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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영화의 서술과 기억

중국영화의 서술과 기억

루홍스 (지은이), 김정욱 (옮긴이)
  |  
전남대학교출판부
2013-01-27
  |  
22,000원

일반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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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영화의 서술과 기억

책 정보

· 제목 : 중국영화의 서술과 기억 
· 분류 : 국내도서 > 대학교재/전문서적 > 예체능계열 > 연극/영화
· ISBN : 9788968490842
· 쪽수 : 486쪽

책 소개

중국 무성영화 연구에 남다른 성과를 남긴 루홍스 교수의 집필 부분과 조기 영화인들을 탐방하여 인터뷰한 소중한 자료를 모아 재탄생한 작품이다. 이전에 출간했던 <중국영화사>의 내용을 수정, 보충하였다.

목차

한국어판 서문 _5
옮긴이 서문 _7

제1장 페이드 인 Fade-in 漸顯 1905-1931
제2장 포커스 인 Focus-in 調焦 1931-1937
제3장 페러렐 몽타주 Parallel Montage 平行蒙太奇 1937-1945
제4장 로케이션 프로세싱 Location Processing 實景加工 1945-1949
영화구술사 소인(小引)/ 203
제5장 감독의 역사 기억-영화구술사의 하나
제6장 배우의 역사 기억-영화구술사의 둘
제7장 촬영기사/녹음기사의 역사 기억-영화구술사의 셋
제8장 극작가/영화평론가의 역사 기억-영화구술사의 넷

부록 하나 임경태와 첫번째 국산 영화 고찰 평가/ 378
부록 둘 천일영화사와 중국 조기 영화산업/ 395
부록 셋 중국영화 연대기/ 418
후기/ 464
찾아보기/ 469

저자소개

루홍스 (지은이)    정보 더보기
1963년 출생. 1983년 북경사범대학 중문과를 졸업한 후 중국 영화사의 초창기 연구에 몰두했다. 영화사에 대한 논문 및 영화평론이 200여 편이며, 저서로는 「중국 영화:서술과 해석(中國電影:敍述與闡釋)」ㆍ「세계영화전기록(世界電影全紀錄)」ㆍ「중국예술백과사전ㆍ영화권(中國藝術百科辭典ㆍ電影卷)」 등이 있다. 요즈음 영화사 관련한 텔레비전 프로그램 기획에 참여하며 52회에 달하는 대형 텔레비전 프로그램『중국 영화(中國電影)』의 전체 원고를 쓰고 편집 감독을 맡았다. 현재 국가방송영화텔레비전총국 영화위성채널 프로그램 제작 센터 프로그램 부서 부주임이며 연구원이다. CCTV-6 등 여러 영화 채널의 프로그램 편성과 제작을 주관하고 있으며,『중국은막(中國銀幕)』잡지의 총 감독이며 중국예술연구원 대학원 교수이다. 중국예술연구원 영시연구소 중국영화연구실 주임,『북경전영 학원학보(北京電影學院學報)』 부 편집을 역임한 바 있다.『중국영화사: 초창기 중국 영화의 서술과 기억(中國電影史: 早期中國電影的敍述與記憶』ㆍ『중국 영화: 서술과 해석(中國電影:敍述與闡釋)』 등 학술 저작을 출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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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욱 (옮긴이)    정보 더보기
문학박사이며, 전남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이고 중국 현ㆍ당대 연극ㆍ영화가 전공이다. 상해사범대학에서 교환교수로 근무(2008-2009)하였으며, ‘중국영화 포럼’광주 대표이다, 홍콩 중문대학(中文大學) 아주과정(亞洲課程:IASP) 이수, 상해씨어터아카데미(上海戱劇學院:Shanghai Theatre Academy)에서 수학, 베이징필름아카데미(北京電影學院:Beijing film Academy) 연구소(대학원)에서 영화 이론(각색론)을 연구하여 수료하였다. 「중국 현대 역사극 창작론과 비극 론의 연관성 연구」 등 중국 현ㆍ당대 연극 이론 논문이 여러 편 있으며,「『神女』를 보는 어떤 한 장의 지도」,「상하이 영화 연구Ⅰ」,「『阿詩瑪』의 詩的 原型과 영상 서사 연구(상/하)」, 「소설ㆍ연극ㆍ영화 서사의 연환(連環) 비교 연구」,「중국‘左翼 영화’의 匿名과 正名」등 중국영화에 대한 논문이 있다. 중국TV드라마에 대한 논문으로 「상하이 도시문화 연구」,「중국 TV드라마『금혼(金婚)』의 서사 구성 연구」등이 있다. 저서로는「중국의 이해」(공저),「영화로 읽는 중국」(공저),「상하 이 영화와 상하이인의 정체성」(공저),「20세기 상하이 영화: 역사와 해제」(공저)가 있으며, 역서로는『차이나 시네마』(2002), 『중국영화사』(2013)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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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머리말]

