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o
logo
x
바코드검색
BOOKPRICE.co.kr
책, 도서 가격비교 사이트
바코드검색

인기 검색어

실시간 검색어

검색가능 서점

도서목록 제공

바진의 수상록과 1980년대 중국사회

바진의 수상록과 1980년대 중국사회

이희경 (지은이)
  |  
전남대학교출판부
2018-06-15
  |  
12,000원

일반도서

검색중
서점 할인가 할인률 배송비 혜택/추가 실질최저가 구매하기
알라딘 10,800원 -10% 0원 600원 10,200원 >
yes24 로딩중
교보문고 로딩중
영풍문고 로딩중
인터파크 로딩중
11st 로딩중
G마켓 로딩중
쿠팡 로딩중
쿠팡로켓 로딩중
notice_icon 검색 결과 내에 다른 책이 포함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중고도서

검색중
로딩중

e-Book

검색중
서점 정가 할인가 마일리지 실질최저가 구매하기
로딩중

책 이미지

바진의 수상록과 1980년대 중국사회

책 정보

· 제목 : 바진의 수상록과 1980년대 중국사회 
· 분류 : 국내도서 > 대학교재/전문서적 > 인문계열 > 역사학
· ISBN : 9788968495083
· 쪽수 : 234쪽

책 소개

『수상록』에 수록된 글들을 세밀하게 분석하는 방식으로 중국의 1980년대가 이 작품에서 어떻게 묘사되었는지 살펴보고, 바진이 계승하고자 했던 5ㆍ4지식인 정신이 어떤 과정을 거쳐 회복되는지 고찰하였다.

목차

제1부 『수상록』 연구

『수상록』의 출발점과 구조
『수상록』의 출발점 / 17
『수상록』의 구조 / 29

80년대를 향한 첫 걸음 : 「편지 한 통」과 『수상록』 제1권
용감한 선택, 자유롭지 못한 사고 / 40
『수상록』 기본 사상의 맹아들 / 45

세계와 자아에 대한 재인식 : 『탐색집(探索集)』과 『진화집(眞話集)』
‘탐색’과 ‘진실 말하기’의 의미 / 71
무정부주의에 대한 조심스러운 접근 / 87
지식인의 사회적 책임 / 91
자아 해부와 ‘마음의 노예’ / 96

병마와 맞서며 : 『병중집(病中集)』
정신오염 제거’ 운동 / 105
건강 악화와 문체의 변화 / 111

마지막 빛을 발하다 : 『무제집(無題集)』
문혁에 대한 향수를 둘러싼 지식인과 민간의 입장차 / 118
창작의 자유와 마지막 참회 / 126

1980년대 중국 원로지식인들의 분노 표출의 양상 : 자오단, 바진, 샤옌을 중심으로
들어가며 / 139
자오단 - 죽음을 앞둔 지식인의 분노 / 145
바진 - 타인과 자아를 함께 겨냥한 분노 / 151
샤옌 - 지식인 당원의 자기변호를 위한 분노 / 160
나오며 / 168

참고문헌 / 171

제2부 『장생탑』, 『휴식의 정원』, 『차가운 밤』 소론

우언과 상징으로 빚은 현실 : 바진 동화집 『장생탑』의 구조와 주제 분석
들어가는 말 / 179
『장생탑』의 서술자와 구조의 특징 / 183
『장생탑』의 창의성과 주제사상 / 191
나오는 말 / 198

『휴식의 정원(憩園)』 : 이상과 그리움의 만남
작품 소개 / 202
서술자 ‘나’, 그리고 봉건제도에 대한 비판 / 204
아나키즘적 이상 추구와 고향에 대한 향수 / 209

『차가운 밤(寒夜)』 등장인물 유형에 관한 짧은 고찰
중일전쟁과 평범한 지식인들의 삶 / 217
‘사회’에 의해 배척당한 다수의 사람들 / 219
‘사회’에 의해 수용된 소수인 / 226
지식인은 자주권을 가지고 있는가? / 231

참고문헌 / 233

저자소개

이희경 (지은이)    정보 더보기
전남대학교 중어중문학과 부교수. 1973년 광주 출생. 전남대학교 중어중문학과 졸업, 중국 푸단대학교(復旦大學) 중문과에서 중국현당대문학 전공으로 석·박사 학위 취득. 저역서로 『바진의 「수상록」과 1980년대 중국사회』(저서, 2018), 『공감장이란 무엇인가: 감성인문학 서론』(공저, 2017), 『계몽의 자아와해』(공역, 2014) 등이 있고, 주요 논문으로는 「1980년대 중국사회의 동일성과 공감장」(2017), 「문혁에 내재된 대안 근대성의 요소들」(2017), 「우한일기 논쟁을 통해 살펴본 공감장의 형성과 투쟁」(2021), 「중국몽: 새로운 보편가치의 등장인가, 대안근대성의 함정인가?」(2022) 등이 있음.
펼치기

