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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종교/역학 > 기독교(개신교) > 기독교 역사
· ISBN : 9788934115304
· 쪽수 : 216쪽
· 출판일 : 2016-04-10
책 소개
목차
서문 / 5
제1장 서론 / 9
제2장 게르만민족의 기독교화 / 15
제3장 중세 초기의 수도원 운동 / 25
제4장 프랑크왕국의 발전과 기독교 / 31
제5장 신성로마제국이 성립과 기독교 / 43
제6장 클뤼니 개혁 운동과 그 여파 / 55
제7장 교황권의 강화와 서임권 투쟁 / 65
제8장 십자군 전쟁 / 89
제9장 십자군 시대의 수도원 운동 / 105
제10장 교황청의 바벨론 포로 / 121
제11장 서방교회의 대분열 / 129
제12장 콘스탄쯔 회의와 바젤 회의 / 139
제13장 중세 신학 / 153
참고문헌 / 212
저자소개
책속에서
카를 대제는 정복사업도 많이 했지만, 학문과 예술의 진흥에도 힘썼다. 그런데, 카를 대제가 진흥하려 한 학문과 예술은 본질적으로 기독교 신앙에 기초한 학문과 예술이었다. 실로, 카를 대제의 치세(治世)는 기독교 문화가 꽃피던 시대였다.
기독교 문화의 진흥을 위해 카를 대제는 우선 교육개혁부터 단행하였다. 카를 대제 이전의 프랑크왕국에서는 교육정책이라는 것이 사실상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카를 대제는 프랑크왕국이 군사대국이 되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없었다. 프랑크왕국이 문화적으로도 비잔틴제국 이상으로 발전하는 것 - 이것이 카를 대제의 꿈이었고, 그는 이러한 꿈의 실현을 위하여 최선의 노력을 다하였다.
카를 대제는 교육개혁과 문화진흥정책의 쎈터로 수도인 아켄(Aachen)에 궁정학교(宮庭學校)를 세웠다. 아켄의 궁정학교에는 당시 구라파 최고의 석학(碩學)들이 교수요원(敎授要員)으로 모여들었고, 이곳에서는 장차 프랑크왕국을 이끌어갈 인재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카롤링 왕조의 프랑크왕국은 카를 대제의 사후 쇠망의 길로 들어섰다. 그리하여, 프랑크왕국은 주후 843년 베르당 조약(Verdun 條約)으로 서프랑크왕국, 중프랑크왕국, 동프랑크왕국이라는 3개 나라로 분열되었고, 이 가운데서 중프랑크왕국은 주후 875년 멸망하여, 그 영토는 대부분 서프랑크왕국과 동프랑크 왕국에 분할되었다. 이러한 분열과 혼란의 와중에서 카롤링 왕 조의 권위는 실추되어, 동프랑크왕국을 다스리던 카롤링 왕조는 주후 911년, 서프랑크왕국을 다스리던 카롤링 왕조는 주후 987년 막을 내렸다. 이렇게 카롤링 왕조의 시대가 끝나가고 있을 때, 서구에는 오토 대제(Otto 大帝, 재위 936~973)라는 영명한 군주가 등장하여, 주후 962년에 “신성로마제국”(神聖Roma帝國, Sacrum Imperium Romanum)을 세움으로 말미암아, 서구에는 카 를 대제의 서로마제국(西Roma帝國) 이래 다시 한번 기독교 제국(Imperium Christianum)이 성립하게 되었다.
중세 서구의 수도원의 부패는 대체로 주후 9세기 중엽 이후 시작되었는데, 이러한 현상은 프랑크 왕국의 분열 및 카롤링 왕조 의 몰락과 관련이 있다. 수도원의 부패는 서프랑크 왕국에서 가장 심했지만, 그것은 왕의 권위가 무너지자, 귀족들이 수도원을 사유화(私有化)함으로써, 수도원을 자기들의 세속적 욕심을 채우는 도구로 사용하려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성(靈性)에 있어 가장 모범이 되어야 할 수도원의 부패는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영적인 개혁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게 하는 계기가 된 것이 사실이다. 클뤼니 개혁운동과 같은 중세 중기의 수도원 개혁운동은 당시의 시대적 요청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