2012년 어느덧, 한중 수교 20돌을 맞고 있다. 지난해 제17회 부산국제영화제의 개막작은 홍콩 영화 『콜드 워(Cold War)』이고 70여 편에 육박하는 화어권(華語圈) 영화가 초청되어 절찬리에 상영되었으며 BCF(부산시네마포럼)의 후원으로 ‘중국 주선율(主旋律)영화의 미학과 정치적 담론’을 주제로 한 제1회 중국영화 포럼도 열렸다. 그리고 중국 「봉황망 오락(鳳凰網 娛樂)」 기자가 인터뷰를 청하여 역자는 한중 영화의 바람직한 미래와 문제점 등에 대해 그와 유쾌한 담소를 나누었다. 이후 이 인터뷰 내용은 「한국 학자가 중국영화를 말하다: 대작의 범람 속에 본토 특색의 결핍(韓國學者談中國電影: 大片氾濫缺乏本土特色)」으로 기사화 되었다. 중국영화는 이제 더 이상 중화민족의 전유물이 아니며 한국, 일본과 더불어 동아시아 영상 문화를 이끌어 갈 한 축으로 창의적 변신을 거듭 해가야 할 시점에 와 있다는 생각이 든다.
1905년 북경에서 영화 『정군산(定軍山)』을 제작하고 중국영화사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1930년대 올드 상하이(Old Shanghai) 영화는 당시 아시아 영화의 산실(産室)이었고 근대의 기형적, 혼종(混種)적 공간이었던 상해를 무대로 수많은 영상 실험을 하였다. 그러던 중국영화는 어느새, 탄생 100주년을 훌쩍 넘겼으며, 북경시(北京市) 조양구 남영로(南影路) 9호(號)에 이를 기념하는 근사한 중국영화박물관(中國電影博物館 China National Film Museum)이 신축되어 있다. 과거, 늘 아름다운 기억 속에 머물 수도 있지만 당금(當今)의 중국영화를 눈 여겨 보면 구미(歐美)의 영화들이 앞 다투어 상해탄(上海灘)에 수입되어 ‘동방의 할리우드’를 꿈꾸며 각축을 벌이던 그 시절만 못하다는 미만(未滿)한 정감이 마음 한구석 어딘가에 도사리고 있다.
중국영화사라면 아무래도 『중국영화발전사(中國電影發展史)』(程季華 主編, 1963년 초판)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1980년 이후, 비교적 자유로운 사회문화적 분위기에서 불이 붙은 ‘영화사 다시 쓰기(重寫)’의 바람을 타고 거의 경전(經典)으로 확고한 자리를 굳힌 이 영화사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특히 2005년, 중국영화 탄생 100주년을 앞뒤로 출간된 수많은 영화사 유형의 저작에서 『중국영화발전사(中國電影發展史)』와 다른 시각에서 구성된 신선하고 창의적인 서술의 중국영화사들이 속속 출간되고 있다. 중국영화 연구자 입장에서 여간 반가운 일이다.
1949년 이전의 중국영화사에서 가장 쟁점이 되었던 시기는 아마 1930년대일 것이다. 이 시기를 『중국영화발전사』에서는 ‘좌익영화운동 시기(1932-1937)’로 구분하고, 중일전쟁(1937. 7. 7.) 이후부터 1945년 8월 15일까지를 ‘항전영화(抗戰電影)’로 시기 구분을 하여 왔다. 이 시기 구분과 ‘좌익영화’라는 서술어는 여태까지 중국영화사의 주요 담론이 되어 당연한 사실로 실사구시(實事求是)적 분석에 따른 실증적 문제제기가 저만치 유보된 채로 반세기(半世紀)가 넘는 세월동안 중국영화사의 전설로 고스란히 간직되어 왔다.
루홍스는 중국 무성영화 연구의 권위자이고 1949년 이전의 영화사에 대한 남다른 관점이 있다. 그는 이 시기를 슈샤오밍과 공저한 『중국영화사』(문화예술출판사, 1998)에서 1930년대, 이 시기를 구분하면서 다른 서술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 저서는 1949년 이전의 시기를 루홍스가 맡았고, 1949년 이후는 슈샤오밍이 각각 독립하여 집필한 중국영화사이다. 루홍스는 중국영화사에서 『중국영화발전사』와 이후 주류 담론에서 ‘좌익영화문화운동시기’로 구분했던 1930년대를 ‘신흥영화운동(新興電影運動)’ 시기로 규정하고 있다. 그리고 본 역서의 원저인 『중국 조기 영화사 1905-1949』에서는 상세한 주석(원문 61쪽, 주1)을 달아 자신의 시각에 대한 소상한 논거를 대고 있다. 그는 1930년대 당시의 문헌 자료를 낱낱이 검색하여 실제로 ‘신흥영화(興電影)’라는 술어가 훨씬 더 많이 쓰이고 있었다는 사실(史實)을 발굴하여 논증하고 있다. 참으로 신선하고 성실한 영화사학자의 모습에 찬사(讚辭)를 보내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
그동안 ‘좌익영화운동’ 시기의 영화를 ‘좌익영화’로 명명하면서 파생된 여러 가지 문제점이 드러났으며, 중국에서도 『중국영화발전사』의 홍색(紅色)으로 편향된 관점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면서 일부 중국영화사에서 ‘좌익영화’를 ‘신흥영화’, ‘신생영화’, ‘진보영화’, ‘도시평민영화’ 등의 새로운 이름으로 명명하고 있다.
