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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의 역사 1

구속의 역사 1

(21C 종교개혁의 길잡이)

김정민 (지은이)
  |  
전남대학교출판부
2014-12-25
  |  
23,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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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의 역사 1

책 정보

· 제목 : 구속의 역사 1 (21C 종교개혁의 길잡이)
· 분류 : 국내도서 > 대학교재/전문서적 > 인문계열 > 종교학
· ISBN : 9788968491658
· 쪽수 : 424쪽

책 소개

전남대학교 종교문화연구소 총서 7권. 구속사의 개념, 목적, 특성, 해석, 형식, 내용, 말씀선포의 실례로 구성되었다.

목차

추천사 5
서론 7

제1권 구속사의 개론

제1장 구속사의 개념 30
제2장 구속사의 목적 38
제3장 구속사의 특성 106
제4장 구속사의 해석 159
제5장 구속사의 형식 230
제6장 구속사의 내용 297
제7장 구속사적 말씀선포의 실례 412
참고문헌 418

저자소개

김정민 (지은이)    정보 더보기
1949년 전라도 장흥 회진 출생. 광주요나교회 당회장. 전남대학교 철학과 대학원 졸업. 동 대학 박사과정을 수료 후 철학박사 학위논문 연구 중. 조직신학자 서철원 박사의 제자가 된 후 한국교회의 그릇된 도덕신학과 기복신앙의 틀을 벗어 던지고 21세기 종교개혁을 주창(主唱). 구속사적 성경관 주장. 21세기 종교개혁의 첫 걸음은 올바른 성경관에 의한 복음 선포뿐임을 주장(도덕적, 기복적, 신앙위인전집적, 신동의보감적 성경관 비판). 한국교회가 성령강림절을 지키지 않고 맥추감사절을 지키는 것은 교회의 절기를 구속의 절기에서 풍어제나 풍년제 같은 한낱 감사 절기로 전락시키는 것이라고 지적(맥추감사절을 지키는 것은 성령강림을 부인하는 의식이라 주장). 장로교회에 대한 오해로 교회정치 세속화됨 지적. 「21세기 종교개혁의 필요성」, 「올바른 교회절기」 등 다수 칼럼 발표. 「구약에 나타난 그리스도」, 「칸트철학에서 도덕성의 원천」 등 학위논문을 발표. 『현대인의 삶과 행복론』, 『존재의 목적(Ⅰ)-小要理問答講解』, 『존재의 목적(Ⅱ)-小要理問答講解』, 『구속의 역사(Ⅰ)-救贖史槪論』, 『구속의 역사(Ⅱ)-救贖史 展開』 등 저서. 전남대학교 평생교육원, 광주신학교, 광주바이블칼리지 등 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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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서문]

