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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DIGO+ing 인디고잉 Vol.52

INDIGO+ing 인디고잉 Vol.52

(2016.가을)

인디고잉 편집부 (엮은이)
인디고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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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DIGO+ing 인디고잉 Vol.52
eBook 미리보기

책 정보

· 제목 : INDIGO+ing 인디고잉 Vol.52 (2016.가을)
· 분류 : 국내도서 > 청소년 > 청소년 인문/사회
· ISBN : 9771975595150
· 쪽수 : 168쪽
· 출판일 : 2016-09-28

책 소개

계간 청소년인문교양지 <인디고잉> 52호. 이번 호에는 “의로움으로 시대의 아픔에 응답하다”는 우리 마음 속에 존재하는 정의로움과 선함을 발견하고 이를 실천할 수 있는 용기에 대한 이야기를 담았다.

목차

★꿈꾸지 않는 자는 청년이 아니다
청소년 칼럼 무엇을 위한 공부인가 · 성의정
I’m dreaming 로쟈에게 삶의 태도를 묻다
-『죄와 벌』 주인공 로쟈와 가상 대화 · 양서영, 하보원
청소년에게 띄우는 그림편지 오늘 · 이호신
시가 내게로 왔다 진실한 관계를 위한 노래 · 양서영
한 줄 사전 선함이란 무엇일까요? · <인디고잉> 편집진

★나를 만나다
나를 찾아가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생명의 가치 · 김현아, 이소정, 김상원
학교의 슬픔 우리 모두를 위한 기억 · 양서영, 성의정
영원한 소년 자유를 그리는 인간 본연의 삶 · 양재평
내가 만난 영원한 소년 사랑이 우리를 비출 때 · 유진재

★세계와 소통하다
R통신_2016 인디고 유스 북페어 가난한 사회에서 고귀한 삶을 꿈꾸다 · <인디고잉> 편집진
인간이라는 가능성과 새로운 미래를 향한 희망 · 이소정
고귀한 삶을 되찾는 방법 · 김지현
정의로운 세상을 꿈꾸는 우리들의 질문 · 양서영
R통신 교육의 쓸모 · 김지현
S통신 청소년이 말하고 시대가 듣는 우리 시대의 경연
· <인디고잉> 편집진
사서함 B612호 선한 사람이 가진 가능성 · 이소정, 이승준

★행복한 책읽기
인디고, 책을 말하다 시민이 되는 길 · 김현아, 이소정, 김상원
키워드, 시대와 소통하다 부당함에 맞서는 불편함 · 양서영, 조해진, 김상원
시詩, 말言의 사원寺에서 즐겁게 소통하기, 그 서른아홉 번째 이야기
화, 분노에 대하여 · 유영종
PAPERS 이번 여름 우리가 에어컨을 마음껏 못 튼 이유 · 김지선
수동적 소비자에서 창조적 메이커가 되는 길 · 서연우
INDIGO+ing 52호 함께 읽은 책들

★더불어 실천하다
2016 정세청세 거기 공부하는 당신! 아직 살아 숨 쉬고 있소! · 민병일
월드체인징 핸드폰 바꾸세요? · 김현아, 서연우
고통의 기원을 찾아서 평화와 공존의 세계를 위한 의무 · 이승준, 서연우, 성의정
우석영의 온식穩食 이야기 중국의 어느 노승 이야기 · 우석영
가르칠 수 있는 용기 우리 아이들이 행복해지는 길 · 김희정

★사랑이 아니면 인생은 아무것도 아니야
인디고 시네마 파라디소 사랑으로 가능한 고귀한 삶 · 김유진
공감 능력 키우기 푸른 강으로 만들어주세요 · 이승준
영혼을 바라보는 창 가을이 성큼 깊다 · 임종진
인디고 정원에서 진정한 자유를 누리는 삶의 정원 · 소진아
함께 자라는 기쁨의 정원 · 조병준
인디고 러브레터 선善의 평범성 · 이윤영
<인디고잉> 기자 편집 후기
공익법인 정세청세의 꿈을 지지해주세요

