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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대학교재/전문서적 > 인문계열 > 역사학
· ISBN : 9788946053076
· 쪽수 : 784쪽
책 소개
목차
서론
제1부이론적 분석의 틀
제1장이론적 분석의 틀
1. 구성주의
2. 정치기회구조
제2부파벌 경쟁과 패권적 연합(1945~1953)
제2장파벌의 경쟁과 연합
1. 정치기회구조
2. 김일성 vs. 오기섭
3. 김일성 vs. 박헌영
4. 김일성 vs. 조만식
제3장김일성 중심의 패권적 연합
1. 6·25전쟁
2. 김일성 중심의 패권적 연합
3. 박헌영파 숙청
제3부‘8월 종파사건’과 ‘반종파 투쟁’(1953~1958)
제4장‘8월 종파사건’의 정치기회구조
1. 소련공산당 제20차 대회
2. 폴란드 포즈난 사건
3. 북한정부 대표단의 동유럽, 소련, 몽골 순방
4. 모스크바 주재 북한대사 리상조의 역할
5. 소련과 평양 주재 소련대사관의 역할
6. 조선로동당 제3차 대회
제5장‘8월 종파사건’의 배경: 사상과 정체성의 충돌
1. 전후 복구발전 노선 경쟁
2. 사상사업에서의 투쟁
3. 김일성 개인숭배, 조선혁명역사 왜곡, 김일성파 중용
4. 김일성파 vs. 연안파 vs. 소련파
제6장‘8월 종파사건’의 모의과정
1. 북한정부 대표단의 동유럽, 소련, 몽골 순방 출발 이전
2. 북한정부 대표단의 동유럽, 소련, 몽골 순방기간
3. 북한정부 대표단의...서론
제1부이론적 분석의 틀
제1장이론적 분석의 틀
1. 구성주의
2. 정치기회구조
제2부파벌 경쟁과 패권적 연합(1945~1953)
제2장파벌의 경쟁과 연합
1. 정치기회구조
2. 김일성 vs. 오기섭
3. 김일성 vs. 박헌영
4. 김일성 vs. 조만식
제3장김일성 중심의 패권적 연합
1. 6·25전쟁
2. 김일성 중심의 패권적 연합
3. 박헌영파 숙청
제3부‘8월 종파사건’과 ‘반종파 투쟁’(1953~1958)
제4장‘8월 종파사건’의 정치기회구조
1. 소련공산당 제20차 대회
2. 폴란드 포즈난 사건
3. 북한정부 대표단의 동유럽, 소련, 몽골 순방
4. 모스크바 주재 북한대사 리상조의 역할
5. 소련과 평양 주재 소련대사관의 역할
6. 조선로동당 제3차 대회
제5장‘8월 종파사건’의 배경: 사상과 정체성의 충돌
1. 전후 복구발전 노선 경쟁
2. 사상사업에서의 투쟁
3. 김일성 개인숭배, 조선혁명역사 왜곡, 김일성파 중용
4. 김일성파 vs. 연안파 vs. 소련파
제6장‘8월 종파사건’의 모의과정
1. 북한정부 대표단의 동유럽, 소련, 몽골 순방 출발 이전
2. 북한정부 대표단의 동유럽, 소련, 몽골 순방기간
3. 북한정부 대표단의 귀국 이후
제7장‘8월 종파사건’의 발생과 반전
1.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8월 전원회의’
2. 소련공산당과 중국공산당의 직접 개입
3.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9월 전원회의’
4. ‘8월 종파사건’의 평가
제8장‘반종파 투쟁’
1. 대외 정치기회구조
2. ‘반종파 투쟁’
3. 조선로동당 대표자회
4. 인민군대 내 ‘당 위원회’ 설치와 소련파 및 연안파 숙청
5. 인간개조, 사회개조 운동의 움틈
제4부단일지도체계, 유일사상체계(1958~1994)
제9장김일성 단일지도체계 확립
1. 대외 정치기회구조
2. 조선로동당 제4차 대회
3. 김일성사상과 항일빨치산혁명전통 정체성의 공유
4. 정통 마르크스 논쟁과 사상문화 간부들의 도전
5. 조선로동당 제2차 대표자회
6. 1967년: 유일사상체계, 사회문화적 ‘대격변’
7. 인민군대 내 군벌관료주의자들의 숙청
제10장유일사상체계, 수령제 사회주의
1. 대외 정치기회구조
2. 유일사상체계의 심화와 ‘계속혁명’
3. 조선로동당 제5차 대회
4. 1972년 ‘사회주의’ 헌법
5. ‘온 사회의 김일성주의화’ 강령 선포
6. 3대혁명소조운동
7. 조선로동당 제6차 대회
8. 수령과 수령제 사회주의
9. 김정일의 수령 승계
제5부선군사회주의(1995~2010)
제11장선군사회주의
1. 대외 정치기회구조
2. 대내 정치기회구조
3. 선군정치 이전의 조치들
4. 선군사회주의
5. 3대 세습 후계정치
제6부평가와 전망
제12장‘북한 권력의 역사’의 평가와 전망
1. ‘북한 권력의 역사’의 평가
2. 북한 권력의 미래
저자소개
책속에서
“신탁통치가 김일성을 살리고 박헌영을 죽였다”는 세간의 유행어처럼, 신탁통치 문제는 박헌영으로 하여금 소련의 지시에 따르고 소련의 후견을 받고 있던 김일성에 의존하게 만듦으로써 김일성과 박헌영의 권력 싸움에서 일대 분수령을 이루었다. 나중에 살펴보겠지만, 신탁통치 문제는 박헌영뿐만 아니라 신탁통치를 반대했던 민족주의자 조만식도 함께 죽이고 말았다. 달리 말해, 신탁통치 문제는 김일성에게 당-국가건설에서 경쟁자들을 무력화시키거나 없애는 데 유리한 대외 정치기회구조로서 작용했던 것이다.
중국과 소련의 6·25전쟁에 대한 지원은 자연히 북한정치에서 연안파와 소련파의 영향력을 증가시켰으며, 이것이 나중에 ‘8월 종파사건’ 발생으로 연결됐다. 한편, 소련파와 연안파의 힘의 증가는 역설적으로 김일성으로 하여금 이들과 연결되어 있던 소련과 중국의 영향에서 벗어나 ‘주체 확립’의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자극했다.
결국 박헌영은 리승엽, 조일명 등 남로당 부하들이 고문에 의해서 그랬든지 어쨌든지 모두들 간첩행위를 했다고 이미 자백한 상황에서 ‘자발적 간첩행위’보다는 ‘객관적 상황’으로 인해 자신이 간첩이라고 자백해야 하는 상황에 몰렸던 것으로 보인다. 미군정하에서 혁명활동을 했던 남로당 출신이었던 관계로 이리저리 미국과 전혀 관계가 없다고 할 수 없는 수하들이 많았고, 박헌영은 이들을 비호해야 하는 입장에 있었던 것이다. 당시 박헌영·리승엽 사건을 대남 연락부에서 조사한 임무를 수행했던 신경완의 증언에 따르면, 백형복, 박종열 등 박헌영과 직접 관련이 없는 사람들이 미국 측의 지시를 받아 월북하여 박헌영과 리승엽을 찾아가 그 주변에서 맴돈 조직선이 5~6개나 됐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