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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 언어 문화 공간을 읽다

혼불 : 언어 문화 공간을 읽다

김수연, 김연화, 김은정, 엄숙희, 장일구, 정도미, 정미선, 조아름, 진주, 최옥정 (지은이)
  |  
전남대학교출판부
2015-08-15
  |  
23,000원

일반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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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 언어 문화 공간을 읽다

책 정보

· 제목 : 혼불 : 언어 문화 공간을 읽다 
· 분류 : 국내도서 > 대학교재/전문서적 > 어문학계열 > 국어국문학 > 소설론
· ISBN : 9788968492365
· 쪽수 : 498쪽

책 소개

'혼불'의 언어를 통해 문화를, '혼불'의 서사를 통해 공간을 읽어본 나름의 연구 성과를 묶어낸 결과이다. 총 2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먼저 제1부는 '혼불'의 언어와 문화를 다룬 글로 구성되어 있다. 제2부에서는 '혼불'속 공간을 읽고 있다.

목차

머리말 05
해제 07

1부 『혼불』의 언어를 통해 문화를 읽다
서사 언어의 문화 가치 _장일구 / 18
서사 언어의 겹 풀기 _진주 / 52
서사적 텍스트성의 중층 _정미선 / 89
서사 축으로서 의례의 의미 읽기 _김연화 / 122
균열의 서사와 주체 _엄숙희 / 165

2부 『혼불』의 서사를 통해 공간을 읽다
여성(성)의 장소ㆍ공간 분화 _조아름 / 196
집의 공간적 의미망 _장일구 / 225
매안마을의 다층적 공간 표상 _정도미 / 255
인물의 뿌리 내리기 전략 _최옥정 / 283
몸의 공간화 양상 _김은정 / 387
서사 공간의 해체 구도 _김수연 / 419
유동적 공간 경험과 인간의 욕망 _엄숙희 / 447

