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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종교/역학 > 기독교(개신교) > 기독교(개신교) 신앙생활 > 신앙생활일반
· ISBN : 9788953115828
· 쪽수 : 204쪽
· 출판일 : 2011-05-09
책 소개
목차
Part 1. 크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
1. 창조와 재창조의 하나님
2. 약한 자에게 능력이 되시는 하나님
3. 보는 것으로 살지 않는 삶
4. 크신 하나님
5. 거룩하신 하나님
6. 경이롭고 아름다우신 하나님
7. 내 대신 죽으신 하나님
8. 은밀한 복음을 밝히시는 하나님
Part 2. 살며 사랑하는 믿음
9. 이 땅에서 오늘을 잘 살아내는 것
10. 그리스도로 옷 입기
11. 관계의 문제를 해결하는 법
12. 생각이 다른 사람과 충돌할 때
13. 언제나 순종으로 반응하기
14. 결혼생활에도 믿음이 필요하다
15. 사랑으로 산다는 것
Part 3. 어둠 속을 걷는 믿음
16. 누구나 인생에 어둠이 찾아온다
17. 언제든 하나님의 약속 붙잡기
18. 절망적인 상황에서는 구체적으로 구하라
19. 지금은 아플지라도 고난은 유익이다
20. 천국에 소망을 두는 삶
리뷰
책속에서
때로 믿음은 어둠 속으로 뛰어드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 뛰어드는 행위는 언제나 어두운 곳에서 들려오는 음성에 대한 순종, 즉 “마음 놓고 점프해! 내가 잡아 줄게”라고 외치는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해서 뛰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애매한 낙관주의나 인생에 대한 종교적 접근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 자신이 어떤 분인지 나사렛 예수 안에서 분명하게 보여 주신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첫째, 하나님이 거룩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잘 안다는 것을 뜻한다. 예수님의 생애가 그런 부분에 대한 의심의 여지를 남겨 놓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 하나님이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뜻한다. 예수님의 죽음을 볼 때 그 부분에 대해 의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셋째, 하나님이 새 생명을 주신다는 것을 뜻한다. 예수님의 부활이 그 사실을 확증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볼 수 없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분명하게 보여 주셨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우선적으로 요구하시는 것은 대단한 믿음이 아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눅 17:5)라고 말했을 때, 예수님은 그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이 겨자씨만한 믿음이라고 대답하셨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큰 믿음이 아니라 크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다. 이 믿음은 아브라함의 경우처럼 하나님의 약속을 듣고, 믿고, 그 위에서 행하는 것에서 온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약속은 무엇이고 또 그것은 누구를 위한 것일까? 먼저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 모두를 위한 것이다. 그것은 자신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 왔음을 기억하는 사람,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생명을 주는 말씀’을 다시 들어야 할 필요가 있는 사람,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물어물 살아 온 사람, 내일 하루와 다음 일주일의 삶을 위한 힘을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에서 얻어야 하는 사람을 위한 것이다. 또한 아직 하나님을 신뢰해 본 적이 없는 모든 사람과 그 결과 자신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급박하게 하나님을 신뢰해야 할 필요가 있는 사람들을 향해서도 열려 있다.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 모두에게 온다.
우리가 어떤 시점에 정말로 행하기 원하지 않는 것들을 행할 때, 세상은 그런 우리를 위선자라 부른다. 우리가 어떤 것을 정말로 행하기 원하지 않으면서도 습관적으로 그것을 행하면,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위선적이라고 칭한다.
그러나 만일 그런 식으로 살고 있다면 우리는 일관성이 없는, 순종하지 않는, 이기적인, 동요하는, 경건하지 못한 그리스도인일지는 몰라도 결코 위선자는 아니다. 그들이 말한 대로라면, 십계명을 지키고 싶다고 느껴질 때만 지켜야 하고 그렇게 느껴지지 않을 때는 지키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인가? 우리의 도덕적 기준이 날씨에 따라 시시때때로 변하는 우리의 감정 상태에 따라 바뀌어야 하는가?