성경은 ‘구속의 역사(救贖史)’다. 구속사는 오직 성경뿐이다. 성경을 기록한 목적은 도덕이나 과학이나 그 외(外)에 다른 어떤 학문을 가르칠 목적으로 기록한 책이 아니다. 성경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속을 완성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이룩하기 위한 하나님의 자기 경륜(經綸)에 대한 계시(啓示)다. 그러므로 성경을 다른 어떤 관점으로 보아서는 안 될 뿐만 아니라, ‘구속사적(的)’으로도 이해하면 안 되고 ‘구속사’로 해석하고 이해하여야 한다.
구속의 역사는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한 필수 조건으로 창세 전부터 계획된 하나님의 큰일을 말한다. 그 증거가 에베소서 1장 3절부터 14절 말씀에 잘 요약 정리되어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을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신 것이요 그의 기뻐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의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속량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나타나 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 나라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과 자기 백성들의 영원한 생명의 교제는 창세전부터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이런 하나님의 계획은 창조로 시작되었어도 씨앗과 같은 상태의 시작이어서 그 은혜의 실체가 명확하게 드러나지를 않아 잘 이해하기 힘들다. 그래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이 땅에 출생하여 여호와를 영접하고 예수를 그리스도로 받아들이는 풍성한 생명의 교제를 누리기 전에는 그 누구도 자신이 창세 전에 선택된 백성이라는 사실을 알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믿을 수도 없는 일이다(요16:1-15, 요일3:1).
창세기 1장 26절부터 28절과 2장 15절부터 17절에 보면 ‘첫 언약’이 소개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시고 자기 형상을 따라 아담을 지셨다. 아담으로 말미암아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온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셨다. 그리고 여자를 배필로 주어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고 땅을 정복하여 땅에 있는 것들을 다스리라 하셨다. 그것은 단순한 종족 번식이나 영토 확장이 아니다. 아담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시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사명을 부여하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아담에게 에덴을 기업으로 주어 경작하게 하므로 이 세상을 하나님의 영토로 삼으셨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동산에 있는 각종 나무의 열매는 임의로 먹게 하셨다. 그러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고 명령하셨다.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경고하셨다. 아담을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삼으시고 자신은 하나님 나라의 왕이 되시는 언약을 맺으시고 언약 파기의 경우 보상적 책임(obligation)까지 세우셨다. 이것은 전통 신학에서 주장하는 ‘행위언약’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아담과 맺으신 ‘첫 언약’이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자기 형상대로 지으셨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형상대로 지으신 아담을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삼아 영원한 생명의 교제를 역사 안에서 시작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하와를 돕는 배필로 주어 영원한 생명의 교제가 신비한 연합으로 이루어진 배타적 사랑의 관계인 것을 일부일처주의(一夫一妻主義) 부부제도 속에 심으셨다.
이렇게 시작된 생명의 교제가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 단절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버리지 않으셨다. 창세기 3장 15절에 보면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이 타락의 원흉을 저주하면서 첫 언약을 회복하기 위한 ‘새 언약의 시작’이다. 새 언약은 여인의 후손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심을 통해서 아담으로 인해 파괴된 자기의 형상을 회복하여 영원한 생명의 교제가 이루어질 것을 보여주셨다. 이 새 언약의 진행과 발전이 구약의 성경 안에서 쉼 없이 계속된다. 이것이 구약 안에서 진행되는 구속의 역사다.
새 언약은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안에서 성취되었다. 성취된 새 언약은 첫 언약의 회복인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심으로 마침내 완성되며 이 모든 과정이 구속의 역사인 것이다(시16:10, 49:15, 막16:6-7, 계22:20).
아담에게 은혜를 약속하신 하나님께서는 인류의 첫 살인자 가인이 범죄 했을 때도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창5:15)”라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비록 가인을 하나님 나라 백성에서 추방하기는 했어도 가인의 후손을 통해 나타날 창세 전에 택함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과의 영원한 생명의 교제를 위해 가인에게 큰 은혜를 베풀어 생명을 지키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방인의 구원이 가인으로부터 시작 한다.
아담으로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회복은 노아와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에게 계속되었다. 모세의 제도 아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토록 수많은 배신과 배반을 반복했어도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을 버리시지 않았다. 오히려 자기 백성들에 대한 영원한 사랑의 교제를 역사 안에서 키워 가셨다. 여호와 하나님의 이런 노력은 구속사의 진행과 발전을 통해 친히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오셔서 구속의 영광을 보여 주실 것을 선지자들의 예언을 통해 나타났다.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날 영광을 모세의 제도 안에 심으심으로 미리 보여주셨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친히 예수 그리스도로 오실 때에는 새로운 모습의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될 것을 분명하게 예언하셨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3:2).”라는 세례 요한의 메시지를 통해 그리스도께서 새로운 국면의 하나님 나라 왕으로 오실 것을 선포하게 하신다. 그런 점에서 세례 요한은 구약의 시대를 정리하고 신약의 시대를 도입하는 선구자로서 족보의 역할을 했다. 마침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장막을 치심으로(요1:14) 여호와께서는 예수의 이름으로 이 땅의 구세주요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 오신 것이다. 세례 요한의 선포는 예수의 이름으로 세상에 장막을 치신 여호와께서 영원한 생명의 교제를 시작하기 위해 왕림하셨음을 선포한 것이다.