책속에서

청소년 칼럼
무엇을 위한 공부인가
성의정(17세)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나는 여느 청소년들과 다름없이 학교에 간다. 학교에선 공부도 하고 친구들도 만나고 밥도 먹는 등 다양한 것을 하면서 하루에 13시간 가까이를 보낸다. 고등학교에 입학한 후 한 달이 넘도록 이런 생활이 너무나도 힘들었다. 학교에서 저녁을 먹은 후, 정해진 책상에서 정해진 공부를 하고, 밤 9시부터 11시까지는 또 학원에 간다. 이후에도 하루는 끝나지 않는다. 독서실에서 사람 한 명이 겨우 들어갈 수 있는 책상에 앉아 또 새벽 1시가 넘도록 공부를 하기 때문이다. 하루에 10시간이 넘게 앉아 공부를 하면서 항상 이 과정을 통해 내가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의문을 가진다. 그러나 그에 대한 답을 찾는 대신 계속 공부를 할 뿐이다. 왜냐하면 내가 그런 고민으로 시간을 보내는 동안에도 다른 친구들은 열심히 공부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같은 학교에 다닌다는 말은 서로 경쟁을 한다는 말과 같다. 그 친구들이 모두 열심히 공부하는데 나 혼자 꿈만 꾸기에는 시간이 아깝다고 생각한다. 내가 원하는 목표를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친구들이 하고 있기 때문에 내가 뒤처지면 안 된다는 생각만으로 공부할 뿐이었다.
하지만 사실 중학교 때는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학교생활은 언제나 즐거웠고 시험에 대한 압박도 그리 크지 않았다. 그렇다고 공부를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그때도 시험 기간이 되면 새벽까지 독서실에서 지냈지만 지금과 같은 부담이 없어서 공부하는 것이 즐거웠다. 내가 원하는 꿈, 원하는 내 미래의 모습, 나에게 동기를 부여해주는 것들이 분명했고 공부를 하면 모든 것이 이뤄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물론 지금도 그런 꿈을 꾸지 않는 것은 아니다. 매일매일 나의 미래를 상상하기도 한다. 하지만 대학입시라는 문에 한 발자국씩 가까워지면서 내가 공부를 한다고 다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럼에도 공부를 할 수밖에 없는 현실, 그러니 꿈을 꾸는 것을 줄여가지 않으면 나만 힘들 뿐이다. 다른 친구들도 마찬가지로 자신이 미래에 하고 싶은 것보다는 가고 싶은 대학의 이름을 얘기한다. 꽃다운 나이, 열일곱에 꿈을 꾸지 못한다는 것에 매우 화가 났다.
요즘 대학들에서 원하는 인재상의 공통점을 찾아보면 ‘창의성’이나 ‘인성’을 강조하고 있다. 창의성, 인성, 모두 좋은 말이다. 정해진 답만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새로운 답을 만들고 찾아가는 능력, 또 혼자만을 위한 게 아니라 타인을 배려하고 함께 살아갈 수 있는 능력. 그런데 남들 따라가기 바쁘게 공부하고, 친구를 경쟁상대로 여겨야 하는 현실에서 어떻게 창의적인 생각이 자라고 인성이 올바른 아이가 될 수 있단 말인가? 좋다는 것을 주입하고 요구하기에 앞서 우리는 더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떤 목적으로 창의성과 인성과 같은 가치를 가르칠 것인지, 또 어떤 방식으로 그것을 익히고, 배운 대로 살아가게 할 것인지와 같은 문제들 말이다. ‘자신의 인성을 나타낼 수 있는 일화’ 같은 것은 얼마든지 써낼 수 있지만 그런 답을 쓰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양심적 선택을 할 수 있는 학생은 얼마나 될까? 입시 제도에 갇힌 우리는 타인을 위해 행동할 수 있는 용기나 스스로 가치 있게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는 능력 등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뚜렷한 목표도 가지지 못한 채 10시간이 넘게 앉아 마냥 공부를 하는 현시대 청소년들에게 어떠한 방향의 창의성과 인성을 요구할 것인가. 머리로 이해하고 마음으로 받아들이기도 전에 다른 사람들과 다른 생각을 하라거나 도덕적이고 양심적인 행동을 하라고 강요한다는 것은 명백한 억압이다. 먼저 청소년 스스로 그러한 능력이 가치 있고 필요하다고 느껴야 하며, 자신 안에 그러한 가능성이 이미 갖추어져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야 한다. 교과서로 주입하지 않아도 우리 안에는 이미 선하게 생각하고 올바른 판단을 내려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용기가 있다. 더 많이 그것들에 대해 고민하고 타인과 더불어 이야기 나누며 자신 안에서 가치들을 발견해나갈 때, 우리는 조금 더 나은 사람으로 성장하고 이는 분명히 더 나은 사회,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거름이 될 것이다.