루홍스의 관점에 흥미를 느낀 역자가 1930년대를 전후한 소련 및 아시아 ‘좌익’ 영화문화계의 기록을 검색하여 보더라도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KAPF) 계열의 조직으로 ‘신흥영화예술가동맹(1929)’이 결성되었으며, 전일본무산자예술동맹(NAPF)에서는 『신흥영화』라는 잡지를 발간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루홍스의 이런 관점은 조기 중국영화사 서술에서 몹시 돋보이는 시도로 충분히 평가할 수 있다.
이 책은 중국 무성영화 연구에 남다른 성과를 남긴 루홍스 교수가 중국영화의 태동에서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전의 역사를 편년체 형식으로 꾸며 놓은 역작이다. 이 저작은 앞서 슈샤오밍과 공저한 『중국영화사』의 내용을 기본으로 하고 저자의 상세한 주석을 첨부했으며 일부 내용을 상당히 보충했다. 루홍스, 슈샤오밍의 공저였던 저작은 역자가 한중 수교 10주년이 되던 2002년에 『차이나시네마』(도서출판 동인)로 번역 출판하였다. 그동안 이 번역서에 대한 저간의 평어(評語)를 귀담아 들어보니 루홍스가 맡았던 당대(當代) 이전의 영화사 서술이 보다 인상적이었다는 의견이 다수 있었고, 중국의 평가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소식을 들었던 적이 있다.
『중국 조기 영화사』는 루홍스 교수의 집필 부분과 조기 영화인들을 탐방하여 인터뷰한 소중한 자료를 모아 구성한 몹시 의미 있는 편집으로 재탄생한 작품이다. 이전에 출간했던 『중국영화사』의 내용을 수정, 보충하였으며, 그 시기의 중요한 사진을 적재적소에 새로 끼워 넣었고 소상한 주석을 첨가하고 있다. 사실 『차이나시네마』의 주석은 ‘중국영화’하면 그 당시만 하더라도 다소 생소했을 한국의 독자를 위해 역자가 삽입한 내용이었다. 그 당시, 이 번역서는 중국인 학자들이 저술한 영화사로는 최초로 한국에 선보인 중국영화사여서 그만한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이번 번역본에는 저자 루홍스가 새로 삽입한 주석과 역자가 다시 조금 더 수정 보충한 내용을 첨부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조금은 미진했던 부분과 문체를 저자가 손을 보았으며, 특히 제1장 제4절 ‘상업 경쟁을 향해서’ 항목은 상당 분량을 보충하고 있다. 또 ‘부록 셋’ 중국영화연대기는 이번에 『차이나시네마』 이후 수정 증보한 『중국영화사』(2012, 전남대학교출판부)의 내용을 바탕으로 1949년까지 다른 사료(史料)를 발굴하여 덧보탰으며, 홍콩, 대만 부분을 첨가하여 보다 자세한 연대기를 만들어 보았다.
당금(當今)의 중국영화는 ‘주선율’ 영화, 지하영화, 대중영화로 크게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등소평(鄧小平)은 “일체 진선미(眞善美)를 선전하는 것은 주선율 영화다”라고 선언한 적이 있다. 당과 정부의 정치적 입장을 널리 알리고 현실 사회문화에 대한 긍정적 정서를 듬뿍 심어주는 영화이고, 그에 따른 기준으로 평가하여 영화인들에게 포상을 하기도 하는 관방(官方) 지향의 영화다. 그래서 평가할만한 『중국당대영화사(中國當代電影史)』에서는 “‘주선율’을 노래하라”며 한 장(章)을 내어 주고 있다.
중국영화가 국제영화제에서 수상한 경력을 더듬어 보면 1935년 모스크바영화제에서 영예상을 받은 『어광곡(漁光曲)』이다. 그리고 세계영화사에 중국영화의 남다른 족적을 남긴 영화라면 아무래도 국제영화제의 레드 카펫을 걸었던 제5세대 감독들의 영화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 시점이 1980년대 중후반이 되고 그 세대 감독의 영화를 기점으로 일부 차세대 감독들의 영화가 요즈음 주목을 받고 있다. 다름 아닌 제5세대 이후의 제6세대, 신생대 등으로 서술되며 1990년대 이후 활발하게 영화계를 누비는 청년 감독 이른바 ‘지하영화’를 주도하고 있는 그룹들이다. 그리고 다른 한 쪽이 펑시아오강(馮小剛) 등 중국 국내영화의 흥행몰이에 성공한 대중영화 감독들이다.
어쨌거나 중국당대영화사에서 중국영화를 외부 세계와 소통을 하도록 물꼬를 튼 감독들은 제5세대이고 이 그룹, 특히 쟝이모우(張藝謀)는 지난 시절에 ‘오리엔탈리즘’이라는 모자를 쓰고 한동안 “낙후되고 남루하고 봉건적 요소가 잔존하는 중국의 고리타분한 이야기를 서양인들의 입맛에 딱 맞게 재구성”하여 일부 성과를 얻었을 뿐으로 폄하되기도 했다. 그 다음 세대들도 제5세대와 다른 자기들 나름의 독자성을 강조하며 한때, ‘선언’을 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떤가? 제5세대가 서부 황토 고원을 중원의 뿌리로 보고 무언가를 고민했다면, 차세대 감독들은 당대 중국의 현실의 여러 문제를 비판적 눈초리로 주시하며 영상 서사를 만들어 가고 있다. 제5세대 감독들이 중국의 문제를 ‘민속’ ‘전통’ 등 뿌리에서 탐색하여 갔다면, 차세대는 개혁개방 이후 변모해가는 중국 도시(邊方/周邊)의 문제를 주로 다루면서 실험적 영상 시도를 하여 대중과의 소통 보다는 불만스런 현실에 대한 감독 자기의 영상 공간과 화해하고 있는 듯하다.
