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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시계획 이야기 5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 5

(서울 격동의 50년과 나의 증언)

손정목 (지은이)
  |  
한울(한울아카데미)
2019-05-20
  |  
17,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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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시계획 이야기 5

책 정보

· 제목 :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 5 (서울 격동의 50년과 나의 증언)
· 분류 : 국내도서 > 대학교재/전문서적 > 공학계열 > 도시/환경공학 > 도시계획/설계
· ISBN : 9788946066526
· 쪽수 : 292쪽

책 소개

88올림픽과 관련해서 남기고 싶은 이야기로 국내 최초의 상징조형물인 평화의 문, 서울에서 가장 덩치(용적)가 큰 단위건물인 롯데월드, 88올림픽이 개최 때 한창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던 이름만의 올림픽대교를 다룬다.

목차

황야의 무법자-3대공간 확충정책
1. 3대공간 확충정책을 표방하는 과정
2. 도로공간의 확충
3. 주차공간‧녹지공간 확충

신무기 개발기지가 서울대공원으로
1. 입지결정과정-박 대통령과 김재춘
2. 공원계획의 내용
3.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인구집중방지책과 행정수도 전말
1. 서울인구 격증과 인구집중방지책의 전개
2. 수도권 인구재배치계획과 과천 신도시 건설
3. 행정수도-1977년 말까지
4. KIST 지역개발연구소에서의 작업
5. 행정수도의 종말과 유산

주택 5백만 호 건설과 목동 신시가지 개발
1. 전두환 대통령과 주택 5백만 호 건설 발표
2. 택지개발촉진법의 시행과 결과
3. 서울에서의 공영개발과 목동지구 설계
4. 생존권(주거권)이라는 이름의 저항
5. 서부지구의 핵이 되었는가

저자소개

손정목 (지은이)    정보 더보기
1928년 경북 경주에서 태어나 경주중학(구제), 대구대학(현 영남대학교) 법과 전문부(구제)를 졸업하였다. 고려대학교 법정대학 법학과에 편입하자마자 6?25 전쟁이 발발하여 학업을 포기하고 서울을 탈출, 49일 만에 경주에 도착하였다. 1951년 제2회 고등고시에 합격하여 공직 생활을 시작하고 1957년 예천군에 최연소 군수로 취임하였다. 3?15부정선거 관련자로 3년간 실직하고 1963년에 행정서기관으로 복직하였다. 1966년 잡지 ≪도시문제≫ 창간에 관여, 1988년까지 23년간 편집위원을 맡았다. 1970년부터 1977년까지 서울특별시에서 기획관리관, 도시계획국장, 내무국장 등을 역임하였다. 1977년 서울시립대학(당시 서울산업대학) 부교수로 와서 교수?학부장?대학원장 등을 거쳐 1994년 정년퇴임하였다. 중앙도시계획위원회 위원, 서울시 시사편찬위원회위원장 등을 역임하였다. 저서 《조선시대 도시사회연구》(1977), 《한국개항기 도시사회경제사연구》(1982), 《한국개항기 도시변화과정연구》(1982), 《한국 현대도시의 발자취》(1988), 《일제강점기 도시계획연구》(1990), 《한국지방제도?자치사연구》(상?하)(1992), 《일제강점기 도시화과정연구》(1996), 《일제강점기 도시사회상연구》(1996) * 8월 29일 KBS <인물현대사> ‘김현옥 전 서울시장’편 출연 예정 * ≪역사비평≫2002년 12월호 ‘나의 학문 나의 인생’ 대담 중에서 도시계획 이야기나 현대도시사를 정리하면서 절치부심하실 것 같은데, 저는 이런 생각이 들거든요. 도시계획국장이나 도시계획 행정가로서 도시계획을 평가하려면 아무래도 자기 일이기 때문에 후하게 평가하겠지만, 학자로서 평가하라면 객관적이고 냉정해져서 평가에 인색할 거거든요. 사람이 그렇게 되기 마련인데, 선생님께서는 두 가지 입장을 모두 갖고 계시니, 만약 회고록을 쓰신다면 평가대상이 당신 자신이기 때문에 그런 데서 오는 갈등이나 고민이 있으실 것 같은데요.(웃음) -어느 저명한 교수가 미국유학을 하고 돌아온 지 얼마 안되어서 공식석상에서 우리 선배들은 무엇을 했느냐, 왜 도시를 이렇게 엉망으로 만들어놨느냐는 발언을 한 적이 있어요. 그러다가 아주 혼이 났습니다. 작년에 일본 도시계획학회 50년사에서 글을 써보내라고 해서 내가 이렇게 썼어요. “토지가 있고 돈이 있으면 인구가 10배가 늘든 20배가 늘든 아무런 문제가 안된다. 그런데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항상 일본의 1/10, 서울시 재정규모는 도쿄의 1/30, 서울시의 면적도 산을 빼고 나면 도쿄의 1/5밖에 안된다. 그런데 여기에 계속 사람들이 모여들었으니 어떻게 도시게획을 했겠느냐”고 썼습니다. 대담, 기발, 강압, 부조리 이것이 서울시 도시계획입니다. 예를 들면 김현옥, 양택식, 구자춘 이 세 사람이 서울시정을 맡았던 12년 8개월 동안에 도로, 상수도, 지하철 등 서울시의 하부구조가 다 완성되었습니다. 이때 했던 일은 미국사람이나 서양사람, 일본사람들 상식으로는 상상도 못할 것들이에요. 그렇게 안 하면 천만 명을 수용할 수 없는데 어떻게 했겠느냐는 거죠.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당시 행정담당자로서의 입장이시고요. -물론 문제가 있습니다. 1970, 80, 90년대 이 30년 동안 서울과 서울 주변의 아파트들이 다 지어졌습니다. 그러니 이것들이 수명을 다하는 때도 같이 오겠지요. 예를 들어 2030년이 되었을 때 어떻게 할 것인가? 이건 참 큰 문제입니다. 지금 청계천 복원 얘기가 나오면서 그때 왜 묻었느냐는 말이 나오는 것과 마찬가지겠죠. -30년 동안 지은 아파트 양에 비하면 청계천 정도는 문제도 아니지요. 지을 것은 또 짓는다치고, 지은 것들 파괴한 쓰레기를 다 어떻게 처리할 것이냐? 아무런 해답이 없어요. 일본이나 다른 나라에는 그런 아파트들이 없거든요. 그래서 일본 학자들이 “어떻게 할 거냐”고 물어요. 답변할 방법이 없지요. 그래서 웃으면서 “내가 죽고 난 뒤니까 내가 그런 데까지 머리 썩힐 필요가 없지”라고 대답하고는 속으로 국민소득 300불 시절에도 했는데 3만 불 시대에 무슨 일인들 못하겠느냐는 낙관적인 생각을 합니다. 그렇지만 과연 잘했던가? 내가 다 책임질 문제는 아니지만, 참 걱정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동안 워낙 많은 원고를 쓰셨는데… 원고량에서도 그렇지만, 원고료 액수로도 대한민국 1위가 아닐까 싶은데요. -한 장에 5,000원씩 잡아서 20만 장이면 10억인데, 그 이자로 아들 둘 미국유학 보냈고, 내가 지금 가진 전재산이 10억 가까이 될 거예요. 그러면 맞죠?(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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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김현옥 시장은 기발한 쇼맨이었고 탁월한 연출가였다. ‘도시는 선이다’라는 슬로건이 시청 정문에 게시되었을 때는 그 말이 지닌 의외성·함축성에 온 시민이 놀라워했다. “8월 15일까지 교통난 31%를 완화하겠다”는 공약에 접했을 때 많은 시민은 왜 30도 35도 아닌, 31%여야 하느냐에 오히려 감탄할 정도였다.
주요공사의 기공식·준공식을 3·1절이니 5·16, 8·15 또는 개천절을 택한 것도 그가 최초였다. ‘몇 월 며칠까지 완공하겠다’는 공약을 내건 것도 그였다. 세종로지하도도 무악재길도 삼일로도 그렇게 해서 개통되고 확장되었다. 그리고 가장 사람의 통행이 많은 시간에 이들 공사장 한가운데 헬멧을 쓰고 지휘봉을 든 그의 모습을 볼 수가 있었다. 한강개발을 할 때에는 시(詩)를 써서 각 언론기관에 돌리고 스스로도 그 시에 도취되는 그런 인물이었다.
_ 1권에서