창세 전에 계획하고 에덴에서 시작하여 역사 안에서 준비하고 발전시켜 온 하나님 나라가 새로운 모습으로 시작되었다. 새로운 모습의 하나님 나라는 자기 백성을 대신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선악과를 먹은 죄 값을 치르고 사흘 만에 다시 부활하여 새 언약을 성취하심으로 이루어졌다. 부활 후 40일 동안 세상에 계시면서 자신의 부활과 새 언약의 성취를 알리셨다.
이 땅에서 구속 사역을 완성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시고 성령을 파송하셔서 재창조를 시작하셨다. 재창조란 예수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근거로 성령이 강림하셔서 자기 백성을 중생시키시고, 영원한 생명의 교제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새로운 국면으로 시작하는 것이다. 이것이 아담과 맺었던 새 언약의 성취요 첫 언약의 회복이다. 아담으로 말미암아 파괴되었던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어 영원한 생명의 교제(코이노니아(κοινων?α, 신비한 연합, 임마누엘, 신인합일)가 교회 안에서 재기(再起)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의 교제가 회복된 하나님의 형상들을 새로운 피조물이라 칭하시고 새로운 피조물이 된 교회를 이 시대의 하나님 나라로 세우신 것이다. 이 재창조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셔서 창세기 1장에 1절에 소개된 영원의 세계인 천국(!yIm'V;h)과 창세기 1장1절에 소개된 시간의 세계인 우주($r,a;h)가 통합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하므로 완성될 것이다(계21:1-27).
올바른 신학과 신앙, 그리고 참다운 구원은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는 데서부터 출발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주변에는 잘못된 성경관이 너무나 많다. 즉 아브라함의 믿음을 본받으라, 요셉처럼 꿈을 가져라, 모세처럼 순종하라, 다윗처럼 회개하라 등 성경을 ‘신앙위인전집’으로 이해하고 도덕과 윤리학적 관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병원에서도 고칠 수 없는 모든 병을 고치는 만병통치비법이 성경에 소개된 것처럼 이해하는 ‘신(新)동의보감적’ 관점도 있다. 그리고 부귀영화를 보장하는 도깨비 부자 방망이처럼 성경을 이해하는 ‘기복(祈福) 신학적’ 관점들이다. 이런 관점들은 성경을 구속사로 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구속사의 특징들을 이해하지 못한 데서 온 바르지 못한 성경관이다. 본서를 집필하게 된 동기가 바로 이런 잘못된 점을 바로잡아야겠다는 사명감 때문이다. 본서를 집필한 목적은 이런 오류들을 바로잡아 올바른 성경관을 밝히고 21세기 종교개혁의 토대를 마련하는 데 있다. 그래서 감히 본서를 ‘21C. 종교개혁의 길잡이’라 선언한다.
올바른 성경관만이 말씀선포 자들에게 바른 복음을 선포할 수 있는 길로 인도한다. 하나님께서는 바른 복음의 선포를 통해서만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신앙을 고백하는 자기 백성을 출생시키고 성장하게 하신다. 하나님의 백성이 된 교회는 말씀선포를 받고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다는 계속된 신앙의 고백으로 죄를 이기며 성장한다. 점점 장성한 분량에로 성화된 교회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는 삶을 산다. 이를 위해 신구약성경을 텍스트로 삼고 관련 자료들을 참고하여 현대에 유행하고 있는 그릇된 성경관을 구속사적 관점에서 지적하고 올바른 성경관을 제시할 것이다.
올바른 성경관은 한마디로 ‘구속의 역사’다. 구속의 역사를 축약하면 ‘구속사’다. 모든 피조물의 존재 목적이 하나님과 영원한 생명의 교제에 있다면, 구속사의 궁극적 목표는 하나님과 코이노니아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룩하는 데 있다. 달리 말하면 성경의 기록 목적은 하나님께서 자기 나라를 완성하기 위해 구속을 역사 안에서 이루어 나아가는 과정을 밝히기 위함이다. 하나님께서는 창조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셨고, 자신의 통치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발전시키고 완성해 나가신다.
인류는 역사에 관한 다양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 견해들은 자신들이 존재하는 시간과 공간인 역사의 시작과 끝점을 명확하게 말하지 못한다. 그리고 그 역사의 의미와 흘러가는 이유와 목적도 명확하게 규명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오직 성경만이 하나님의 창조를 통해 역사의 시작을 말하고 있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해 역사의 끝과 완성을 말하고 있다. 성경은 역사의 의미와 목적을 구속과 하나님 나라 완성으로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일반 학문에서 말하는 역사는 빅뱅을 통해 우연히 발생하거나 인류의 시작으로 발생하는 것으로 주장하는 견해들이 있지만,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창조에서 역사가 시작한다고 가르친다. 그 근거는 성경의 첫머리인 창세기 1장 1절에서 “베레쉬트 빠라 엘로힘 에트 하솨마임 웨에트 하아레츠 / $r,a;h; taew_ !yIm'V;h' tae !yhil|a> ar;B; tyviareB](BHS)”라고 기록함으로써 나타내고 있다. 영어 번역으로는 “In the beginning God created the heaven and the earth(KJV)”이다. 우리말 성경에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天地)를 창조하시니라”라고 번역되어 있다. 하지만 우리말 번역은 ‘천지’의 의미를 축소하거나 오해의 소지가 있는 번역이다. 더 정확한 번역으로는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국과 우주를 창조하셨다.”이다. 이처럼 역사는 하나님의 창조에서부터 시작한다.
아담의 타락을 기점으로 일반역사와 구속사가 구체적으로 구분된다. 이런 구분과 논의는 하나님의 예정론을 부인하거나 아담과 하와의 창조가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의 신비한 연합 사상의 예표라는 사실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하면 구속사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타락으로 훼손된 자연을 회복하기 위해 특별한 은혜를 베푸실 때부터 시작한다는 것이다.
일반 역사와 구속사를 구분하기 위해 전통 신학에서는 하나님의 일반통치와 특별통치, 그 통치를 받는 입장에서는 일반은총(은혜)과 특별은총(은혜)으로 구분한다. 그러므로 구속사란 하나님의 특별통치와 특별은총이 중심이 된다. 그리고 일반역사는 하나님 나라가 완성될 때까지 지탱해야 할 보존의 역사로 구속사를 위한 보조 수단으로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룩하는 필수 조건이 자연을 회복하는 것, 즉 구속(구원)이기 때문이다.
서철원 교수는 은혜란 자연을 억압하고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설명하면서 일반 역사와 구속의 역사를 구분 한다.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구속이 성경의 중심 내용이기 때문에 성경을 구속사라 한다. 그리고 이 구속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성취되고 그의 재림으로 완성된다. 그러니까 구속사인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로 관통되어 있고, 예수 그리스도가 구속사의 주인공이다. 그런 점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가르치는 것이 구속사의 흐름이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의 마지막을 장식한 사도 요한을 통해 역사의 마지막과 완성된 그 이후의 세계를 “Kai; eioujrano;n kaino;n kai; gh'n kainhvn: oJ ga;r prw'to" oujrano;" kai; hJ prwvth gh' parh'lqen, kai; hJ qavlassa oujk e[stin e[ti”;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계21:1).”라고 계시하신다. 그래서 성경은 역사를 시작하고 역사를 운행하고 완성하신 하나님을 알파(Α, 처음)와 오메가(Ω, 나중)라고 기록한다(계1:8, 17, 21:6). 그러므로 구속사는 성경이며, 성경은 구속의 역사이다.
