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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추리/미스터리소설 > 한국 추리/미스터리소설
· ISBN : 9788959134571
· 쪽수 : 338쪽
책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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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저하, 한 남자가 나무 기둥에 묶여 있는데 커다란 파도가 들이치기 시작합니다.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세자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채제공이 묻는 의미를 이해한 것이다.
“그 남자를 죽이려는 자들이 끝까지 지키고 서 있다면 아마 죽는 것이 맞을 것이오. 하지만 내 생각에는 그렇게 되지는 않을 것 같군요.”
“어찌 확신하시옵니까?”
“큰 힘을 가진 이들은 가끔 결정적인 순간에 오만으로 일을 그르치는 못된 습관이 있기 때문이오.”
“그렇지만 여전히 나무에 묶여 있습니다. 들이치는 파도는 집채도 삼킬 수 있을 정도로 위험합니다. 어찌하시겠습니까?”
세자의 표정이 다시 차가워졌다. 어떤 감정도 느낄 수 없는 냉정한 표정에서 채제공은 믿음을 보았다. 세자가 믿고 있는 어떤 것, 어떤 사실, 어떤 사람, 어떤 약속.
“그 남자는 작은 칼을 하나 가지고 있소. 그러니 죽지 않아요.”
나무에 묶인 남자가 품에 지닌 작은 칼이란 무엇일까. 그리고 그 칼은 정말 나무에 묶여 있는 사람을 구할 수 있을까. 어찌 이리도 자신하시는 것일까.
저하께서는 복안을 가지고 계신 것일까. 그리고 그 복안이 노론의 방심과 오만의 틈바구니를 뚫을 수 있을까.
깊디깊은 강을 닮은 분. 강의 물살이 약하다 하여 흐름을 멈춘 것은 아니다. 그렇게 보일지라도 흐름을 멈춘 강이란 이 세상에 없다. 겉으로 드러내지 않을 뿐 쉬지 않고 차가워지고 있고 누구보다 수면 밖과 강바닥의 상황을 잘 이해하고 있다. 그리고 기회를 노리고 있다. 세자의 목소리와 자신감 있는 표정에서 채제공은 저하를 믿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 1권
“혀를 빼물고 있진 않았습니다. 오히려 어떤 꽃을 입에 물고 있었지요.”
“알겠네.”
유문승이 고개를 끄덕였다.
최헌직은 목매달려 죽은 것이 아니다. 등과 갈비뼈 근처의 상처로 인한 과다 출혈로 죽은 것이다. 목에 난 새끼줄 자국이 하얀 것이 그 첫 번째 증거였다. 의사자는 정맥이 막히기 때문에 얼굴 전체에 검붉은 울혈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러나 최헌직의 얼굴은 멀쩡했다. 두 번째 증거는 훈도의 증언처럼 혀를 빼물지 않았다는 것이다.
확실히 율학훈도는 처음 발견했을 당시 교사가 아니라 어딘가에서 죽임을 당한 뒤 시체가 옮겨졌을 가능성을 정확한 정황에 맞추어 이야기했고, 유문승의 생각도 동일했다.
얼마나 스산한 모습이었을까. 어둠 속에서 드러난 시체가 나무에 매달린 채 입에 꽃을 물고 피를 뚝뚝 흘리고 있었으니.
- 1권
조선은 임진년과 병자년의 난리를 겪은 뒤 빠르게 회복했지만 깊은 곳의 고름은 손도 대지 못하고 있었다. 조선은 노론에 잠식당한 뒤 균형을 잃어버린 채 점점 안에서부터 썩어가고 있다.
그는 어렵게 사헌부에 대한 환상에서 벗어났다. 무의미한 나날이 계속되고 있던 차에 일 년 전 유문승이 의금부에서 병조로 옮겨왔다. 내병조를 담당하는 좌랑의 자리가 유문승의 직무였는데 그 조직 안에 원찬식이 있었다. 직속상관인 유문승을 처음 만난 날의 느낌을 원찬식은 잊을 수 없었다. 큰 키에 검게 그을린 피부, 억척스러운 팔뚝은 마치 막농꾼을 연상시켰다. 갑과로 합격한 사람이라고는 도저히 볼 수 없었다.
원찬식이 본 유문승은 반반한 가문의 후손도 아닌 자가 너무나 당당했다. 권문세가 앞에서도 결코 눈을 내리깔지 않았고 병판 앞에서도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또한 품계와는 상관없이 능력이 있고 노력하는 자를 가까이 두었다. 그 때문에 위계질서를 염려하는 목소리가 병조 내부에서 들끓기도 했지만 유문승은 결연했다.
- 1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