요즈음 우리는 소위 사람들이 ‘진실성’이라 칭하는 것, 즉 순간의 기분에 언제나 충실해야 하는 것 때문에 쓸데없는 몸살을 앓는다. 그것은 예수님이 마태복음 5-6장에서 말씀하신 것을 혼동하는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을 무척이나 괴롭힌다. 하지만 예수님은 감정에 대해 말씀하시지 않았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율법에 대해, 그리고 우리가 그것을 마음을 다해서 지켜야 하는 것에 대해 말씀하신다. 예를 들어 우리가 규칙적으로 기도해야 한다고 하나님이 말씀하신다면, 우리는 그 말씀에 순종하여 규칙적으로 기도해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우리의 기본 의무라고 이미 아는 그것에 우리 마음과 감정이 일치하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의무로 한다고요?”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할지 모른다. “그것은 자신을 터무니없이 과장해서 사람들한테 보여 주는 것 아닌가요?” 어떤 점에서는 그렇다. 그렇지만 우리가 거룩하지 않은 것처럼 느껴질 때,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라는 말씀에 순종하지도 않고, 주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나타내 보여 주지 않는다면,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진실성을 지키기 위해 순종을 저버린 것이 된다(레 11:45, 벧전 1:16 참조). 그래서 내가 앞에서 그리스도인들이 환영해야 할 위선이 있다고 말한 것이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옷으로 ‘입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보여 주라고 말한다(갈 3:27 참조). 우리의 감정이 마지못해 제 자리로 돌아가는 것은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란 걸 깨닫고 순종할 때뿐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을 읽고자 하는 의욕이 없이 단지 읽어야 한다는 의무에서 성경을 읽기 시작하지만, 결국에는 그 의무에 뒤이어 강렬한 의욕과 말할 수 없는 기쁨이 따라오는 것을 발견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이러한 긴장 속에서 살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이 전적으로 그런 긴장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바울이 ‘성령을 거스르는 육체의 소욕’과 ‘육체를 거스르는 성령의 소욕’이라 칭한 것이 그것이다(갈 5:17 참조). 만약에 이러한 긴장 속에서 사는 것이 위선이라면, 모든 그리스도인이 위선자라고 불리어야 할 것이다.
사람들은 언제나 모든 것이 잘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교회나 ‘건강한’ 것처럼 보이는 교회에 소속되어 있다는 사실에서 ‘거짓된 든든함’을 느끼고 싶어 한다. 우리가 천국의 이편에서 약속을 받은 것보다 더 순수한 교회나 더 순수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찾으려고 시도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다른 어떤 것에 기초하여 안도감과 구원의 확신을 얻으려고 위험을 무릅쓰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들에 기초해서는 안도감과 구원의 확신을 얻을 수 없다. 또 그렇게 해서도 안 된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게 아니라 믿음을 따라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말은 다소 불만족스럽더라도 우리가 차선의 것들에 만족해야 한다는 의미일까? 아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과 교회가 죄와 오류에 물들지 않도록 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그러한 표준에 도달했다거나 당연히 그러한 삶을 살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빌 3장 참조).
복음의 영광스러운 점은 이런 것들을 문제 삼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전에는 완벽한 삶을 살지 못했다가 지금은 완벽한 삶을 살게 되었기 때문이 아니다. 완벽한 삶에 대한 환상은 속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율법주의에 불과하다. 우리가 천국에 가게 되는 것은 오로지 십자가에서 보여 주신 하나님의 사랑 덕택이다. 우리는 믿음으로만 그 사랑을 알 수 있고 받아들일 수 있다.
우리는 예배를 인도하는 사람의 말이나 예배 의식이 조금이라도 바뀌면 교인들이 여지없이 불평하는 교회에서 이런 ‘거짓된 든든함’에 대한 동경, ‘보이는 것’에 대한 욕구를 발견할 수 있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시며 당신 인생을 위한 놀라운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라고 말함으로써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할 때에도 그런 마음이 발견될 수 있다.
물론 하나님이 그들을 사랑하시며 그들을 위한 놀라운 계획을 갖고 계시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이들이 자기 십자가를 지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야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막 8:34 참조).
그리고 우리는 많은 사람은 죄라고 느낄지 모르지만, 성경에 의하면 그 자체로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은 다양한 구체적 행위들에서 죄나 세속성을 정의하려는 태도에서도 그런 것들을 볼 수 있다(롬 14장 참조). 그런 태도는 바로, “네가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깔끔하게 정리한 목록이 여기 있어! 이 규칙들을 지키면 괜찮을 것이지만 어기면 타락하고 말거야”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문제는 참된 기독교가 그런 게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믿음으로 행하지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않는다. 물론 살인이나 간음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는, 제 정신인 그리스도인이라면 그 누구도 범할 생각을 하지 못하는 중요한 윤리 규범들이 있다. 또한 어떤 것이 정말로 중요한 것이고 어떤 것이 아무래도 괜찮은 것이냐 하는 것에 대해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엇갈리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진실한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엇갈리는 중요한 문제들을 나름대로 정의함으로써 안정감을 얻으려고 하는 시도는 보이는 것을 따라 살려는 시도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것보다 훨씬 더 어렵다. 모든 사물에 꼬리표를 덕지덕지 붙이는 것은 어린아이에게는 유익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성숙하고 성경적인 그리스도인이 추구해야 할 삶의 모습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