구속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특징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며 그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하나님께서 자신의 계획을 점진적으로 계시하신다. 마치 한 알의 씨를 심어 점점 나무가 자라나 꽃이 피고 열매가 맺도록 성장하는 것처럼 발전한다. 다시 말해서 한꺼번에 모든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발전과 시대에 따라 사건과 인물을 통해 하나씩 하나씩 점진적으로 계시해 나아간다는 점이다.
둘째, 옛 시대의 계시와 새 시대의 계시가 서로 ‘동심원(同心圓)의 물결구조’를 이루며, ‘우상향(右上向) 빗변 직각삼각형’의 형태로 발전하여 점진적으로 완성을 향해 향상되고 발전하여 나아간다. 성경은 다양한 인물이나 사건들을 수집해 놓은 교훈집이 아니다. 성경은 역사 안에서 완성을 향해 차츰차츰 점진적으로 발전해 나아가는 하나님 나라의 발전사다. 앞 시대의 역사와 뒤 시대의 역사가 무관하지 않고 유기적인 관계를 이루며 발전해 간다. 그러므로 필자는 기독교의 역사관, 즉 구속사를 동심원의 물결구조와 직각삼각형에 비유한다. 직각삼각형은 에덴동산에서 시작된 구속의 역사는 한 순간도 쉬지 않고 목적지인 새 하늘과 새 땅을 향해 발전하는 것을 도형(圖形)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신학적 구속사는 발전하는 역사다. 그처럼 구속사는 발전하는 과정 속에서 옛(舊) 시대나 새(新) 시대가 똑같은 목적을 가지고 있으며 서로 유기적이고 긴밀한 영향과 연결 고리를 취하면서 진행된다는 차원에서 동심원의 물결구조를 갖는다 할 수 있다.
셋째, 구속사가 역사 안에서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시대적 구분이 나타난다. 그런데 지금까지는 구속사의 시대적 구분과 관련하여 전통적으로 언약중심, 인물중심, 사건중심 등 다양한 관점이 주장되어 왔다. 그러나 필자는 이런 전통적인 시대 구분을 거부하고 구속사의 올바른 시대적 구분은 족보중심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족보중심의 방법에 따라 구속사의 시대를 구분해 나갈 것이다. 족보 중심의 시대적 구분은 구속사를 이해하는 데 획기적인 역할을 한다. 그것은 명확한 시대 구분만이 올바른 역사관을 정립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올바른 시대구분만이 각 시대의 독특한 특성들이 우주적 전 역사에 어떻게 연결되고 합류하는가를 바르게 정리할 수 있으며 역사적 발전의 과정과 목적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는 말이다. 여기서 ‘족보중심’이란 단순히 ‘아담은 셋을 낳고 …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고’하는 방식으로 여러 구절을 할애하여 기록한 긴 족보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한 구절을 이루고 있다하더라도 시대를 구분할 만한 ‘시대적 타락, 그리스도의 모형으로서의 개인의 죽음, 출생, 새로운 시대를 도입할 만한 하나님의 은혜와 복 주심’ 등을 포함한 ‘족보중심’이라 할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자면 위의 실례들을 포함한 ‘포괄적 의미의 족보중심’이다. 필자가 주장하는 포괄적 의미의 족보 중심은 옛 시대를 정리하고 새 시대를 명확하게 잘 도입하고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옛 시대를 정리하고 새 시대를 도입할 것인가에 대해 가장 명확한 모형을 보여준다.
넷째, 주인공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설명하고 예표하기 위해 다양한 인물과 사건들이 소개되고 다양한 주제들이 동원되고 있다. 예표론(모형론)에 대한 오해도 많다. 한 가지 예를 들면 구약이 신약의 모형이라고 하니까 구약에는 구원도 없고 다만 모형일 뿐인 것으로 오해하는 것이다. 그러나 신약의 예수로 오실 그분이 구약의 여호와로 분명히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고 자기 백성과 함께 계셨다. 그러나 직접 사람의 몸을 입고 자기 백성을 구원하신 것이 아니라 모세 같은 대표자를 통해서 구원하셨다. 그런 점에서 모세는 예수의 모형이 된 것이다.
다섯째, 다양한 인물과 사건, 그리고 다양한 주제들이 등장하고 소개되고 있으면서도 하나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가리키고 가르치는 데 초점이 모아지는 통일성을 이루고 있다.
여섯째, 구속사는 성령의 감동과 감화로 기록되었다는 점이다.
전통적으로 구속사를 언급하는 사람들은 문자적으로 나타나 있는 아담의 가죽옷, 노아의 방주, 모세와 유월절, 기생 라합의 붉은 줄, 이스라엘의 멸망, 포로시대의 고통,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신천신지 등의 몇 가지만을 언급하고 마는 경우가 많다. 그런 방식은 물론 구속사의 이해를 돕는 개요의 일부일 수는 있다. 그러나 구속사가 그렇게 간단하게 다루어질 문제가 아니며 문자적이고 구체적으로 소개된 구속의 사건만이 구속사가 아니다. 성경 전체가 구속사다. 구속 사건이 구체적 문자로 나타나 있지 않은 내용도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구속사는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일관성 있게 관통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성경과 구속사와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다. 이런 표현은 구속사 안에는 아무런 교훈도 없고 그 어떤 규칙이나 원리도 없다는 말로 이해하면 안 된다. 오히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모든 것의 원리요 근거요 기준이요 토대요 진리라는 뜻이다.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존재할 수 없다.
구속사의 희미하고 불명확한 내용들은 분명하고 명확하게 표현된 구속의 사건들을 통해 해석하고 이해해야 한다. 우리는 성경을 해석할 때 구약은 신약으로, 신약은 구약으로, 부분은 전체적 문맥의 흐름으로, 불명료한 부분은 명료한 부분으로, 전체를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해석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라는 레일(rail)은 구속사라고 하는 열차가 역사의 시작을 말하는 창세기에서부터 시작하여 역사의 끝을 말하는 요한계시록까지 쉬지 않고 연속적으로 달릴 수 있도록 이어져 있다. 마치 우리 몸 어디에도 바늘로 찔러서 피가 나오지 않는 곳이 없는 것처럼 어느 시대 어느 역사에나 예수 그리스도는 그 시대와 역사의 보존과 구속의 의미로 존재한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구속사다.
혹자는 시편, 잠언서, 전도서, 아가서 등의 시가서도 구속사인가 하는 물음을 물을 수 있다. 그러나 시가서도 율법서도 구속의 역사에서 나타난 산물들이기 때문에 구속사에서 제외될 수 없고 그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적 구속의 의미를 나타내고 있다. 그런 점에서 시가서도 구속사의 일부다. 이런 특징을 가진 구속사의 파노라마는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구약성경에서 기록하고 있고 이미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신약성경에서 기록하고 있다.