45세 김현옥과 35세 김수근의 ‘일을 통한 최초의 만남’은 이렇게 시작되었고 이 단계에서 완전히 의기투합했다. ……김수근은 그 후의 시장들과도 매우 친숙한 관계를 맺었다. 구자춘 시장(1974~78년)과도 가까워 이른바 삼핵도시개발을 구상한 김형만은 김수근이 구자춘에게 소개한 인물이다. 그리고 이 구자춘 시장 재임시에 김수근은 잠실대운동장(훗날 올림픽 주경기장) 설계에 착수했고 그 작업은 그후 정상천·박영수·김성배·염보현 시장으로 이어지는 1986년까지 계속되었다. 특히 김성배 시장은 김수근을 대단히 좋아해서 김 시장이 목동개발계획을 수립할 때 김수근을 불러 상의했고 그 결과 김수근과 그가 추천한 인물들에 의해서 오늘날의 목동지구가 실현되었다.
_ 1권에서


“청와대와 상공부장관이 돈을 내고 서울시 도시계획국장이 하수인으로서 토지를 매점하고 서울특별시장이 땅값 빨리 올라라 깃발을 흔들고 많은 시민이 땅값 올리기에 동참을 했으니” 생각해보면 온 국민의 분통이 터지는 웃지 못할 만화요 연극이었다. 연극이라면 그것을 희극으로 볼 것인가 비극으로 볼 것인가. 여하튼 1970년 전반에 4,500∼6,000원이던 강남의 땅값은 1971년 전반에는 1만 4천~1만 6천 원이 되었다. ……1963년의 땅값수준(지수)을 100으로 했을 때 1970년 현재, 현 강남구 학동은 2,000, 압구정동은 2,500, 신사동은 5,000이었다. 7년간에 각각 20·25·50배가 오른 것이다. 같은 기간에 중구 신당동과 용산구 후암동의 땅값은 각각 10배와 7.5배가 오른 데 불과했다. 그런데 1970년대의 말 즉 1979년 현재로 학동·압구정동·신사동의 지가지수는 각각 13만 3,333과 8만 7,500 그리고 10만이었다. 즉 1963년에서 1979년에 이르는 16년간에 학동의 땅값은 1천 333배가 오르고 압구정동은 875배 올랐으며 신사동은 1천 배가 오른 것이었다. 그리고 같은 기간(1963∼79년) 중구 신당동과 용산구 후암동은 각각 25배씩 올랐던 것이다. 이러한 현상을 가리켜 ‘말죽거리 신화’라고 표현하게 된다. 그리고 강남의 땅값 상승 즉 이른바 말죽거리 신화는 1980년대에 들어서도 계속되었고 1990년대에 들어서도 식을 줄 모르고 꾸준히 지속되었다.
_ 3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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