저자소개

장일구 (지은이)    정보 더보기
서강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현대 소설 이론을 전공하여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6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부문에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현재 전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이다. 최명희의 소설 『혼불』에 관심하여 저서 『혼불읽기 문화읽기』, 『혼불의 언어』, 『서사+문화@혼불_α』 등을 냈으며, 서사 공간에 관심하여 『경계와 이행의 서사 공간』, 『서사 공간과 소설의 역학』 등의 저서와 다수의 논문을 냈다. 요즈음 공간에 대한 관심을 확장하여 차원・인지・뇌・신경에 관한 과학적 성과를 공부하는 데 힘을 쏟고 있다. 문학의 조건과 변수를 탐색한 ‘문학 더하기’는 그 과정의 한 소산이다. 이후 관련 워크북이나 문학 입문 교양서를 내려고 하는데, 어느 정도 진척된 상태다. 문학 플러스 인지 과학에 관한 책을 내고자 하는데 다소 원대한 꿈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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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연 (지은이)    정보 더보기
전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대학원 현대소설론 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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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화 (지은이)    정보 더보기
전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대학원 문학비평론 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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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정 (지은이)    정보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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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숙희 (지은이)    정보 더보기
전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 BK21+ 박사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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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미 (지은이)    정보 더보기
전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대학원 문학비평론 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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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미선 (지은이)    정보 더보기
전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대학원 현대소설론 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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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아름 (지은이)    정보 더보기
전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대학원 현대희곡론 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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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지은이)    정보 더보기
전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대학원 국어음운론 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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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옥정 (지은이)    정보 더보기
전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대학원 국어의미론 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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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전남대학교 인문대1호관 202호,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낡은 건물의 좁은 세미나실. 지난 가을 우리는 그 곳에서 ‘서사의 언어와 공간’에 대해 배우고 익혔으며 그 이론적 단서를 통해 소설 『혼불』을 읽고 해석하는 담론의 장을 펼쳐 즐거이 교유했다. 그 좁은 장소가 이내 드넓은 공간이 되었으며 서로의 생각을 나누어 모으는 문화적 수행의 장이 되었다. 한 학기 대학원 수업이라는 조건이 걸려 있기는 했지만, 우리는 『혼불』을 구심으로 한 공간적 사유와 문화적 실천을 제법 경험했다.
젊은 연구자들이 모처럼 얻었을 열린 사유의 여지를 기말 과제가 봉쇄하지 못하도록, 나는 일정한 분량이나 완결된 결과물을 요구하지 않고 여러 해석의 향배를 가늠한 바를 기술하도록 제안하였다. 그조차도 제출 여부에 괘념치 않을 듯이 말을 흘렸다. 그런데 학기말에 수확된 결실에 나는 자못 놀랐고 마음이 흔쾌했다. 성적에 관련된 과제물 파일이라며 의무로 저장하고 묻어 두자니 왠지 석연찮았다. 『혼불』에 관해 부끄럽지는 않을 만큼 연구한 나로서는 신예 연구자들의 혜안에 비친 『혼불』의 의미망이 대견하여 그냥 두기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일견 성기고 맹랑해 보일지 모르지만 그만큼 신선한 감각과 시선으로 『혼불』을 읽은 결과들이 해석의 지평을 확장하는 계기가 되겠다는 기대감이 부풀었다. 우리 학과에서 수행 중인 BK21플러스 사업의 주제인 ‘지역어 기반 문화가치 창출’에 부응하여 최적화된 서사 텍스트로 꼽을 만한 『혼불』의 가치를 정리하는 계기로 삼아도 좋으리라는 심산이 더해졌다. 여럿이서 쓴 단편을 모아 책으로 엮는 과정에서 신예 연구자들의 경험이 확장되는 것은 물론 단편적 논의로 닿기 어려운 해석의 지평에 이를 의미망을 짜서 『혼불』 연구의 장에 제시할 수 있으리라는 확신도 없지 않았다.
남의 시선에 띨라 조심스럽고 은밀하게 진행하려던 이 작업이 뜻하지 않게 알려진 통에, 의무감이 더해진 채 이 일을 일단락 짓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욕심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어떠한 조건에 얽매임 없이 순수한 학문적 열정으로 다지고 다져 결실을 내고자 했던 목표에 온전히 다다르지 못한 것 같아 아쉬움이 남는다. 처음 주저하는 태도를 보이며 부담감에 굳었던 신예 『혼불』 연구자들의 표정이 밝아지고 어깨가 한결 가벼워 보여 다행이다. 제법 의미심장한 일을 벌인 것 같아 내심 기쁘다. 저 젊고 참신한 연구자들이 나아갈 길이 그저 드넓고 자유로운 공간에 이어지기 바랄 따름이다.

