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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종교/역학 > 가톨릭 > 가톨릭 일반
· ISBN : 9788941925194
· 쪽수 : 160쪽
· 출판일 : 2025-11-20
책 소개
목차
들어가며
초기 교회의 단식 관습
육과 영의 치유제
욕망과 악습과의 싸움
단식과 기도
조명(照明)의 길
오늘날의 단식
나오며
주
책속에서
모든 즐거움을 거부하여 타인에게 불쾌한 존재가 된다면, 그건 분명 바람직한 일이 아닙니다. 단식이란 그런 것이 아닙니다. 관건은 ‘나를 붙잡아 주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내가 저 근원에서 무엇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발견하는 일입니다. 내 귀를 막거나 내 눈을 멀게 하는 온갖 대리 만족거리들을 단식 중에 의식적으로 내려놓을 때, 비로소 나는 내 안의 속 깊은 진실을 깨닫습니다. 내 들끓는 생각과 감정 위에 놓여 있는 덮개를 나는 단식 중에 벗겨 냅니다. 이로써 내 안에 있는 모든 것이 떠오를 수 있습니다. 충족되지 못한 내 소망과 갈망, 내 욕망이 위로 떠오르며, 또한 나 자신에 대한 집착, 내 성공과 내 소유, 내 건강과 내 인정 욕구에 대한 집착이 떠오르는 것입니다.
단식하는 동안 나는 어떤 친절한 모습 뒤에 숨어 있는 부정적인 감정, 곧 슬픔이나 분노 같은 감정을 마주합니다. 이런저런 활동을 함으로써, 이것저것 먹고 마시며 스스로를 위로함으로써 애써 덮어 놓은 상처가 터집니다. 여태 억눌러 놓은 것들이 죄다 드러납니다. 단식은 내가 누구인지 벗겨 내 보입니다. 단식은 나에게 어떤 위험이 있는지, 내가 어디서 싸워야 하는지 알려 줍니다.
올바른 방식으로 단식을 실천하는 사람은 겸손해집니다. 우리는 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겠습니까? 겸손은 자신의 인간 본성으로, 자신의 저 흙바닥으로 내려가는 용기를 뜻합니다. 라틴어에서 ‘겸손’(humilitas)이라는 말은 ‘흙’(humus)이란 말에서 왔습니다. 우선 단식은 우리 자신을 직면케 합니다. 곧, 우리의 소망과 욕망, 우리의 생각과 감정, 우리의 그림자를 직면시킵니다. 자신의 그림자를 인식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조금 더 겸손해집니다. 아울러 단식은 우리를 우리 한계까지 끌고 갑니다. 이 체험은 우리가 육체와 영혼을 함께 가진 인간임을, 우리가 육체를 벗어날 수 없음을 명확히 보여 줍니다. 또 우리가 육체를 버릴 수 없음을, 우리 멋대로 할 수 없음을 일깨워 줍니다. 우리는 우리 육체를 받아들여야 하며, 무엇보다 그 결핍, 그 부족함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육체를 인정해야 합니다. 단식 중에 우리는 자신의 결핍을 직면합니다.
하느님께 빛을 받아 눈을 뜨는 것, 깨달음을 얻는 것과 그저 눈이 멀어 현혹되는 것은 종이 한 장 차이입니다. 단식은 둘 중 어느 쪽으로도 이어질 수 있습니다. 감각이 예리해지고 정신이 깨어 있게 되는 단식의 자연스러운 효과와 필록세누스가 말한 이 깨달음을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한 효과는 하느님을 통한 깨달음에 이르는 데 분명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자체로 목적이 되거나 하느님을 직접 보는 것, 직접 뵙는 것과 동일시될 수도 있습니다.
단식은 우리를 무력함으로 이끌 때만 참된 깨달음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수도승들에게 단식은 자신의 무력함으로 들어가는 길일 뿐, 제힘으로 이룰 수 있는 어떤 업적이나 의도한 효과를 일으킬 수 있는 어떤 수단이 아닙니다.
단식은 우리를 우리의 약함이란 심연으로 몰아넣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이 심연에서 하느님의 심연을 만납니다. 우리의 무력함이란 심연은 하느님의 심연을 향해 부르짖습니다. 이는 마치 시편에 표현되어 있는 바와 같습니다. “심연이 심연을 부르나이다”(abyssus abyssum invocat, 시편 4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