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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시 > 한국시
· ISBN : 9788939222212
· 쪽수 : 136쪽
· 출판일 : 2014-08-07
책 소개
목차
제1부 지하철 환승역 | 꽃의 기원 |무비, 마이 라이프 | 야생 | 영웅본색 | 내압 | 만화영웅 | 소유 | 점조직의 숲 | 꽃, 피다 | 단 하나의 집합 | 새 | 아다라시 | 폭설 | 낙타거미 | 목련이 떨어진 이유
제2부 억새풀밭에서 | 목숨의 냄새를 맡다 | 머나먼 지구 | 한, 시간 | 바다 나무 | 숨소리 | 사원 앞의 그 여자 | 고양이 | 담쟁이넝쿨 | 어떤 소통 | 눈의 행로 | 날개 | 가을 은행나무 | 맞물림 | 그래, 가끔은 | 불독개미
제3부 아버지의 수첩 | 주먹 | 나무 약국 | 경공술 | 길거리 화분 | 내가 살던 동네에서 | 몸속의 길 | 어머니는 걷는다 | 두부소녀 | 길을 잃다 | 싸움의 법칙 | 세발자전거 | 까닭 없이도 끄떡없이 산다 | 내 인생의 액셀러레이터 | 먼지와 날개 | 옆으로 자라는 나무
제4부 어느 고문기술자의 고백 | 대천 앞바다 | 레드 제플린이나 듣지 | 꿈 | 사랑 | 머구리 | 외로움은 소란하다 | 변하지 않는 풍경 | 雨化 | 법당엔 가지도 않고 | 끝끝내 알 수 없는 일 | 내가 세상을 살아가는 자세 | 나는 주인공이다 | 나비 | 다른 시를 보다
발문 오철수 | 시인의 말
저자소개
책속에서
§. 편집자가 꼽은 이병승의 시
꽃의 기원
애초에 타일 벽에는 못을 박지 않는 법이다
그래도 한번, 타일 벽에 못을 대고 망치로 때리자
허공을 가르며 파편이 튄다
타일은 못이 파고들 틈을 허락지 않고
대신 저항의 살점을 꽃잎처럼 내놓는다
단 한 구멍도 내놓지 않겠다는 고집은
때로 못을 튕겨내거나, 구부러뜨리거나
아예 부러뜨리기도 한다
때리는 자의 주의력을 뭉개버리는 저 집요한 고집
에라, 모르겠다 마구 망치질을 하면
귀청을 때리는 비명을 지르며
꽃잎처럼 허공으로 튀는 꽃, 꽃, 꽃
쫙 갈라져버린 타일 벽의 한 줄기 빗금은 꽃의 줄기다
어쩌면 꽃의 기원은 충격이다
꽃의 양분은 싸움이고 저항이며
꽃의 형식은 파편이다
살다가 생각지도 못한 일을 당했을 때
무언가가 심장을 찌르고 들어올 때
어처구니없이 터져 나오는 헛웃음처럼
혹은 깨문 이빨처럼
딱딱하고 날카로운 꽃잎이 도처에서
순식간에 핀다, 튄다
주먹
나무의 손가락 사이로 바람이 지나간다
새가 와서 더듬고 유혹해도
잡으려 하지 않는다
벌레가 꼬물꼬물 기어 다녀도
마음껏 놀다 가라
그저 하늘 향해 쫙 뻗은 손가락 사이로
다 흘려보낸다
참으로 허술한 손이다
맘만 먹으면 잡을 수 있는 것들 다 스쳐 보내고
아무에게나 손 흔들지 않는다
어설프게 남의 등 토닥이지도 않는다
보이는 듯 보이지 않게
제 갈길 향해서만 쫙 뻗은 손가락
뿌리로 움켜쥔 것 하나면 다른 건 필요 없다는
나무의 쫙 벌린 손
아무 것도 잡지 않아 자기를 움켜쥔 손
무서운 주먹이다
꽃, 피다
오므렸던 봉오리가 제 몸을 열었다
굵은 암술과 자잘한 수술들
생식기를 다 드러내놓고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
하얀 얼굴 붉은 실핏줄까지
제 모습 그대로 보여주는,
냄새를 덮거나 위장할 향수도 필요 없는
스스로의 향을 날리며
오래 감추었던 제 색깔
제 성질 다 드러낸다
좁다고 남을 밀치지도 않고
남에게 밀리지도 않는
제 자리에서의
피어남
꽃이 피었다고 하는 건
벌거벗었다는 뜻이다
든 꽃은 드러내놓고 말한다
눈의 행로
당신이, 무수히 쏟아지는 이 눈발 중에서
나만을 콕 찍어서
주목해 보아주지 않아도 괜찮아
나는 저들과 다르다고 힘주어 외쳐도
나를 구별해내는 건 쉽지 않을 테니까
당신이 생각하는 눈이란
구름에서 시작되어
땅으로 떨어지는
쏟아지는, 나리는, 녹아 없어지는, 쌓이는, 포근한
물의 황홀한 변형의 한 형태일 뿐이겠지만
나는 때론 발 디딜 곳 없어도 허공을 차고 솟구쳐 올라
춤추듯 원을 그리기도 하고
불가능하다는 수평의 비행이나
몸이 부서지는 좌충우돌의 질주도 해보았어
촘촘한 나뭇가지나 전선의 사이를 날며
나를 구성하는 존재의 방식을 바꾸기도 했지
하지만 나를 그저 눈이라는 이름의 무리로만 보는
당신을 탓하진 않겠어
구름이 왜 나를 떨어냈는지 이유를 모르고
바닥은 왜 나를 알 수 없는 곳으로 부르는지 모르지만
나는 추락의 시간에도 날았고
내 마음의 행로를 몸으로 그렸으며
때로는 바람도 흔들었으니까
야생
구질구질 비오는 새벽 한시
식당에서 내놓은 쓰레기 봉투를 뒤지던 고양이와
눈이 마주쳤다
젖은 털 사이엔 상처가 보이고
새끼를 밴 듯 서럽게 부푼 배
공격이냐, 그냥 갈 거냐를 묻는 노란 눈동자
도망칠 것인지 말 것인지를 가늠하는 몸의 자세
경계의 활처럼 휜 등뼈와
가시처럼 뭉쳐진 젖은 털
한 발로 누른 닭 뼈
순간, 물웅덩이는 아프리카 초원의 늪으로 변하고
누군가를 이기기 위해
밤 새워 일할 작정으로 야식거리를 사들고 가던
내 우산 위에는 배고픈 검은 독수리 몇 마리
앉아 있는 듯 묵직한데
튕기는 빗소리 둥둥둥 북소리로 아득한
도시에 겹쳐진 야생의 한 순간
고양이
대로변 길가 고양이 두 마리가
코를 맞대고 카랑카랑 울고 있다
흘레붙은 개도 아니고 길고양이 두 마리여서
희한하네, 뭘까 구경하고 섰는데
엄청난 집중이다
행인들 걸음 멈추고 키득키득 구시렁거려도 아랑곳 않는다
도둑괭이 재수 없다 돌멩이가 날아와도
그 자리 떠나지 않는다
오직 서로의 눈을 삼키고 숨결을 낚아채며
수염을 세우고 목소리 높인다
저것이 싸움이라면 둘은 죽을 때까지 싸울 것이고
연애라면 서로 한 점으로 스며 농축될 것만 같다
아, 왜소해진 나여
세상의 시선을 온몸으로 빨아 당기는 과녁이 되지 않고서야
어찌 나를 넘어서겠느냐
세상에 눈멀지 않고 어찌 내 보고 싶은 걸 보겠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