그래서 구약 백성은 오실 예수를 믿고, 신약 백성은 오신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았다고 말한다. 이유는 구약의 여호와께서 신약에 예수의 몸을 입고 오셨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구약의 여호와는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이다. 그러니 구약의 여호와께서 신약의 예수로 오신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완성하신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므로 구속사의 대표적인 하나님의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다.
창세기는 성경 전체의 모판(a seed plot)이다. 창세기의 흐름과 사상을 올바르게 이해하면 성경 전체를 이해할 수 있는 열쇠가 감추어져 있다. 농부이신 하나님은 ‘에덴’이라는 밭에 ‘여자의 후손’이라는 씨앗을 심으셨다. 그리고 쉬지 않고 ‘노아’라는 싹을 내고 ‘아브라함’이라는 줄기를 내고 ‘이삭’이라는 가지를 내고 ‘야곱’이라는 나무를 무성하게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여자의 후손이 잘 자라도록 ‘가인’이라는 벌레도 잡아주고 ‘이스마엘’이라는 산돼지도 쫓아내고 ‘에서’라는 망아지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울타리도 치셨다. 마침내 ‘요셉’이라는 꽃과 열매를 통해 장차 참 꽃과 참 열매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계시하셨다. 이것이 창세기가 모판으로서 보여준 역할이다.
이 모판의 이야기는 갈라디아 4장 4절에서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라고 기록함으로써 모든 성경의 논(畓)에 심어진다. 그리고 신천신지의 밭에 영생의 열매가 익게 하려고 지금도 쉬지 않고 일하신다. 하나님께서는 마치 농부가 봄에 뿌린 씨앗이 농부의 돌봄으로 말미암아 점점 자라나 가을이면 열매를 맺어 추수를 할 수 있는 것처럼 역사를 그렇게 운행하신다.
또 하나님께서는 전(全) 역사 안에서 이루실 구속의 사실들을 축약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의 일 년 농사의 절기 안에 심으시고 가르쳤다. 그것이 유월절, 초실절, 수장절이라는 삼대 절기다. 그러니 교회의 절기는 풍년제나 풍어제 같은 단순한 감사제가 아니라 구속의 절기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해마다 이 절기들을 지키며 이미 이루어진 구속의 은혜를 감사하고, 다가 올 구속의 역사를 소망하게 하셨다. 그러므로 신약 백성들은 이미 성취된 유월절이나 맥추절을 중단하고 부활절과 성령강림절을 지켜야 한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원하는 구속의 목적을 향해 역사를 운행하시는 것을 구속사, 또는 기독교의 역사관이라 하고 그 역사는 쉬지 않고 점점 발전한다.
필자는 구속사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바다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바다는 이 골짜기 저 골짜기에서 흘러 들어온 많고 적은 다양한 물들을 모두 받아들인다. 바닷가 갈대밭과 갯벌, 그리고 갯벌에 사는 게나 조개류의 입을 거처 용광로 같은 바다 속에서 정화된 물들을 다시 수증기로 증발하여 구름이 되고 비가 되어 대지에 생수를 제공한다. 이처럼 창세기부터 말라기까지 연결된 산맥의 골짜기에서 흘러내리는 ‘다양한 주제들’은 모두 바다와 같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주제들은 하늘보좌 우편에 앉으신 주님의 은혜의 비가 성령이 되어 다시 이 땅의 교회(성도)들에게 뿌려져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신다. 뿐만 아니라 장차오실 재림의 날을 고대하면서 신천신지의 영생의 열매를 소망하고 살게 하신다.
요한 필립 가블러(Johann Philipp Gabler, 1753-1862)는 1787년에 ‘Biblical theology’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하면서 교의신학과 구별되는 성경신학을 제창하였다. 그에 의하면 지금까지 교의신학 일변도의 성경연구가 진행되어 왔음을 염두에 두고 이제부터 성경을 역사적으로 탐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가블러에 의하면 성경은 창조부터 종말까지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을 인간들에게 계시하는 하나의 역사다. 그러므로 성경을 역사적으로 연구해야 한다. 부연 설명하면 성경이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시간이 흐르는 과정에서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한 과정을 기록한 것이기 때문에 성경을 역사적으로 연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가블러의 이런 주장은 구속사를 연구하는 데 지대한 공을 세웠다. 그러나 교의신학을 폄하하는 표현은 수긍할 수 없다. 성경신학이 역사의 흐름에 따라 성경을 이해하자는 장점이 있다면 교의신학은 성경의 주제들이 어떻게 발전하고 있는가를 연결하는 장점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필자는 구속사를 올바르게 정립하기 위해서는 주제별 연구의 교의신학과 역사적 흐름의 계시를 연구한 성경신학이 서로 협력하고 조화를 이루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성경에는 많은 시대, 다양한 문화, 그리고 여러 사건들과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러므로 다양한 주제들의 표현들도 많다. 구속사를 연구하는 자들의 사명은 시간의 흐름 속에 나타난 시대와 다양한 문화와 사건들, 그리고 그 속에서 나타난 주제들의 발전을 연구하여 재창조를 통해 자기 백성을 구원하고 모든 피조물을 구속하려는 하나님의 계획을 실현하는 과정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속사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창조를 회복하시는 하나님의 작정과 예정의 실현이다. 이런 점에서 성경신학이 씨줄(가로줄)이라면 교의신학은 날줄(세로줄)로 비유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성경신학의 씨줄과 교의신학의 날줄이 잘 조화를 이루고 정밀한 네트워크를 이루면서 신천신지를 향해 발전하는 것이 구속의 역사라고 필자는 주장한다.
구속사는 단 한권의 책으로 모두를 설명할 수는 없다. 그래서 필자는 구속사를 ‘구속사의 개론’과 ‘구속사의 전개’라는 두 부분으로 크게 구분할 것이다. 먼저 구속사의 개론에서는 구속사의 개념, 구속사의 목적, 구속사의 특성, 구속사의 해석, 구속사의 형식, 구속사의 내용, 구속사적 말씀강론의 실례 등을 중점적으로 다루고, 구속사적 말씀강론의 실례에서는 여호수아, 스테반, 바울의 말씀강론을 간략하게 소개할 것이다. 여기저기서 중복된 주제들이 소개될 것인데 그것은 구속사의 다양성과 관련성, 그리고 유기적인 통일성을 설명하기 위한 불가피한 경우가 있음을 먼저 시사한다. 다음으로 구속사의 전개를 논의할 것인데 그 범위와 양이 너무 방대하여 구속의 역사 제1권에서는 구속사의 개론을 정리하고 제2권에서 구속사의 전개로 창세기에 나타난 창조사, 노아홍수사, 이스라엘족장사, 출애굽기에서 소개하고 있는 해방사를 우선 기록할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 구속사의 전개를 제3권, 제4권, 제5권, … 등을 계속 발간할 것이다.
우선 본서를 출판하게 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그리고 본서가 나오기까지 기도하고 교정하며 연보해주신 광주요나교회 성도님들, 개혁신학연구회 목요성경연구반, 본서를 전남대학교 종교문화연구소 연구총서로 선정해 주신 연구소 관계 여러분, 출판해 주신 전남대학교출판부, 그리고 신학적 가르침을 주시고 본서를 추천해 주신 서철원 은사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본서는 완결된 책이라기보다는 구속사에 대한 더 활발한 연구의 시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더 풍성한 내용들을 보충하여 구속사를 연구하는 후학들에게 좋은 선물이 될 수 있도록 독자들의 지도편달을 바랍니다. 끝으로 어머님 이종덕 집사께 이 글을 바칩니다. 뿐만 아니라 필자를 위해 항상 기도하며 인내해 주신 아내 최희숙과 아들 대원, 딸 세정 집사의 유산 제3호로 이 글을 씁니다.