삼복염천 아래 용봉골에서
여러 저자 가운데 장일구 적음


1부 『혼불』의 언어를 통해 문화를 읽다

서사 언어의 문화 가치

서사에서 언어의 쓰임새는 각별하다. 서사란 이야기를 통해 의사소통을 활성화하려는 인간 활동의 주요 국면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삶의 대소사는 물론이거니와 감정과 생각을 이야기로 지어 이야기 나누어 소통에 부친다. 현실에서 취하였건 상상하여 가공하였건 이야기하기로 선택한 이야깃거리를 이야기하기 좋게 가공하여 구성진 언어로 표현함으로써 의사소통을 활성화하기까지, 서사 공정에서 언어는 가장 중요한 구심을 이루는 매재media이자 기제mechanism이다.
‘이야기’는 그 말의 용례가 시사하듯이 이야기의 제재를 이르기도 하지만 이야기를 짓고 이야기로 표현하는 방식을 아울러 이르기도 한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도 관건이지만 어떻게 이야기하는지도 ‘이야기’에 대해 논급할 때 중요한 관건이다. 이때 ‘어떻게’의 층위에는 이야기의 표현만이 아니라 이야기의 수용에 관한 항이 상수로 대입된다. 어떻게 이야기해야 이야기의 의중을 잘 전할 수 있으며 어떻게 이야기해야 같은 이야기라도 더 흥미롭게 전할 수 있을지 등에 관한 심려가 개재되는 만큼, 이야기를 전하는 입장에는 늘 의사소통을 활성화하여 이야기의 효력을 최적화하려는 전략적 모색이 근저에 깔린다. 그래서 ‘이야기’ 텍스트를 온전히 해석하기 위해서는 이야기의 관념적 실체에 상응하는 파불라fabula 층위에 국한되지 않고 이야기의 소통 국면에 상응하는 담론discourse 층위로 이해의 거점을 이동시켜야 한다. 이야기 텍스트를 ‘서사narrative’ 개념에 대응시켜 논급하려는 서사론narratology에서 입론의 제일 거점이 바로 이야기를 통한 인간의 의사소통 공정processing에 있다는 점을 의식할 필요가 있으며, 서사의 층위 가운데 담론 층위의 역동적 양상을 고찰하는 데 거개의 논점이 수렴된다는 데 주목해 마땅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야기의 용례와 언어의 층위에 관한 이해의 전제를 전향함으로써 ‘서사언어’의 자질에 대해 논의할 수 있는 여지가 조성된다. 이야기의 장에서 펼쳐지는 말의 다채로운 향연과 그에 깃든 언어의 역동적 자질에 대해 고려하고서야, 의사소통의 한 방편으로서 세워진 서사언어에 대해 온전히 이해할 맥락을 세울 수 있는 것이다. 삶의 경험을 나누고 감정과 생각에 얽히고설킨 마음의 골을 맺고 푸는 데 관여된 서사언어의 역동적 작용 양태에 주목하고 보면 그 문화적 친연성을 엿볼 수 있다. 이야기로 엮고 푸는 삶의 면면들을 돌이킬 때 서사의 문화적 기능을 재고할 지평이 열리는데, 일상의 담화에서 서사언어의 구심들을 구성하여 이를 거점으로 문화적 수행의 범주를 확산하고 문화 적층의 밀도를 더하는 인간의 예지를 재삼 주시하게 되는 것이다.
이야기는 문화의 동력원이자 문화적 수행의 주요 방편이면서 그 자체로서 문화적 결정結晶이다. 이야기의 소통을 원활하게 하려는 서사 공정의 매재이자 서사를 통해 창의되고 창출되는 언어의 새 국면들에 주목하는 것은, 인간 삶의 다면이 수렴되고 집산되는 문화장cultural fields에서 파생된 다면적이고 다층적인 가치를 고양하려는 모색과 조응한다. 서사는 언어를 통해 산출되고 언어의 용법 내에서 의미를 얻지만, 서사적 수행을 통해 안출된 서사언어가 일반 언어의 용례를 확장ㆍ재편하고 그 의미망을 확산시켜 문화장에 환류하는 공정의 구심에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서사언어와 일상어의 소통 함수
이야기에 쓰이는 언어라고 해서 일반적인 언어와 다를 바는 없다. 문학 장르 가운데 서사가 일상어를 통해 구현되는 특징을 지닌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서사는 문학 고유의 언어가 별개로 독립된 영역에 구축되어 있다는 생각에 제동을 건다. ‘서사+언어’ 항을 세울 때 우선 대입할 상수가 ‘일상’이다.
일상에서 쓰이는 언어는 언어 능력linguistic competence에 관여된 국면보다는 언어 수행linguistic performance에 관여된 면이 더 큰 ‘현상’이다. 일상적 언어는, 일정하게 조형되어 굳어진 언어적 실체에 걸친 면보다 역동적 상황에 부쳐지고 다변화될 가능성에 노출된 면에 대입되어, 다양한 담화 맥락과 조건에 조응된 언어 수행의 양태를 관건으로 한다. 서사는 이러한 언어의 수행적 국면과 일상어 담화의 양상에 관여된 언어 현상의 한 영역에 귀속된다.
기실 이야기를 ‘서사narrative’ 범주에서 다루는 관점은, 이야기가 이야깃거리만으로 자명하게 이루어진다는 실체 개념을 전제하지 않고, 의사소통에 관여된 담론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현상으로 보는 구성적 개념을 전제한 방법론적 입장에서 파생된다. 이야기는 자명하게 주어진 대상이나 독립적 노에마Noema가 아니다. 이 세상 어디에도 ‘이야기’라는 것 자체는 없다. 삶의 경험이나 생각과 감정 따위를 표현하여 수용자들의 반응을 부르는 담론적 효과가 드러나면서 이야기가 구성되는 현상이 있을 뿐이다. 이 현상은 고립된 화자만으로 이루어질 수 없고 듣거나 읽고 반응하는 청자나 독자가 참여함으로써만 이루어질 수 있다. 그래서 이야기는 대화의 장을 바탕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노래를 흥얼거리는 장면은 대수롭지 않으나 혼자서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은 어색하다. 혼자서 이야기를 떠들어 댈 수는 없는 노릇인 것이다. 천상 서사는 ‘대화 장르’이다.
소통의 장에 부쳐져 모종의 효력이나 의미를 산출하여 빚어지는 이야기를 ‘서사 현상’에 대입시킬 때의 관건은, 이야기가 오가는 과정에서 거래되는 문화적 약호code에 기반을 둔 언어 수행의 호혜적 공정에 있다. 이야기가, 표현되어 누군가에게 전해져 반응을 부름으로써 의미체가 되는 데 실패하여 소통에 부쳐지지 못한 채 추상적 이야깃거리인 파불라fabula 층위에 되돌려져서는 서사 현상에 회부될 수 없다. 이런 정황에서는 그 가치를 판정할 텍스트를 얻지 못한 터, 우리는 그에 대해 하릴없이 손 놓고 있어야 하는 난관에 봉착할 수밖에 없다. 이야기는 표현되어 텍스트 차원의 형태를 입을 때라야 성립될 수 있는 언어 현상의 일종이라는 점을 넘겨보아서 안 된다.