R통신
고귀한 삶을 되찾는 방법
김지현(17세)

러시아 대문호 도스토옙스키는 소설 『죄와 벌』을 통해 답을 구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마주하기조차 어려운 수많은 질문을 던집니다.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서 노파를 살해한 주인공 ‘로쟈’가 겪는 일련의 갈등과 고뇌를 통해서 도스토옙스키는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주고자 한 것일까요?
모든 예술의 언어는 보편의 ‘우리’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 역시 우리 삶을 말하고 있을 텐데요.『무엇이 인간인가』의 저자 오종우 선생님과 함께 그 질문의 의미를 찾아가 보았습니다.

한 시대를 지배하는 가치

“도스토옙스키를 통해 여러 가지 생각을 해볼까 해요.” 참여자들이 자료화면을 바라보고 있는 동안, 선생님은 피아노의 음정을 조율하듯 단어를 하나씩 짚어나갔다. 자유, 정의, 진리, 인격, 인권, 평화, 그런 아주 중요한 말들,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고 때로는 추구해왔던 가치들. “그런데 자유는, 또 정의는 뭔가요, 설명할 수 있나요?” 우리는 자유를 위해 살아야 하고, 정의로워야 하고, 인격이 있고 인권이 있고 평화를 지향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 의미가 머릿속에서 정확히 잡히지 않았다. 그런데 오종우 선생님께서는 그 가치들을 무엇이라고 규정을 내리면 그 단어의 진짜 살아있는 의미가 죽어버린다 하셨다. 더위에 지친 아이가 물을 한가득 움켜쥐면, 손 틈새로 물이 새나가 버리는 것처럼 단어의 생명은 죽어버리고 껍질밖에 남지 않게 된다고. 그래서 사람들이 오랫동안 고민하고 지켜온 가치들은 참 소중한 것들이라고 했다.
어떤 한 가치가 한 시대의 지배 가치가 되면, 그것은 본래의 의미와는 전혀 다른 형태로 변질되어버린다. 예를 들어 자신의 생명력을 향상할 수 있는 힘을 뜻하던 ‘경쟁’이라는 가치가 지배 가치가 되면서 다툼, 이기利己, 남을 이겨야 한다는 강박으로 바뀌어버린 것처럼 말이다. 한 가치가 시대의 지배 가치가 되면, 사람들은 더 이상 그에 대해 질문하거나 고민하지 않고, 그것에 말 그대로 지배를 받는다. 이것이 가장 큰 가치이니까, 여기에 적응하고 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무리 좋은 가치도 지배 가치가 되면 왜곡되고 변질되곤 하는 것이다.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소설 『닥터 지바고』에 “타락한 시대에는 언어가 타락한다”라는 문장이 나온다. 언어는 소통의 도구이고, 생각을 표현하는 하나의 수단이 아닌가.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니다. 사람은 언어 밖에서 살아갈 수 없다. 말하고 생각하고 꿈꾸는 모든 것이 언어에서 비롯되기에, 한 시대의 언어를 보면 그 시대의 문제를 확인할 수 있다고 한다. 가령, 우리가 ‘가난하다’라는 말을 들으면 흔히 물질적 빈곤을 생각한다. 복지정책을 펼칠 때에도 우리 사회가 가난하다는 얘기를 하면, ‘아, 우리나라에 물질적으로 빈곤한 사람들이 있구나’라고 생각하며 최저임금을 올리
거나 청년수당을 주는 등의 정책을 쉬이 떠올린다. 즉, 가난이라는 말을 물질적인 것에 국한해버린다. 하지만 가난은 ‘가련하다, 궁색하다, 빈곤하다’라는 이런 말들과 연결되어 있다. ‘궁색한 이유’, ‘빈곤한 상상력’과 같은 말을 우리는 쓰지 않던가. 그렇게 다양한 스펙트럼의 단어들을 한가지 측면에서만 이해한다는 것은 언어의 왜곡이며 한계다.
『죄와 벌』의 주인공 로쟈는 나폴레옹과 같은 위대한 사람이 되고자 했다. 노파가 어려운 사람들로부터 부를 빼앗아 재산을 축적하고 있으니, 저런 존재들을 제거하고 그 돈으로 삶이 파괴되는 사람들을 돕는 게 더 정의롭다고 생각해 노파를 살해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런데 이 행위는 정의로운가? 부당함에 피해를 입는 사람들의 억울함은 분노를 낳고, 그 분노의 피를 빨아먹고 기생하는 것이 테러리즘이다.

