원했다. 박상증은 한국 교회의 정치적 보호막이 되고 경제적 지원자가 되도록 세계 교회에 한국의 상황을 알리고 도움을 요청했다.
1990년 아내와 귀국했을 때 그의 양손에는 커다란 트렁크뿐이었다. 그는 청·장년기 자신이 달려온 길을 돌아봤다. 모든 일은 결국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었다. 달라 보이지만 같은 그 길을 계속 가기로 했다. 교회를 세우고 십자가를 달았다. 참여연대를 거쳐 지금은 아름다운재단에서 젊은이들을 만나 함께 일하고 있다. 언제나 그는 멈추지 않는 에큐메니컬 운동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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