관념 영역에 형성된 이야깃거리는 언어를 통해 구현되면서 의미 있는 텍스트가 되고 소통에 부쳐질 서사 현상으로 드러난다. 소통이 활성화되기 위해서는 이야기를 전하는 데 쓰이는 언어가 일반적인 용례에서 크게 벗어남 없이 효과적으로 이야기를 구성하고 활발한 반응을 부르는 방향으로 쓰이는 편이 온당하다. 언중이 많이 모일수록 이야기의 장은 성황을 이루게 마련, 소통이 수월하게 이루어지게끔 언중들이 쓰기에 적절한 일상적 언어의 거래가 이루어지는 것은 수순이다. 서사는 일상어를 기조로 구성되는 언어의 향연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특히 ‘소설’은, 고전적 이야기로서나 근대적 양식으로서 구성된 이야기로서나 간에, 일상에서 쓰이는 언어를 통해 생각과 경험과 느낌을 나누어 삶의 장에 부치는 서사의 자질을 여실히 입증한다.
그 이야깃거리가 일상적 현실에 기반을 둔 경우라면 더욱 그러하지만, 허구적 판타지라도 이상을 품거나 꿈을 꾸는 이들의 일상을 투사한 것인지라, 사람들이 지어 나누는 이야기는 그 구성이나 방식 면에서 일상적 언어 수행의 범위를 넘어서서는 소통에 부쳐질 수 없다. 서사의 관건은 이야기의 제재만 아니라 이야기의 구성과 담론을 아우른다는 사실에 재삼 유의해야 한다. 삶의 장에서 이야기가 일정한 의미를 확산시키는 계기가 되거나 일정한 기능을 담당한다면, 이는 관념 층위의 이야깃거리가 텍스트로 변환되어 드러남으로써 모종의 의미를 발현하고 사람들 사이에 모종의 담론적 효과를 발산하여 영향을 끼쳤다는 얘기다. 이야기는 의사소통 공정에 회부되어 유효한 의미를 창출할 때 서사적 자질을 획득하게 되는데, 주 동력 기제가 일상의 언어인 것이다.
다만 이야기가 삶의 전역에 걸친 일들을 다루며 특히 ‘소설novel’로 범주화되는 이야기 양식인 경우 삶의 대소사를 총체적 국면으로 비약하여 다루는 성향이 있으므로, 서사의 언어는 실제 담화 현장에서 통용되는 일상어라도 일회적 국면이나 특정 영역에 한정된 담화 양상만 채용하는 데 국한되지 않는다. 일상어로서 개연성 있는 언어 현상의 면면을 서사 담론으로 변환하여 의사소통 공정에 회부하고 일상적 언어 수행의 다면적이고 다층적인 양태를 다채롭게 구현함으로써, 같은 이야기라도 다른 의미와 효과를 산출할 수 있도록 운용하는 담론 회로를 작동시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다 같이 쓰는 언어이면서도 서사에 채용된 언어의 면모가 사뭇 다른 형상인 듯한 인상을 불러일으키는가 하면, 서사언어 특유의 문체 감각이 돋보이는 것처럼 보이는 형국이 연출되곤 한다. 일견 서사언어가 문체적 변별 요소 두드러진 독립적 언어 운용의 미감에 맞닿아 있다는 식의 선입견도 이 때문에 비롯된 것일 테다.
기실 서사에 쓰이는 언어는 기본적으로 사회방언sociolect 차원에서 탐색될 사안이다. 요컨대 ‘작가’(구술가이든 기술가이든)에 상응하는 언어 계층class에서 통용되는 특유의 언어 수행 양상이 사회방언의 국면에 수렴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작가 사회의 방언이, 일반적인 사회방언처럼 일정한 무리가 한정된 영역 내에서 공유하는 어휘나 특유의 어법 정도로 환산되는 것은 아니다.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표현하여 이해를 원활하게 하고 의미를 산출하는 매재로서 순조롭게 작동하도록 서사 공정에 최적화된 언어의 양태는, 서사의 구성이나 문체 등을 일정한 방향으로 환원하여 정리할 수 없는 현황에 비견되게, 일정한 범주의 실체적 목록을 작성하거나 유형화를 꾀할 수 없을 만큼 각양을 이룰 터, 이는 개인방언idiolect에 근사할 수 있다. 여하튼 서사언어는 실체나 표준을 전제한 문법이나 언어 능력 면에서가 아니라, 화용적 조건과 구성적 개념을 전제한 방언이나 언어 수행 면에서 논의의 거점을 마련할 수 있는 사안이다.
이때 ‘방언’은 단순히 ‘지역’이라는 열성 인자를 안은 언어 유형으로 국한되어서 안 된다. 더욱이 이에 대한 입론이, ‘중앙’이라는 우성 개념을 앞세워 중심의 가치를 지대한 것으로 전제한 채 중심 이외의 전역을 주변적 가치로 몰아 폄훼하는 이념이 빚은 담론적 실천에 기울어서는 곤란하다. ‘방언’은 단지 일정한 영역이나 층을 한정하는 개념적 조작에 의한 ‘이름’이지 그 자체가 본질적 가치나 의미를 응축한 표상은 아니다. 특히 이를 ‘장소’로 구획된 특정 지역에서 ‘만’ 변함 없이 쓰이는 언어를 지시하는 기표에 획일적으로 대응시키는 전제는 위험하다. 방언은 지역에 따라 드러나는 언어 현상의 일면이지 그 자체로서 모종의 단자Monad적 경계가 자명하고 확고하게 주어진 본체가 아닌 것이다. ‘표준’이라는 규범적 조작을 통해 인위적으로 지어진 ‘표준어’라는 본체에 상대되는 술어로서 ‘방언’이 운위되곤 하는데, 이는 개념 범주상 대를 이룰 수 없는 조합을 바탕으로 한 만큼 논리적으로 부당하다. 표준어 권역에 해당하는 ‘지역’에서조차도 당해 언중들의 언어 수행 양상에 대해서는 표준어에 부응하는지 여하를 따져야 하는 만큼, ‘표준어 권역의 지역 방언’이 엄연한 현상으로 드러나고 있다는 점을 전제에서 빼놓아서는 안 된다. ‘중앙’이라는 이념적 개념을 덧붙여 ‘표준어=중앙어’라는 등식을 세울 경우는 더욱, 특정 권역 이외의 영역에 열성 인자를 부여하여 가치를 무화하려는 담론의 저변에 도사린 이념적 저의를 들추는 일이 요구된다. ‘지역’이 그러하듯이 ‘방언’ 혹은 ‘지역어’는, 폐쇄적 이념의 온상인 ‘장소’ 개념이 아닌, 인간의 자유를 향한 열린 심성을 투영한 ‘공간’ 개념을 맥락으로 그 방법론적 구심들을 구성해야 한다. 공간적 사유의 지평에서 ‘중앙/지역’의 이분법을 해체해 마땅한 것이다.
그러자면 서사에 채용된 지역어 혹은 방언의 효과에 대한 왜곡된 논의의 결과를 여실히 들추는 것이 우선이다. 이를테면 소설에서 방언을 활용하여 이야기의 토속적 정감과 향토적 색채를 더하여 작중 인물과 배경에 친근하게 다가서게 함으로써 몰입감을 높인다는 식의 논급이, 지역의 열성 인자를 부각한 이념적 전제들에서 비롯되었음을 갈파할 수 있다. 서사의 문체적 효과는 단순히 방언을 채용했다고 해서 인상적으로 산출되는 것이 아닐 뿐더러, 지역의 정서는 무조건 토속적이고 향토적이며 친근감을 유발한다는 식의 발상이 논리적으로 입증되지 않은 전제에서 비롯된다는 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기술한 이야기 양식의 독보적 장르종인 ‘소설novel’에서 서사 담론의 주요 국면인 문체의 역학에 관여된 언어 자질에 대한 검토가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다. 문체의 가치가 고평되곤 하는 『혼불』의 문체 자질을 구성하고 있는 여러 요소 가운데 일상적 담화에 부가된 방언에 관련된 대목들을 예시 삼아 살펴보자.