정의란 무엇인가?

그렇다면 정의란 무엇인가? 사회정의를 구현하기 위해 흔히 이야기하는 것이 공리주의인데, 공리주의에도 세 가지 허점이 있다고 오종우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먼저, 다수와 소수를 가르는 특정 기준이 약자를 발생시키고 폭력으로 작용한다. 두 번째로, 다수의 의견이 꼭 옳지만은 않음에도 불구하고 소수자를 배척해 사회가 경직될 수 있다. 마지막으로 공리주의는 개개인을 수치로 치환해 파악한다는 것이다.
굶주린 사람에게는 그 굶주림이 전부다. 아픈 사람에게는 그 병이, 그 사람의 인격과 생의 전부다. 그런데 그 사람이 사회 전체에서는 소수이니까 그런 건 중요치 않다, 그렇게 생각하면 사회정의를 구현하기 위해 그 사람의 인생은 중요한 것이 아니게 된다. 이러한 맹점을 극복하기 위해 존 스튜어트 밀이나 존 롤스처럼 공리의 척도를 양적인 것에서 질적인 것으로 치환하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질적인 것에는 개인의 감성과 의지가 포함되어 명쾌하게 정의내릴 수 없다. 그래서 현재로는 공리주의가 가장 적합한 정의이론으로 사회체제의 기반이 되고 있다.
하지만 공리주의가 설득력을 갖고 있다고 해서 이것을 완벽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앞서 말했듯, 어떠한 가치도 절대로 단호하게 정의내려져서는 안 된다. 특히 정의Justice는 항상 주저하고 고민해야 한다. 항상 토론해야 하는 것이다. 정의로움이란 끝없이 주저하고 머뭇거리며 망설이는 과정에서 발현된다. 소수의 의견도 듣고 그래야만 사회가 정의로울 수 있다.
주변에서 주체적으로 살아가라는 말을 참 많이 듣는다. 네 마음대로, 네 뜻대로 하라. 자기를 사랑하고 그만큼 자기의 중심으로 가라. 어느 시대에나, 사회의 경향성에 따라 그 시대를 지배하는 가치가 존재한다면, 우리 시대의 지배가치는 ‘자기애’가 아닐까? 그러나 주체성과 자기애는 애초에 책임에 기반을 둔 것이었다.

“과학과 경제적 진리의 이름으로 큰 발전을 이루고 있습니다.”
“다 아는 얘기로군요.”
“다 아는 얘기가 아니올시다. 예를 들어, 이웃을 사랑하라고 그러는데, 그랬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외투를 반으로 잘라 이웃과 나눴을 것이고 그래서 두 사람 다 반쯤 헐벗은 꼴이 됐겠죠. 그러나 과학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 누구보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라, 세상의 모든 것은 개인적 이해에 기초하고 있으니까. 자신을 사랑하면, 각자의 일을 제대로 할 것이고, 외투도 온전할 겁니다. 거기에 경제적 진리는 이렇게 덧붙입니다. 우리 사회에 튼튼한 개별 사업, 말하자면 온전한 외투가 많을수록, 사회의 기반이 더 단단해지고 공공사업도 더 안정될 것이다. 그런 고로 자기 자신만을 위한 이익을 추구함으로써 모두에게 이득을 주는 셈인데, 결과적으로 이웃이 찢어진 외투보다 더 큰 것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이것은 사적인 인정이 아니라 사회 전체가 번영한 결과이지 않습니까.”
-도스토옙스키,『죄와 벌』 중에서