이렇다면 두 세대 감독 모두 중국의 현실을 각자의 지점과 각도에서 다른 방식의 영상 서사로 재구성하고 있을 따름이다. 역자가 보기에는 그렇다. 제5세대는 적어도 문제의식을 영상 속에서 ‘알레고리화’하며 쉽지는 않지만 대중성과 영상 미학을 감안하면서 관객과 소통할 수 있는 모종의 새로운 영상 공간을 개간하려고 한다는 인상을 준다. 반면 차세대 감독들은 개혁 개방 이후 중국의 현실에 대한 비판적 문제제기를 날것으로 들이밀면서 그 방식 또한 국제영화제 다득점(多得點) 용으로 만들고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물론 국제영화제에 수상 경력만을 가지고 그 영화가 최고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대중문화인 영화가 중국의 대중, 더 나아가 외국의 관객들과 소통하지 못하고 심사위원들의 손끝에서 저울질되는 것으로 평가되고 그만이라면 차라리 ‘인디영화’로 가면서 그들 마니아들만의 비평 공간에서 창작 욕망의 희열을 느끼고 극단(極端)의 평가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라면 차라리 펑시아오강 그 쪽의 영화가 더 매력적이다. 솔직히…….
‘주선율’ 영화, 제5세대 그리고 차세대 감독의 영화, 내수용 대중영화 이들 모두 중국의 대중문화를 이끌며 글로벌 영상 무대에 진출하여 종횡무진(縱橫無盡)을 하고 있다고 보기에는 아직은 무리가 있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제5세대, 차세대 감독의 다종다양한 영상 표현들도 어쩌면 1930년대 상해에서 제작되었던 중국영화에서 적어도 한번쯤을 시도해보았고 그랬을만함 직한 쇼트(Shot)들이다. 언젠가 루홍스 교수와 제5세대 이후 감독들의 영화에 대한 담소를 나누면서 오갔던 말로 기억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1930년대 초, 할리우드영화는 빠르면 2주, 늦어도 한 달 후에 상해 남경로(南京路)의 일류 개봉관의 스크린에 올랐고 프랑스, 독일, 소련 등의 선진 영화 문화가 직수입되었다. 당시라면 전 세계 선진 영화 기술이 영상을 통해 앞 다투어 소개되었을 것이고 음으로건 양으로건 이 세례를 받아 여러 가지 전위(前衛)적 영상 구성이 시도되었기 때문이다.
영화는 그 탄생일을 알 수 있는 예술 장르이고 그러다 보니 영화에 대한 평가는 대중성, 상업성, 과학성, 예술성 등 다양한 장르 내의 비평 기준에 대한 구체적인 요구 사항이 많을 수밖에 없다. 1911년 리치오토 카누도(Ricciotto Canudo)가 예술로서 영화의 독립선언을 하고 영화는 학문 연구의 분야로 걸어들어 온다. 할리우드영화로 세계 영화시장을 재패하고 있는 미국영화사도 1960년대를 기점으로 본격적인 독립된 학문으로서 영화사 연구를 시작해 왔다. 중국의 경우, 민국시기 2편의 영화사 유형의 저작이 있었고, 중국에서 영화사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의 ‘경전(經典)’을 꼽으라면 1957년, 1963년에 각각 초판을 낸 프랑스 영화사학자 조르주 사둘(George Sadoul)의 『세계영화사』 번역본과 쳥지화(程季華) 주편의 『중국영화발전사(一ㆍ二)』일 것이다.
지금 중국영화학술계에서 불고 있는 영화사 다시 쓰기 열풍(熱風)은 과거 이념 지향의 영화사 쓰기를 넘어서 감독론, 연기론, 영화이론, 영화시장, 영화기술 등 다양한 관련 분야의 연구 성과를 비교 분석하면서 영화사 연구의 새로운 출로를 모색하고 있다. 이즈음에 루홍스의 본 저작은 작은 어느 한 귀퉁이의 파랑일지 모르지만 새로운 파도를 일으키는 진원지(震源地)였다는 사실은 틀림이 없다. 그리고 1930년대 당시에 활약하던 중국 영화인의 구술(口述)을 정리하여 소개한 글은 여러 이론 저작에 산재(散在)해 있기는 하지만 이 저술처럼 본격적으로 묶어서 낸 경우는 흔치 않은 일이다.
아무쪼록 중국영화에 한걸음 더 다가서고 싶은 독자들, 중국영화사를 연구하는 국내외 연구자들의 책상 위에 한동안이라도 눈길을 받으면서 펼쳐 놓일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만 간절할 따름이다.
이 역서가 나오기까지 중어중문학과 몇몇 학생들, 주변 대학원생들이 바쁜 일상의 틈을 나누어 주지 않았다면 아마 못해도 한 두 걸음은 더 늦게 선 보였을 것이 있다.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전남대학교출판부 여러 분들의 노고는 더 뭐라 말할 수 없다. 역시 거듭 감사하다고 밖에…… 이 역서의 오역 및 미비한 구석은 모두 역자의 손에서 이루어진 일이니 달리 댓글을 달고 싶지 않다.