마당에서 콩심이가 달랑거리며 뛰어가는 발자국 소리가 들려온다. 누렁이와 함께 뛰는지 무어라고 땍땍거린다. …(중략)…
고것은 안서방네에게 가끔씩 쥐어박히면서도 그 옆에 가서 쪼그리고 앉아, 이런저런 자잘구레한 이야기의 말 동무도 되어 주고 낫낫하게 잔심부름도 곧잘 하였다.
“아이고, 이년아. 너는 무신 노무 목청이 그렇게 때까치맹이로 땍땍땍땍. 내 귀가 마대. 조신허게 가만 가만 좀 못허겄냐?”
안서방네는 콩심이의 주둥이를 향하여 주먹을 질러 보인다.
콩심이는 혓바닥을 날름하며 눈을 질끈 감는다. 알았다는 시늉이다.
“너 이년, 이 댁으 청암마님이 어뜬 양반인지 알기나 허냐? 매급시 천방지축 팔랑거리고 댕기다가, 다리 몽생이 분질러질 중 알어라.”
“아앗따아, 워찌 고렇코롬 무선 양반이다요?”
“이년. 이 주둥팽이, 어른이 무신 말을 허는디 그렇게 비얌 셋바닥 맹이로 날름 말을 받아먹냐? 그렇다먼 그렁갑다, 허고 속으로만 알어들을 일이제.” (1권, 274~275쪽)