현시대에서는 자신을 위하는 일이 공동체를 위하는 것이다. 개별사업이 많을수록 사회기관이 단단해지고 공공사업이 안정될 것이라고 말한다. 자신만의 이익을 추구함으로써 모두에게 이득이 되는 파이가 커지니까 사회가 풍요로워지고 번영할 것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자기중심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이 어떻게 제대로 된 공공사업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책임질 수 없는 자기애는 이기심의 산물이다. “열정과 창의성을, 너만의 생각을 가져라”는 말은, 자기 주체성과 이기심의 혼동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그렇게 번영과 발전이 지배 가치가 되면서 사람이 수단이 되는 것이며, 그것이 효율성의 원리라고 오종우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걸림돌이 되는 인간은 제거하고, 배제하는 것. 효율성은 배제의 논리이다. 저성과자로 해고된 소설 속 ‘마르멜라도프’라는 인물도 이 효율성의 논리에서 도태된 존재들 중 하나였다.
“이기와 주체가 혼돈되는 시대를 우리가 직시해야 해요.” 선생님께서 힘주어 말씀하셨다. 이기심이 지배 가치가 되면, 사람들은 낯선 것에, 타자에 대해 자꾸만 거부감을 가진다. 예술은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낯선 것을 만들어 내는 것인데, 그 낯선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배척하려 들면 사회는 경직되고 고유의 빛을 잃어간다. 그렇다면 주체적인 것은 무엇인가. 뭔가를 해내야겠다는 강박감은 자기 의지에 따라 자유를 누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를 속박하고 구속하는 것이다. 로쟈가 스스로 원대하다고 믿었던 일을 행하고 나서도 자신을 옥죄고 구차한 자기변명을 늘어놓았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넓은 것이 인간이라 했다. 온갖 추잡하고 더러운 생각을 함과 동시에 고결함을 지닌 인간은 우주를 담고도 남는다. 그러니까, 진짜 자기를 사랑하는 것, 자기를 긍정하는 것은 자기 한계에 갇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다. 나를 커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벗어남으로써 나의 세계를 넓히는 것이다. 그것은 타인을 사랑하는 것에서부터 비롯한다. 낯선 사람들,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무관심하면 그 사람들은 남이지만, 그들에게 관심을 갖고 공감하면 ‘우리’라는 세계가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강의가 채 몇 분 남지 않은 시간, 오종우 선생님께서 질문하셨다.

“여러분, Identity, 그러니까 자아 정체성이라는 말 많이 쓰죠? 그런데 이 자아 정체성이 온전히 나만의 것일까요? 그렇지 않아요. 가족들과의 대화, 친구들과의 대화, 읽은 책 구절들 속에서 나라는 존재가 구성되고 생겨나는 거예요. 자아정체성 혹은 자기동일성으로 번역되는 ‘Identity’라는 단어는 사실 타자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어디선가 병든 할머니가 고통받고 있다면 그분이 내 할머니가 아니어도 우리는 가난한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어디선가 어린아이가 굶주리고 있다면 그것은 그 아이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가 가난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사법적 절차를 밟지 않고 체포된다면 나의 기본 시민권도 침해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라는 것이고, 사회이며,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가 되는 것이에요. 그것이 진정한 자기사랑이고 자기애입니다.”