2013년 유난히 더웠던 여름,
남녘 드들강이 흐르는 남평(南平) 작업실에서……

옮긴이 김정욱


제1장 페이드 인 Fade-in 漸顯 1905-1931

페이드 인(Fade in: 淡入/漸顯)
영화의 편집 기교 중 하나로, 디솔브 인(dissolve-in)이라고도 한다. 영화 예술에서 시공간의 간격을 표현하는 중요한 수단이다. 그 표현 형식은 앞 장면의 화면이 점차 어두워지면서 완전히 소멸된 후에 뒤 화면이 점차적으로 환하게 밝아지는 것을 뜻한다. 이 장에서는 중국영화의 여명(黎明) 단계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1. 역사 이전
/ / / 한 시인은 말한다. “만약 빛이 없다면 세계는 그리워 할 아무 것도 없다.”
빛이 있으면 그림자도 있다. 각종 빛과 그림자의 기묘한 관계는 인류를 위해 생활의 많은 즐거움을 가져다주었으며, 그 한 가지가 오래 전부터 있어 왔던 “손가락 그림자놀이”이다. 이와 동시에 빛과 그림자는 인류의 일종의 특수한 표현 방식이었다. 일찍이 2,100여 년 전에 한(漢) 무제(武帝)는 도사(道士)를 청해 세상을 떠난 이부인(李夫人)의 “혼을 불러 달라(招魂)”고 한 적이 있다. 그런데 그 도사가 사용했던 방법은 빛과 그림자의 관계에 대한 깨달음에서 얻은 것이 틀림없다. 등불 빛으로 등 뒤에서 이부인과 체격이 아주 비슷한 궁녀의 그림자를 휘장 위에 비추고 악사의 연주를 곁들이면, 휘장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한 무제는 마치 죽었다 다시 살아난 이 부인을 실제로 보는 것 같아서 이를 빌어 그의 사모하는 정을 의지했다.
그림자극은 옛사람들이 빛과 그림자를 이용하여 자기의 생각을 표현했던 최고의 형식이라고 볼 수 있다. 빛과 그림자의 약동 속에 한 막 한 막 덧없는 인생살이의 이야기가 연출되어 관객의 희로애락(喜怒哀樂)을 불러일으키고 관객에게 현실 바깥으로 벗어나는 흥분과 즐거움을 주었다.
영화는 근대 사진술이 발명된 후에 탄생한 또 하나의 새로운 빛과 그림자 예술이다. 1895년 12월 28일, 뤼미에르(Lumiere) 형제가 파리의 한 커피숍에서 영업을 위해 상영(上映)했던 날이 영화의 첫 번째 생일이었다. 연속 촬영과 상영이 가능했던 새로운 빛과 그림자 예술은 이렇게 현대 인류의 일상생활로 걸어들어 왔다.
하지만 서양 국가들이 영화 발전을 하나씩 이뤄나갈 때 중국 조정은 여전히 천문산학관(天文算學館) 증설의 시비(是非)로 다툼이 끊이지 않았다. 봉건과 미신(迷信)의 유령은 이 동방 대국에서 우쭐대며 빈둥거렸고 중화민족이 현대 문명으로 나아가는 길을 어렵게 걷도록 했다.
청(淸) 왕조의 몰락과 부패는 마침내 1840년부터 시작된 제국주의 열강의 야만적 침략을 불러왔다. 굳게 닫혀있던 나라의 문은 강제로 열렸고 열강 국가의 군사와 경제 확장이 수반되면서 서양의 생활 방식과 문화 상품도 중국에 수입되기 시작했다.
중국이 영화의 발명과 인연이 없었던 탓에 중국영화 역사의 서막도 외국 영화의 유입으로부터 시작될 수밖에 없었다.
마치 성냥, 석유를 각각 ‘양(洋) 불’, ‘양(洋) 기름’으로 불렀던 것처럼, 중국인들도 처음에는 영화와 같은 박래품(舶來品)을 ‘서양 그림자극(西洋影戱)’이라고 불렀다. 1885년(광서光緖 11년) 11월 15일 저녁, 자금을 모아 이재민을 구제하던 유학생 안영경(顔永京)이 상해(上海) 육마로(六馬路) 격치서원(格致書院)에서 ‘서법경양기은희등(西法輕養氣隱戱燈)’을 가지고 외국의 풍경을 담은 ‘그림자극’ 한 편을 상영했다. 하지만 당시 기록으로 판단해 보면 이런 ‘그림자극’은 아직 진정한 의미의 영화가 아니었고, 고작 잇따라 움직이는 특징을 가진 슬라이드에 불과했다. 현재까지 알려진 바에 따르면, 중국인이 최초로 본 영화는 아마도 1896년 8월 2일 밤, 상해 서원(徐園) ‘우일촌(又一村)’의 오락 활동일 것이다. 이 오락 활동을 시작으로 관광객들은 2지아오(角)의 소양(小洋)만 있으면 불꽃놀이나 마술 그리고 ‘서양 그림자극’을 보고 즐길 수 있었다.