전라 남원 지역에 터 잡은 매안 이씨 양반가의 하인인 ‘안서방네’와 ‘콩심이’ 사이에 벌어진 장면이다. 특히 둘 사이에 오가는 대화에 쓰인 방언이 도드라지는데, 음성상징어를 직접 발화하여 감각을 직서하는가 하면 욕설이라 해도 좋을 비속어를 적나라한 방언에 여과 없이 담아 담화의 현장감이 살아나는 대목이다. 둘의 처지에 비추어 보면 영락없이 벌어질 법한 일상적 담화의 실감이 구현되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특히 구성진 서남 방언의 어감이 담화 상황의 개연성을 드높이는 작용을 하고 있다. 어휘는 물론이거니와 말을 맺는 어미나 선어말어미 등에서 문법적 변별이 선하게 기술되어 있어서 방언의 어감이 두드러지게 표출된 것이다. 게다가 ‘-의’를 굳이 ‘-으’라고 표기하여 서남 방언권 일부에서 보이는 특유의 음감을 표기에 반영하고 있어, 담화 상황에서 쓰이는 방언의 양태를 기술한 섬세함이 극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흥미롭게도, 대화 당사자들의 발화만이 아니라, 이야기의 문맥을 형성하며 대화 상황을 서사 전개에 융해하는 역할을 하는 서술자의(서술자가 초점화된) 발화에 인물의 어투가 스며 든 서술상황이 드러난다. 이를테면 ‘달랑거리며 뛰어가는, 땍땍거린다, (어린 아이를 가리켜) 고것은, 쥐어박히면서도, 주둥이, 주먹을 질러 보인다, 혓바닥을 날름하며’ 등과 같이 서술자의 발화에서 상당수의 비속어가 드러나며, 방언으로도 분류되는 ‘낫낫하게’가 쓰이는 식으로, 인물의 담화에서 돋보이는 일상어의 요소가 서술에 적극 반영되는 국면에 방증이 더해진다. 일견 서술자가 인물들과 근거리에서 그들의 행위를 관찰하여 서술하는 상황에서, 인물의 의식과 감각에 물든 나머지 서술자로서의 객관적 태도를 놓치고 표현마저 인물의 것을 따르는 식으로 전도된 서술상황이 펼쳐진 셈이다. 요컨대 서술자의 발화에 인물의 의식과 발화가 개입되어 서술상황의 불확정성이 더해짐으로써 서사의 역동성을 보조하는 터, 단순히 담화 현장의 실감을 구현하는 선에 국한된 문체 효과를 발하는 것이라고만 하기에는 석연찮다.
이러한 정황은 양반가 인물들 사이의 대화 상황을 기술한 대목을 보면 더 분명해진다.