2014년 12월 25일
저자 김정민


1권 구속사의 개론

제1장 구속사의 개념

1. 구속사의 의미

‘구속사(redemption history, 救贖史)’란 기독교의 경전(經典)인 성경을 의미한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역사 안에서 자기 자신을 계시하시고, 역사 안에서 자신의 계획을 실현하는 과정을 기록한 책이다. 우리말 성경 출애굽기 3장 14절에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라는 번역이 있다. 여기서 ‘스스로 있는 자’라는 말은 전통적으로 하나님의 존재적 의미를 나타내는 ‘자존성’을 뜻하는 말로 해석되어 왔다. 그러나 히브리어 원문을 좀 더 분석해 보면 하나님은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역사 안에서 자신의 계획을 진행하신 영원하신 분이다. 뿐만 아니라 역사의 점진적인 발전에 따라 그가 하시는 일을 통해 하나님의 무한성을 점점 알아가게 된다는 사실이다.
히브리어 원문을 보면 “(에흐예 아쉘 에흐예)”라고 되어 있다. 직역하면 ‘나는 ~되어 질 자로 ~되어 질 것이다.’라는 말이다. 좀 이해하기 힘든 말이다. 관계대명사 아쉘을 가운데 두고 앞뒤로 똑 같은 말로 사용된 ‘에흐예’는 ‘일어나다, ~이 되다, 있다, 존재하다’는 뜻을 가진 ‘하야’의 미완료 1인칭 공성 단수 칼동사다. 히브리어 동사에는 현재형이 없고 과거와 미래형만 있어서 ‘I will be ~, 나는 ~될 것이다’라는 뜻을 가진 ‘에흐예’로 표현하고 있다.
“(에흐예 아쉘 에흐예)”를 영어로 번역하면서 70인역을 사용하여 ‘I am who I am’이라고 번역하였다. 그러나 본래 히브리어의 의미는 ‘I will be that I will be’에 더 가깝다. 그 뜻은 ‘나는 되기로 한 그대로 될 자다.’라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나로 인해 앞으로 되어 질 일들을 통해 너희가 알아가게 될 나이다.’ 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결국 우리말 성경에 ‘스스로 있는 자’라고 번역된 말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스스로 역사 안에서 증명해 나아가는 역사의 진행자요 통치자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역사의 진행에 따라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구속의 역사란 하나님 자신의 목표인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하기 위해 역사의 진행 속에서 자신의 구속의 경륜을 실현하므로 자신이 구속주요 하나님 나라의 왕이심을 나타내는 성경을 말한다.
하나님의 모든 계획의 목표는 자신의 나라를 완성해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속사는 하나님 나라 완성이라는 한 가지 목적을 향해 역사의 흐름 속에서 지속적인 실현을 통하여 점진적으로 발전해 나아가는 역사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완성은 반드시 구속이라는 한 가지 언약의 내용을,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그런 점에서 구속사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계시의 역사다.
목적과 내용이 한 가지라는 점과 지속적이고 점진적 발전이라는 특성을 가진 구속사로서의 성경은 구약의 창세기부터 신약의 요한계시록까지를 한 권의 책으로 본다. 성경 해석학의 관점에서 보면 구속사만이 오직 올바른 성경관이다. ‘구속사’라는 용어는 ‘구속의 역사(救贖의 歷史)’를 축약해서 표현한 말이다. 다시 말해 기독교의 경전인 성경 전체가 구속사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성경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구속의 역사라고 대답한다.
그런 점에서 구속사관이란 성경을 구속의 역사로 이해하고 해석하는 관점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구속사의 관점은 성경을 이해하는 유일한 열쇠다. 인간의 타락에도 불구하고 도덕적 피조물인 인간과 모든 피조물을 회복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구속 계획의 실현 과정을 연구하는 것은 모든 시대를 막론하고 말씀 강론자들의 사명이다. 그러므로 구속의 역사란 시간의 흐름 속에서 모든 피조물을 회복하시겠다는 하나님의 계획의 실현 과정이다. 시간의 흐름과 공간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께서 자신의 계획을 실현해 나아가시는가? 그것이 구속사의 연구 관건이다.
역사는 구속 안에서 쉬지 않고 움직인다. 역사는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운반하는 나룻배다. 역사는 하나님의 구속의 사역이 없이는 무의미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역사의 의미를 여러 가지 교훈을 들어 설명하려 하지만 역사의 목적과 의미는 하나님께서 목표하고 진행하시는 구속과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에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런 활동 때문에 역사는 쉬지 않고 계속해서 변하고 발전한다. 우리는 변해가는 역사를 효과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시대적 구분을 하는 것이다. 그런 시대적 구분 아래서 지금 이 시대는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의 주권시대, 즉 그리스도와 분리될 수 없는 성령의 시대라 부른다. 그러므로 이 책에서 말하는 구속의 역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성경 전체를 말한다.