그 후, 영화의 상영 활동은 점차 상해, 북경(北京), 광주(廣州), 천진(天津) 등 중ㆍ대형 도시에서 많아지기 시작했다. 일부 구습에 얽매인 사람들이 그것은 “서양인들이 사람 눈을 수집하는 기가 막힌 방법”이라고 보는 시각을 제외하면, 대다수 중국 관객은 영화 관람을 매우 즐거워했다. 일반적으로 영업을 위한 이런 상영 활동은 몇몇 찻집과 구식 극장 안에서 진행되었으며, 상영된 프로그램은 경치와 희극(喜劇) 단편 영화가 대부분이었다. 그 일을 주관한 사람은 주로 외국의 문화 상인들이었고, 그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영화상(映畵商)으로는 스페인 사람 라모스(A. Ramos)를 꼽을 수 있다. 1903년, 그는 같은 국적의 한 친구가 양도한 모든 상영 설비와 영화 필름을 인수하였는데, 경영에 재간이 있어서 영화 사업은 갈수록 번창했다. 이후, 10여 년 동안에 라모스는 점차 하나의 체인(chain)식 극장을 주체로 하는 트러스트(trust) 조직인 라모스연예회사(雷瑪斯遊藝公司)를 건립했고, 그 영화 상영 지역은 점차 넓어져 무한(武漢) 등과 같은 내륙 도시까지 확장되었다.
외국인의 상업적 상영 활동보다는 조금 늦었지만 중국의 선견지명을 가진 경영자들도 영화를 임대해서 비교적 규모가 있는 영화 상영 사업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국인이 자체적으로 시도했던 비교적 규모를 갖춘 영화 상영은 민족영화 제작업 출범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여기서 우리들은 임경태(任慶泰: 런칭타이)가 이를 위해 했던 모든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2. 초창기
임경태(1850~1932)의 자(字)는 경풍(景豊)이며, 북경에서 처음으로 중국인이 창설하여 무대 의상을 입고 찍는 사진으로 유명한 풍태(豊泰) 사진관의 주인이다. 청말 민국(淸末民國) 초에 아주 영향력 있는 실업가였던 그는 약방, 목기점(木器店), 사이다 공장을 창립했으며, 이와 동시에 영화 상영에도 많은 흥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가 건립한 ‘대관루영화원(大觀樓電影園: 오늘날 대관루영화관電影院의 전신)’은 북경 최초의 전문 영화관이다. ‘대관루’에서 “상영된 영화는 길이가 아주 짧고 우스꽝스러운 영화를 제외하면 고작 마술과 외국 풍경뿐이었다.” 그러므로 영화 공급원을 보충하고 영업을 확장하기 위해서 임경태는 사진관의 기술 능력을 이용해서 스스로 영화 제작을 하자는 생각을 싹틔웠다. 처음 시도하는 실험에서 임경태가 무엇을, 어떻게 찍었든지 간에 그가 기울인 노력만큼은 잘 알 수 있다. 적어도 그는 어떻게 해야 영화로 관객을 많이 모을 수 있는가를 고려해야 했다. 여러 해 동안 희곡(戱曲) 사진을 촬영한 경험이 있고 또 당시 희곡 공연의 성황(盛況)을 직접 눈으로 보았으며 본래 희곡 분야의 사람들과 교제 범위가 꽤 넓었던 임경태는 유명한 경극 배우의 연기를 ‘활동사진’으로 찍자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하게 되었다. 그래서 1905년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갈 무렵 경극(京劇) 담파(譚派) 예술 창시자 담흠배(譚?培: 탄신페이)의 생일을 축하하는 자리에서 첫 번째 국산 영화 『정군산(定軍山: 딩쥔샨)』을 세상에 선보였다.