2016 인디고 유스 북페어의 주제는 “가난한 사회, 고귀한 삶”이었다. 그래서 오종우 선생님의 강의를 통해 존엄한 인간의 가능성에 대해 묻고자 했다. ‘무엇이 진정한 인간인가’라는 질문을 던짐으로써 우리는 가난한 사회를 고귀한 삶으로 바꾸어 나갈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며 말이다. 그 답은 아주 간단한 것일지도 모른다. 개인의 존엄성은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이미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것. 즉, ‘나’라는 존재가 타자에게서, 우리라는 공동체에서 비롯된 것임을 발견할 때, 우리는 비로소 존엄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

사서함 B612호
선한 사람이 가진 가능성
-브라이언 파머 선생님과 인터뷰


이소정(14세), 이승준(15세)

세상에 자신의 가족, 친구, 명예 또는 국가를 위해서 용기를 낼 수 있는 사람은 많습니다. 하지만 그것들을 넘어서 세상의 평화와 정의, 인류애 등 보편적인 가치를 위해 용기를 내고 위험을 감수하는 사람들은 보기 드물죠. 그렇다면 한 개인이 어떻게 시민적 용기를 내어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요?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에 반하는 내용을 담은 팸플릿을 뿌려 진실을 알리고자 했던 소피 숄과 한스 숄 남매, 탈레반의 탄압에도 끝까지 여성의 권리를 찾으려 했던 소녀 말랄라 유사프자이까지. 그들은 어떻게 자신의 신념을 이토록 용기 있게 표현한 것일까요? 이에 대해 웁살라대학교 브라이언 파머 교수님과 인터뷰를 해보았습니다.

소정
가벼운 질문으로 인터뷰를 시작하고자 합니다. 파머 선생님께서 10년 동안 한국 학생들을 봐오시고, 그와 동시에 인디고 서원과도 함께 하셨는데, 인디고 서원이 한국 학생들에게는 어떤 의미가 되어줄까요?

브라이언
인디고는 쉼터인 동시에 학생들이 경쟁 사회에서 잠시 피할 수 있는 휴식처입니다. 또한, 우리 사회의 변화된 교육 제도와 그러한 제도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가장 잘 보여주는 예시이기도 하죠. 인디고는 온기와 경쟁이 없는 순수한 믿음을 바탕으로 한 인간과 인간 간의 연결고리입니다. 그래서 청소년들이 이 삭막한 경쟁사회에서 조금은 사랑받고 있고, 안전하다고 느끼는 이유겠지요.

승준
최근 한국 사회에서 일어나는 문제 중 고민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북한을 견제하기 위해 미군과 함께 군사 시설을 증강하고 있는 한국의 현실인데요. 무기를 막기 위해 무기를 강화하는 이러한 아이러니한 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브라이언
공격과 방어를 위한 무기를 분간해 내기란 굉장히 어려운 일입니다. 정부는 종종 우리는 선하고 상대는 악한 존재로 인식하며 우리의 무기를 방어용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주장이 나오고 있는 것이 아마 한국이 핵보유국인 북한과 위험한 상황을 많이 겪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대화가 없는 일방적인 노력은 더 해결하지 못할 갈등만을 빚어내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집중해야 할 것은 오히려 서로에 대한 믿음 아닐까요? 그 어떤 값비싼 무기보다 더 우리의 안전을 보장해 줄 수 있는 신뢰 말이죠.

승준
한 사회의 신뢰 혹은 신념은 굉장히 중요한 것 같습니다. 난민 문제만 봐도 명확히 알 수 있는데요. 유럽전역에서 국가마다 난민에 대한 정책이 각기 다르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스웨덴의 청소년과 청년들은 난민을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나요?

브라이언
스웨덴과 유럽 전역에서 어떻게 하면 더 많은 난민을 수용할 수 있을지에 대한 논의가 끊이지 않고 진행되고 있습니다. 스웨덴은 선진국 중에서 가장 많은 난민을 수용하였습니다. 그래서 진행되고 있는 논의 중 하나는 어떻게 하면 그들을 인종 차별, 무시, 그리고 난민을 향한 무의미한 적대로부터 보호할 수 있을지에 대한 것입니다. 흔히 알다시피, 국민의 일부가 그들을 향한 적대심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죠. 또 다른 과제는 난민들이 사회에 적응해 나갈 수 있도록 그들을 직장이나 학교에 참여시키는 일입니다. 새롭게 받아들여진 난민의 대부분은 15세에서 25세 사이의 청소년과 청년입니다. 그리고 이들의 대부분은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했고, 그래서 정부와 국민에게 더 큰 도전으로 다가옵니다.