2. 구속과 구원의 의미
성경을 연구하는 사람들 중에 상당수가 구원사(salvation history, 救援史)와 구속사라는 말을 명확하게 구분하지 못하고 혼용하는 경향이 많다. 그것은 구속과 구원의 의미를 명확하게 구분하지 못한 데서 생겨난 경우다. 구속과 구원이라는 단어를 명확히 구분하면 구속사와 구원사의 의미를 명확히 구분할 수 있다.
구속(救贖, Redemption, tWdP, ajpoluvtrwsi"")은 문자적 의미로는 대가(代價), 즉 값을 지불하고 모든 것을 본래 상태로 회복해 내는 일을 뜻한다(출6:6, 15:13, 시111:9, 호13:14, 엡1:7). 그런가 하면 구원(救援, Salvation, h[;Wvy,], swthriva)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사단의 권세와 죄의 멸망에서 도덕적 피조물인 인간을 건져내는 일을 뜻하는 데 강조를 둔다(창37:21, 45:5, 7, 출12:27, 14:13, 30, 마1:21, 8:25, 계19:1). 대가를 주고 원상복귀를 시키는 것은 사람뿐만 아니라, 논이나 밭 같은 인간 외의 것에도 해당된다. 그러나 사랑과 은혜는 도덕적 피조물인 인간과 관계에서 일어나는 일을 표현할 때 주로 사용한다. 그러므로 구속은 모든 피조물에 대한 회복을 나타낼 때 사용하는 포괄적 개념이며, 구원은 도덕적 피조물, 즉 인간의 회복을 나타낼 때 사용하는 윤리적 개념의 단어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완성될 회복은 단순히 인간에게만 국한된 회복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이 신천신지에 거할 수 있도록 새롭게 회복되는 것까지 의미한다. 우리는 그런 포괄적 의미로의 회복을 구속사라 일컫는다. 하지만 우리가 구원사라는 말을 사용할 경우는 인간은 모든 피조물의 중심이기 때문에 인간의 회복을 나타내거나 강조할 때 사용된다. 그러므로 엄밀히 따지면 구속사 속에 구원사가 포함되어 있다. 그런 차이점을 염두에 두고 성경을 구속사 또는 구원사라고 표현할 수 있다.
성경을 구원사라고만 표현하면 도덕적 피조물에게만 국한되는 표현이어서 성경 전체를 설명하는 데 부족함이 있다. 성경을 구원사로만 표현하면 도덕적 피조물의 회복만 국한시키므로 도덕적 피조물이 아닌 다른 피조물의 회복에 대한 문제는 구원역사에서 제외된다. 그러므로 성경 전체를 설명하는 말로는 구원역사라는 말로는 불충분하다. 물론 도덕적 피조물인 인간의 회복을 강조하기 위해서는 성경을 구원역사라고 표현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 전체를 설명하는 표현일 수 없다. 그래서 성경을 구원사로만 설명하게 되면 아직 구속과 구원에 대한 구분의 식견이 부족한 사람들에게는 성경 전체를 구원역사로만 이해하게 하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충분하다. 그 증거가 구속과 구원이라는 용어를 혼용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이다.
이런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좋은 실례가 데오도르 플랜팅어(Theodore Plantinga)의 성경과 구원역사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책은 구원역사를 이해하는 데는 탁월한 정보를 제공해 주고 있다. 그러면서도 아쉬운 점이 있다면 위에서 지적한 것처럼 성경 전체를 구원역사로만 보는 오해를 낳게 할 수 있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성경의 내용 중 구원역사를 설명하면서 구원 역사에 들어오지 않는 다른 부분을 제외시키면서 제외된 그 부분을 명확한 보충 설명을 생략하고 있기 때문이다.
플랜팅어는 성경과 역사의 관계를 설명할 때 ‘구원역사’라고만 답변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고 설명한다. 그 이유를 네 가지로 제시하는데 가장 먼저 제시한 내용이 성경 안에는 구원역사의 범위에 들지 않는 역사 이야기들이 들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실례를 들면서 창세기 앞부분에 나와 있는 세상 창조와 인간의 타락에 대한 기록은 성경에 나타난 역사적인 사건들 중에 가장 중요하고 실제적인 사건이지만 구원역사에는 들어가지 않는 것들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구원역사는 창세기 3장 15절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에서 시작한다고 설명한다. 구원역사를 설명하는 데 이보다 명확할 수는 없다. 그러나 다시 언급하지만 이 설명이 구원역사를 완벽하게 설명하기 때문에 성경 전체를 구속사가 아니라 구원사로 오해할 수 있는 옥의티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필자의 분명한 주장은 구원역사도 직접적인 사건만 구원 역사가 아니라, 구원역사를 위해 준비, 예비, 보충, 설명된 간접적인 사건들을 구원역사에서 제외하면 구원역사를 이해하는 데도 충분하지 않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직접적이고 문자적으로 구원역사를 설명하지 않고 있다고 해서 구원역사가 아닌 것도 성경에 있다고 말하면 안 된다. 그리고 그 부분을 구원역사에서 제외하면 안 된다. 그것은 창조와 타락을 제외하고는 구원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타락이 없으면 구원의 필요성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역사를 위한 배경, 기원, 관계들을 모두 구원역사 안에 넣고 구원역사를 풀어야 한다. 물론 플랜팅어도 이 부분을 인정하여 구원역사가 아닌 내용도 거의 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다루신 구원과 연관된 이야기라고 부연 설명을 하지만 이는 너무 모호한 설명이라는 것이 필자의 지적이다. 플랜팅어의 이런 표현적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성경을 구속의 역사로 표현하는 길 외에 다른 길은 없다. 구원과 구속의 의미를 구별하고 구원사와 구속사의 차이점을 구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3. 구속사와 일반사의 구별과 관계
역사는 시간의 시작과 함께 출발한다. 즉, 역사는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국과 우주의 두 세계를 창조하심으로 시작한다(창1:1). 이 천국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말미암아 새 예루살렘으로 나타날 것으로 창조 때 예비하셨다. 새 예루살렘으로 예비된 천국이 요한계시록에서 말하는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인 우주와 통합됨으로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진다. 이를 영원과 시간의 통합이라 한다.
역사가 끝난다는 말은 단순히 역사가 없어진다는 말이 아니라, 새로운 하나님의 나라인 신천신지(新天新地)로 완성된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창조는 단순한 역사의 시작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 완성을 목표로 출발한 하나님 왕국의 건설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을 요한 계시록 21장 1절부터 4절에서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라.”라고 설명하고 있다.
물론 아담이 타락하기 전에는 일반역사와 구속사의 구별은 없었다. 일반역사와 구속사의 두 줄기의 구별은 아담의 타락을 기점으로 시작된다. 그런 점에서 성경의 기록 목표는 일반역사의 흐름이 아니라, 구속사의 흐름이다. 그렇다고 해서 일반역사와 구속사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한 역사 안에서 일반역사와 구속사가 구분될 뿐이다. 그래서 역사의 목표는 구속의 완성이다. 구속사와 구분되는 일반 역사는 하나님의 계시를 전달해 주는 도구요 수단이다. 역사의 전체 목표가 구속의 완성이라면 구속의 완성을 향해 가는 구속의 역사를 돕는 역할을 하는 것이 일반 역사다. 그러므로 구속의 역사와 일반 역사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한 역사 속에서 구속사는 주인공이요 일반 역사는 조연이다. 필자가 하나의 역사를 구속사와 일반역사로 구분하는 것은 하나님의 특별통치와 일반통치를 이해시키기 위함임을 염두에 둔 것이다.
역사학자 토인비(Arnold J. Toynbee)는 그의 역사연구(A Study of History)에서 문명발생의 계기로 도전과 응전이라는 원리를 도입한다. 그리고 문명의 발생, 성장, 쇠퇴, 해체의 주기적인 과정을 살피면서 역사의 가치와 교훈을 찾으려고 노력한다. 그는 역사를 단순한 인류의 산물로만 보는 것이다. 물론 인류의 역사 연구에서 문명을 제외하고는 역사를 연구할 수 없다. 그러나 아무리 훌륭한 업적을 인류에게 남긴 역사학자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창조와 통치, 그리고 구속을 이해하지 않고는 역사에 대한 올바른 목적과 가치를 알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통치적 관점에서 보면 일반역사의 진행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보존하기 위한 보존 통치의 대상이며, 구속의 역사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구원하기 위한 구속 통치의 대상이다. 달리 말하면 구속의 역사를 위해 일반역사를 허용하고 보존하시고 운행하신다는 뜻이다.
구속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통치와 관련하여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하나님은 역사의 흐름 속에서 자기 자신을 스스로 증명해 나감으로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나타내는 분이다. 그런 점에서 전체 역사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역사가 완성되기 전에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명확하게 알 수 없다. 이것이 출애굽기 3장 14절부터 15절에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고 번역된 우리말의 진정한 의미다. 그러니까 ‘스스로 있는 자’라는 말은 하나님의 자존성을 의미하기 보다는 ‘역사 안에서 자기를 스스로 증명해 나가는 분’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주님 재림하신 그날이 와야 하나님과 얼굴을 대면할 수 있을 것이다.