『정군산』은 담흠배가 사람을 가장 많이 끌어 모았던 앵콜 공연 레퍼토리 중의 하나다. 그것은 고전 소설 『삼국연의(三國演義)』의 제70회와 제71회에서 제재를 취했고, 극의 줄거리는 지혜와 용기를 두루 갖춘 촉(蜀) 나라 장수 황충로(黃忠老)가 좋은 장수가 되어 여러 차례 전공(戰功)을 세우는 감동적인 이야기를 서술하고 있다. 무성(無聲) 영화인 『정군산』은 전체 극에서 ‘군대 지원(請纓)’, ‘칼 사위(舞刀)’, ‘교전(交鋒)’ 등 동작이 볼만한 ‘주(做)’ㆍ‘타(打)’의 토막 몇 개를 선택했으며, 세 막은 30여 분이면 모두 상영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후, 여러 해 동안 임경태는 다시 다른 유명 배우들과 합작하여 『염양루(艶陽樓: 엔양로우)』, 『청석산(靑石山: 칭스샨)』(이상 유국생兪菊笙: 위쥐셩 주연), 『금전표(金錢豹: 진첸바오)』, 『백수탄(白水灘: 바이슈이탄)』(이상 유진정兪振庭: 위젼팅 주연), 『관셩의 생포(收關勝: 쇼우관셩)』(허덕의許德義: 쉬더이 주연) 등 7~8편의 희곡 공연 영화를 촬영 제작했다. 이 희곡 단편(실록 영화 - 역주)들은 모두 변변치 않은 조건에서 비교적 원시적인 방식으로 촬영한 것이었다. 사진관 천장 기둥의 양쪽에 한 폭의 휘장을 걸고 배우는 휘장 앞에서 희곡 음악의 반주에 따라 연기를 했다. 카메라를 무대 아래 관객이 관람하기에 가장 좋은 위치에 고정시키고 햇빛을 이용하여 촬영했다. 영화 촬영을 맡았던 사람은 ‘풍태’에서 가장 훌륭한 사진기사 류중윤(劉中倫)이었으며, 임경태는 현장에서 모든 일을 도맡아 지휘했다. 전해진 바에 따르면 손으로 돌리는 카메라의 일정치 않은 속도 및 날씨 등의 원인으로 이 단편들의 시각적 효과는 그리 이상적이지 못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이런 영화들이 본토의 전통 예술과 바깥에서 들여온 신기한 오락 형식의 최초의 결합이다 보니, 관객들은 매우 신선한 느낌을 받았다. 후세 사람의 다소 과장된 기술(記述)에 따르면 이런 희곡 공연 영화는 “다양하고 몹시 볼만하여 길상(吉祥) 극장(戱院) 등지에서 공연할라치면 집집마다 사람들이 길거리로 나와 보는 대성황을 이뤘다”고 한다. 그러나 좋은 경기는 지속되지 않았으며 1909년, 원인을 알 수 없는 대형 화재로 한 차례의 위기를 맞은 풍태 사진관은 끝내 재기하지 못했다. 임경태의 영화 제작 활동도 이쯤에서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첫 국산 영화가 오래된 제왕(帝王)의 수도(首都)에서 탄생했다는 이 기정사실은 역사적 우연성을 다소 띠고 있다. 그리고 4년 후, 민족영화 제작 사업이 상해에서 다시 시작된 것은 일종의 역사적 필연임이 틀림없다. 왜냐하면 신흥 민족영화는 본토 문화의 지지가 필요했으며, 나아가 경제와 ‘정신적 공감대’의 보장을 더욱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중국 근대 경제와 문화의 중심이었던 상해는 자연히 그럴만한 이유를 가지고 중국 초기 영화 발전의 중요한 기지가 되었다.