효원은 숙인 이마를 더욱 깊이 수그렸다. 그네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으랴. 그네 자신이 주도하여 하는 일이라면, 두부를 자르듯이 네모 반듯하게 경영하여 어여쁘게 할머님 앞에 놓아드릴 수도 있겠지만, 혼자 앉아 아무리 각골명심 새겨들어본들 무슨 하릴 있으리오.
(할머님의 심경을 제 어찌 모르겠는가……. 하오나, 다만 헤아려 드리올 뿐 더 어쩌지도 못하고, 제 몸으로 남의 인생 사는 것이 무슨 희롱인지 알 수 없습니다. 어인 운명이, 제가 바라는 대로 살지 못하고, 살라고 주어지는 것을 살아야 하는다. 여인이라 그러한가, 남들도 나 같은가. 만들고 고치고 소망하는 것이 모두 다 홀로 달을 바라봄과 같으니 손발이 있으면 무엇하고, 뜻이 있으면 무엇하겠는가.)
효원의 수그린 이마와 각이 진 어깨에 그 단단한 마음이 글자처럼 드러나 보였는지 청암부인은 미소를 머금었다.
그리고 손부의 손을 따뜻하게 잡는다.
“…(중략)… 순리가 있는 것을. 허나, 나는 이렇게 하루가 다르게 늙어가고, 시절은 흉흉하여 앞날을 예측하기 어려운지라, 어린 너한테 과중한 짐을 부려 버리고자 이렇게 자꾸 다짐을 하는 것이니라.”
청암부인은 쥐고 있는 효원의 손을 조용히 조용히 어루만지고만 있었다. 부인 손의 다순 온기가 효원에게로 번지며 스며드는 것을 효원은 느낀다. 그 온기 속에는 추상秋霜의 찬서리 기운도, 뇌정雷霆의 울음 소리도 아닌 그저 한 아낙의 간절한 심정만이 어려 있는 것 같았다. (1권, 274~27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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