제2장 구속사의 목적

구속사의 목적은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세상을 창조하셨다. 천국과 우주를 자기 나라의 영토로 삼으시고 아담을 자기 형상으로 창조하여 자기 나라의 백성을 삼으시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하라고 복 주시면서 자신은 스스로 왕이 되셨다(창1:1-2:25). 이 사실에 대해 계시를 받은 이사야 선지자는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너희는 나의 창조하는 것으로 말미암아 영원히 기뻐하며 즐거워할지니라. 보라 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운 성으로 창조하며 그 백성을 기쁨으로 삼고, 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워하며 나의 백성을 기뻐하리니 우는 소리와 부르짖는 소리가 그의 가운데서 다시는 들리지 아니할 것이며, 거기는 날 수가 많지 못하여 죽는 어린이와 수한이 차지 못한 노인이 다시는 없을 것이라 곧 백세에 죽는 자를 젊은이라 하겠고 백세가 못되어 죽는 자는 저주받은 것이리라.”라고 이사야 65장 17절부터 20절에서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를 예언하고 있다. 다니엘서 2장 44절에서도 “이 여러 왕들의 시대에 하늘의 하나님이 한 나라를 세우시리니 이것은 영원히 망하지도 아니할 것이요 그 국권이 다른 백성에게로 돌아가지도 아니할 것이요 도리어 이 모든 나라를 쳐서 멸망시키고 영원히 설 것이라.”라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가 설 것을 예언한다.
구약의 시대를 정리하고 신약의 시대를 도입하는 족보의 역할을 하고 있는 선구자 세례 요한은 마태복음 3장 2절에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라고 외치고, 마가복음 1장 15절에서는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라고 외치면서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친히 사람의 몸을 입고 예수의 이름으로 이 땅에 오심으로 하나님의 나라는 새로운 국면에 들어가게 되었다. 예수께서도 친히 자신이 천국의 주인이심을 전파하셨다(마4:17).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후서 3장 8절부터 13절에서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하므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라고 기록함으로써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 그 날을 소망하도록 당부하고 있다.
성경에는 다양한 주제들이 있다. 하나님,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나라(천국),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언약(약속), 여인의 후손(씨), 약속의 땅(기업, 유업), 하나님의 선택(예정), 예수 그리스도, 부활, 구원, 영생, 빛, 회개, 믿음, 소망, 사랑, 성전, 사탄(마귀), 사귐(교제), 선지자, 제사장, 왕, 보혜사, 성령 등 이외에도 수많은 주제들이 있다. 그래서 성경을 연구하는 많은 연구가들이 성경의 핵심적인 대 주제를 무엇으로 정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 많은 이론을 내세운다. 그러나 정통 칼빈주의 신학자들은 대부분 ‘하나님의 나라’를 성경의 핵심이요 대 주제라고 주장한다. 필자는 이런 주장에 따라 구속사의 목적은 ‘하나님의 나라’라고 주장한다. 다시 말하면 이 많은 주제들은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는 하나의 건물을 짓는 데 각종 요소에 해당 된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런 다양한 주제들을 하나님 나라를 구성하는 각각의 요소로 배치하여 설명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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