1913년 젊은 외국 상사 직원이었던 장석천(張石川: 쟝스츄안)은 당시 연극(戱劇) 평론으로 명성이 자자했던 정정추(鄭正秋: 졍졍치우) 등과 신민회사(新民公司)를 조직했고, 상해 현지에서 영화를 찍었던 아시아그림자극회사(亞細亞影戱公司)의 모든 업무를 인수했다. 아시아그림자극회사는 원래 미국 국적의 러시아인 벤쟈민 브라스키(Benjamin Brasky)가 창업했으며 상해와 홍콩에서 몇 편의 단편 영화를 촬영한 적이 있었다. 그 후, 나라의 정세에 어두워서 영업을 계속하기 어렵게 되자 회사의 명의와 자재(資材)의 일부를 상해남양생명보험회사 사장 이설(A. Yiesel)과 다른 미국인 서퍼트(T.H. Suffert)에게 넘겨주었다. 브라스키의 전철을 다시 밟지 않기 위해서 그들은 중국인과의 합작을 모색했다. 이런 상황에서, 신민회사는 “닭을 빌어 계란을 낳는다”는 식으로 중국의 첫 번째 극영화(feature film)인 『결혼을 위한 죽음(難夫難妻: 난푸난치)』을 만들었다. 길이가 4권(卷: reel)인이 단편 영화는 정정추가 극본을 썼으며 장석천과 공동으로 감독을 했다. 그것은 희극적(喜劇的) 필치로 서로 잘 알지 못하는 한 쌍의 젊은이가 부모와 중매쟁이의 독단 속에 결합하는 과정을 서술했다. 여러 가지 번거롭고 불필요한 예절을 과장되게 묘사하여서 창작자의 일정한 현실 비판 의식을 담아냈다. 영화의 촬영 작업은 상해 홍콩로(香港路) 2호(號)에 있는 아시아영화사 뜰 안의 한 공터에서 진행되었으며, 모든 배역은 남자 신극(新劇, 속칭 ‘문명희文明戱’) 배우가 도맡았다. 장석천과 정정추 둘 다 처음으로 영화 작업을 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맡았던 감독의 역할도 역시 초보적인 것이었다. 장석천은 「내가 영화감독을 한 다음부터(自我導演以來)」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회고한 적이 있다. “나와 정정추는 맡은 일을 서로 상의했으며, 그는 배우의 표정, 동작을 지휘하였고, 나는 카메라의 위치 변동을 지휘하였다. 지금은 상식이 없는 사람일지라도 영화 촬영장에서 총지휘관을 감독이라고 부른다는 것을 알지만, 당시에는 이른바 ‘감독’이라는 명칭조차도 없었다……. 우리들은 ‘스승도 없이 스스로 터득’하는 감독 일을 이처럼 알쏭달쏭하게 해가면서 얼마나 웃음거리가 되었는지 모른다. 감독으로서의 기교는 꿈속에서도 생각해 보지 못했으며, 카메라 위치가 잘 배치되는 대로 배우들에게 렌즈 앞에서 연기를 하라고 지시하면 200척(尺)이 한 통인 필름을 다 찍을 때까지 각종 표정과 동작을 그침 없이 연기했다(당시에는 400척과 1,000척 길이의 필름통暗盒이 아직 발명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임경태의 조각난 희곡 공연 영화와 비교한다면 『결혼을 위한 죽음』은 어쨌거나 스크린 위에서 벌어지는 하나의 이야기가 있었다. 가령, 임경태의 영화 제작 실험이 영화 필름의 기록 기능에 대한 인식론적 실천이었다면, 『결혼을 위한 죽음』은 이미 영화의 서사(敍事) 가능성을 담아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신민회사가 그 후에 촬영한 다른 단편 극영화들 속에서 영화의 이런 서사 가능성은 보다 많이 발굴되었다. 해체되기 전 1년 남짓 동안 신민회사는 그들의 투자자를 위해 『자전거 사고(脚踏車闖禍: 지아오타쳐츄앙훠)』, 『불안한 하룻밤(一夜不安: 이에뿌안)』, 『횡재(店?失票: 뎬훠스피아오)』 등 20여 편 가까운 단편 극영화를 창작했다. 이 영화들은 대부분 신극과 민간 우스갯소리의 이야기에서 제재를 취했고 길이는 평균 2권 안팎이었다. 정정추가 한동안 단원들을 따로 모아 신극 연출에만 전념하면서 이 영화들은 장석천이 촬영을 도맡았다. 이후, 서사 가능성에 대한 보다 진전된 모색이 이루어져 장석천은 화면과 장면의 분할, 집밖 실제 장면의 사용, 슈팅 스케일(shooting scale)의 변화 등에 대한 부분적 구상을 각각 가지고 있었다. 그러면서 영화 스크린의 시간과 공간에 일정한 활동성과 상상력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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