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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ISBN : 9788958244943
· 쪽수 : 220쪽
· 출판일 : 2024-02-20
책 소개
목차
여름의 여름 9
루르마랭 워크숍 31
자술 59
바다의 목소리 81
미궁 105
거위요리를 아시나요? 125
운조의 숲 145
이스크라 167
리뷰 205
작가의 말 216
저자소개
리뷰
책속에서
창문에 비치는 까만 밤 위에 별이 총총 박혀 수런거렸다.
“별님도 외로울 텐데 같이 나가세.”
별님을 혼자 둘 수 없다는 자술의 아름다운 대사에 취해 집 밖으로 나왔다. 캄캄한 원시의 숲속을 바람이 간질이는 손길에 물소리가 히득거리며 원을 그렸다. 하늘엔 별들의 수다가, 땅엔 자술의 수다가 밤빛을 마르게 하고 있었다.
“노래 한 판 할게. 자네도 하난 해야 해.”
얼큰한 술기운에 고개를 끄덕였다. 봄밤의 유희는 얼마 만인가. 내 몸에 기쁨의 에너지를 모두 불러모았다.
자술은 <봄날은 가고>를 불렀고 나는 <맨발의 청춘>을 불렀다. 선홍빛의 봄날은 가고 있었고 맨발의 청춘은 헤매고 있었다.
“이제 우리 친구지.”
자술이 내 등에 호미와 노동으로 생을 견뎌온 여든 살의 다정하고 당당한 손을 얹었다. 나는 손을 내밀어 자술의 손을 잡았다. 그 위로 별빛 한 점이 떨어졌고 벚꽃 한 잎이 내려와 앉았다. 고라니 울음도 다정하게 들리는 봄 밤이었다.
- <자술>에서
일요일이었다. 앞마당으로 나오니 고요했다. 들일을 나가는 시간이다. 부엌문을 밀치고 들어갔다. 부뚜막 위에 밥과 국이 덮여있다. 밥 한 그릇을 국에 말아 후딱 해치웠다. 구수한 된장 맛이 속을 따뜻하게 어루만졌다. 할머니가 내 밥을 남겨두었다.
이 집에서 내가 가장 아끼는 토끼들이 있는 곳으로 갔다. 나는 토끼들을 아름다운 이름으로 불렀다. 영원과 하루. 담임인 털보 선생님이 준 코피 묻은 책갈피 속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하루의 열정이 영원으로 가는 돌을 놓는다.>
털보 선생님은 혼자 돈을 벌며 공부했다. 그러다가 사는 것이 힘들어 죽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그런데 코피를 쏟은 책 위에 엎드려 새벽빛을 보는 순간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단다. 선생님은 지금은 내 상황이 힘들지만 극복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그 순간, 삶의 극복보다는 코피 묻은 책갈피 위에 엎드려 있는 청년과 그 위에 쏟아지는 햇빛의 이미지에 황홀함을 느꼈다.
영원과 하루가 입을 오물거리며 입질을 했다. 어제 뜯어놓은 민들레, 쑥, 질경이, 명아주, 냉이, 쇠비름을 섞어서 토끼장에 넣어 주었다. 미나리아제비, 애기똥풀, 족두리풀, 쥐손이풀은 토끼가 먹으면 위험해 조심해서 뜯어야 했다. 도시에서 살다 온 나는 이런 일이 서툴렀으나 사랑하는 토끼를 위해 열심히 관찰하고 주의해서 토끼풀을 뜯었다. 하루와 영원이가 입을 오물거리며 그물망 사이로 내미는 풀을 받아먹었다. 영원이는 입에 내 손이 닿으면 몸이라도 다 핥아주겠다는 듯이 손가락을 간지럽혔다. 영원이도 내가 좋은가 보다.
곧 헛간 옆에서 토끼풀을 뜯어야겠다. 개울이 흐르는 헛간 옆에서, 아이들은 소에게 풀을 먹이려고 끌고 와 묶어 놓고는 서로 몸을 밀치기도 하고 장난질을 하며, 토끼풀을 뜯었다.
나는 사실 이런 영혼 없는 놀이에는 관심이 없다. 도서관도 영화관도 없는 이곳 아이들이 할 수 있는 놀이는 산이나 들을 뛰어다니는 지루한 것들뿐이다. 물론 자연에도 영혼은 흐르지만 나는 아직 책 속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영혼을 더 사랑한다.
영원이와 하루를 들여다보다 어제 오주와 한 약속이 생각나 속옷과 양말을 담아 개울가로 내려왔다. 내려오면서 건너편 언덕 위를 쳐다보니 멀리 버스가 지나가며 먼지를 날렸다. 찔레 넝쿨이 함부로 자라 발이 걸렸다. 찔레꽃을 따서 입에 넣었다. 하얗고 싱그러운 꽃 맛이 입안 가득 퍼졌다.
노래를 부르고 있는 오주는 내가 걸어오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나는 신발을 벗었다. 자갈돌이 햇빛을 머금고 있어 발바닥이 따갑다. 나는 스타카토로 발바닥을 들어 올리며 물었다.
“언제 왔어?”
“ 빨리 와, 기다렸잖아.”
“오, 해피데이, 오, 해피데이”
오주가 바위 위에 서서 궁둥이를 씰룩거리며 손가락으로 번갈아 하늘을 찔러댔다.
널찍한 돌 위에 빨래를 담은 세숫대야를 놓고 앉으니 도로를 달리는 버스가 보였다. 1년 전, 사흘 후에 오겠다던 엄마의 약속을 믿고 도로가 보이는 언덕에 올라 매일 도시 쪽에서 들어오는 버스를 기다렸다. 버스가 설 때마다 벌떡 일어나 내리는 사람들을 유심히 바라보았고 그때마다 내 심장은 터질 것 같았다. 1년이 지나도록 엄마는 나타나지 않았고 아직도 버스가 보이면 나는 목을 길게 빼고 도로를 내다보고는 한다.
그러는 동안, 내 몸속에 들어앉았던 그리움이란 감정이 슬슬 궁둥이를 뒤로 빼면서 다르게 변해가는 것을 느꼈다. 엄마를 생각하며 들숨을 쉴 때마다 감정은 이상하게 변해간다. 나는 이 감정변화에 이름을 붙였다.
‘분노의 풍선 불기.’
분노가 풍선처럼 커지면서 피를 타고 돌기 시작하면 누군가를 죽여 버리고 싶은 증오가 분수처럼 솟아올랐다. 사람들은 그러면 착한 아이가 될 수 없다고 말하겠지만 나는 착한 아이보다는 살아남는 아이가 되고 싶다.
- <여름의 여름>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