승준
우리나라에서는 난민의 인권 존중이 아닌 그들의 수용 여부에 대한 얘기도 제대로 오가지 않는다는 사실이 안타깝게 여겨집니다. 난민의 인권에 대해 이야기 할 때 가장 많이 거론되는 이야기가 난민들의 문화를 어떻게 수용할 것인가에 대한 지점이라 생각합니다. 그들의 문화를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문화 다양성은 어떻게 수렴될 수 있을까요?

브라이언
다문화 사회 조성에 관한 큰 논란 중 하나를 질문하셨네요. 먼저 ‘그들의 문화’와 혹은 ‘우리의 문화’라는 단어를 쓸 때 굉장히 유의해야 한다는 점을 일러둬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문화 안에서도 다양한 사람들이 존재하기 때문이죠. 예를 들어, 미국 문화가 다소 폭력적이라는 것은 미국의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폭력적이라는 것을 가정한 얘기입니다. 하지만, 미국인 한 명 한 명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안에서도 저처럼 폭력을 절대 행사하지 않으려는 사람도 존재하죠. 그래서 미국 문화를 평균적으로 다른 문화에 비해 조금은 폭력적인 면이 있다고 표현할 뿐, 그들의 문화 자체가 폭력적이라고 해석하진 않아야 합니다. 난민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시리아에도, 터키에도, 소말리아에도 가부장주의와 성차별에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설령 그들 국가의 대부분이 이슬람적 종교관에 기초하여 남성우월적인 시각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더 많아도요.
각 국가의 문화에 평균적인 차이가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미국은 다른 국가에 비해 평균적으로 조금 더 폭력적이고, 스웨덴의 경우에 페미니즘을 조금 더 옹호하는 분위기이죠. 만약 어느 문화에 조금 더 평등하고 자유를 지향하는 가치가 있다면, 다른 문화에서 온 난민들도 그 문화에 적응하고 그것들을 더 지지하려고 노력하지 않을까요?

소정
이번 질문은 프랑스 대입시험인 바칼로레아에서 출제되었던 것이기도 합니다. 인간은 과연 유토피아에 도달할 수 있을까요? 아름다운 사회를 만든다는 것은 정녕 불가능한 일인가요?

브라이언
저는 인류가 그 어떤 억압, 폭력 그리고 불공평에서 완전히 벗어난 적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유토피아에 대한 가능성은 너무나도 많이 열려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가능성은 유토피아와는 전혀 반대되는 디스토피아와 종이 한 장 차이로 열려있습니다. 얼마 전 미국에서 경찰들이 위험하지 않은, 예를 들어 담배를 파는 흑인들에게 지나친 폭력을 가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실제로 경찰들이 흑인을 총으로 쏘아 죽인 사건들도 일어났지요. 경찰의 그런 행위는 완벽히 과잉반응이었고, 경찰이 그들을 죽인 이유는 아마 흑인이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만 보면 백인 경찰은 너무나도 비인간적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저는 한 백인 경찰이 노숙자와 얘기를 나누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는 너무나도 친절하고 자상했습니다. 저는 그 순간, 절대 도달할 수 없는 그런 유토피아를 본 것 같았습니다. 악한 존재라고 생각했던 그에게도 여전히 선하고 멋진 모습은 있습니다. 그것은 이 세계에 평화를 만들어갈 중요한 가능성입니다.
저는 더 많은 사람이 좋은 사람으로 살아갈 아름답고 멋진 방법들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노르웨이 오슬로의 한 대학에서 연구한 결과 인간은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이 받은 상처가 깊으면 깊을수록 차후에 그만큼 폭력성을 띈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 각자가 타인에게 상처를 주는 일들을 더 이상 반복하지 않는다면, 이 사회의 폭력성은 분명 줄어들 것입니다. 이 사실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평화는 결국 우리의 의지로 가능하다는 것을 말해주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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