책속에서

『수상록』의 출발점과 구조

『수상록』의 출발점
문혁에 대한 반성
‘문혁’의 종결은 중국인들에게 다음과 같은 공통된 질문을 남겼다. 지난 십년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향후 어떤 미래를 선택할 것인가? 공산당 내부에서 발생한 ‘범시파(凡是派)’와 ‘실천파(實踐派)’ 간의 사상투쟁 역시 이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한 과정 가운데 하나였다. 두 파의 대립 속에서 ‘실천파’를 지지하는 사상계, 문예계, 그리고 민간의 지지세력들이 우후죽순처럼 성장해갔다. 1978년 5월 11일자 『광명일보(光明日報)』는 「실천은 진리를 검증하는 유일한 기준(實踐是檢驗眞理的唯一標準)」이라는 특약평론가의 글을 발표하여 ‘범시파’의 주장이 마르크스주의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비판하고 “일체의 사상과 이론은 반드시 실천을 통해 검증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문혁을 평가하는 사상적 잣대를 최초로 제시한 것이자 1976년 실각한 덩샤오핑에 대한 공개적인 지지 표명이었다. 일반 시민들도 베이징 시단(西單) 민주의 벽에 대자보를 붙이며 변화를 요구하는 목소리를 높였다. 단편소설 『상흔(傷痕)』, 극본 『소리 없는 곳에서(於無聲處)』 등의 문학작품이 일으킨 반향은 새로운 시대에 대한 갈망이 얼마나 뜨거웠는지를 보여준다.
1981년 6월 27일, 중공 제11회 중앙위원회 제6차 전체회의에서 통과된 「건국이래 당의 약간의 역사문제에 관한 결의(建國以來黨的若干歷史問題的決議)」는 “‘문화대혁명’이 당, 국가, 그리고 인민으로 하여금 건국이래 가장 심각한 좌절과 손실을 맞게 했으며”, “‘문화대혁명’의 이러한 전체적이며 장기적인 ‘좌’경의 심각성은 마오쩌둥 동지에게 주요한 책임이 있다”고 인정하였다. 아울러 과거 모든 국가권력이 마오 한 사람에게 집중된 현상에 대해서는 “이러한 복잡한 현상은 일정한 역사조건의 산물”로 “오래된 봉건전제주의가 사상 면에서 남긴 독소”로 규정짓고 이러한 독소가 “당의 권력이 과도하게 개인에게 집중되고, 당 내 개인의 독단과 개인 숭배현상이 팽배하여 당과 국가로 하여금 ‘문화대혁명’의 발발과 발전을 방지하고 제지하기 어렵게” 하는 조건을 제공하였다고 지적했다. ‘문혁’에 대한 당 중앙이 내린 이 같은 결론은 이후 중국사회가 ‘문혁’을 이해하는 주요한 사고의 틀을 제공하였다.
문혁 시기 온갖 고초를 겪은 지식인들에게도 당의 해석은 상당히 큰 의의가 있었으나, 동시에 자신의 입장에서 출발하여 문혁을 반성할 필요도 있었다. 해방 이후 지식인을 겨냥한 몇 차례의 정치운동이 있었지만, 문혁 중에 그들이 받은 탄압은 이전 운동들의 수준을 훨씬 능가하는 것이었다. 신중국 성립 이후 지식인을 겨냥한 공격은 1955년 ‘반후펑 집단(反胡風集團)’ 운동에서부터 본격화되었다. ‘후펑 집단’에 대한 비판도 “지식계의 범주를 초월하여 전 인민에게 주입식 교육을 시킴으로써 대도시에서뿐만 아니라 전국적인 범위 내에서 시행하도록” 했지만, 당시 비판 대상은 특정 범주에 속한 사람들, 곧 후펑과 그 동료들에 국한되었다. 이 범주에 속하지 않기만 하면 비판의 칼날을 충분히 피할 수 있었다.
1957년 ‘반우파’ 운동은 이전에 있었던 여러 차례의 사상개조 형식을 모방하여 진행되긴 했으나, 비판의 강도가 더욱 강해졌고 그 범위도 훨씬 넓어졌다. 매 단웨이(單位)마다 반드시 5%의 우파분자를 색출해야 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약 40만에서 70만에 이르는 지식인들이 소속 단웨이에서 쫓겨나 농촌이나 공장으로 하방당하여 노동개조에 참여해야 했다. 이때부터 비판의 대상이 된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 사이의 정치적 성향을 구분 짓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상황이 상당히 악화되긴 했으나, ‘반우파’ 운동 당시 공산당은 지식인에게 타협의 여지를 남겨두었다. 비록 모두에게 적용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정부의 제시안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일부 인사들에게는 ‘반우파’ 투쟁의 폭풍을 피해갈 수 있게 해준 것이다.

잡문가(『新民晩報』의 편집장이었던 자오차오거우(趙超構)를 가리킴-필자)의 당시 처지는 더 나빴다. 그 며칠 간 그의 얼굴에서 미소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기에 무척 걱정이 되었으나 그의 상황이 어떤지 물어볼 수도 없었다. 베이징에 있는 내가 상하이의 석간신문을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틀이 지나자 그의 웃음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알고 보니 그는 자아반성의 글을 한 편 쓰라는 암시를 받고 밤에도 상하이로 시외전화를 걸어 석간신문에 발표를 했다는 것이다. 반성문이 양해를 얻게 되고 그의 태도는 칭찬을 받아 그 역시 마음을 놓게 되었다. 한 고비를 넘긴 것이다. (125 ‘긴고아(緊?兒: 손오공의 머리테) 주문’)

하지만 문혁에 이르러서는 이처럼 희박한 타협의 여지마저 자취를 감추게 된다. 어느 지식인이 당의 입장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느냐 마느냐의 차원을 넘어 지식계 전체가 철저하게 부정하고 타도해야 할 적으로 규정된 것이다. 라오셔(老舍), 예이췬(葉以群), 푸레이(傅雷) 등 저명 문인들의 연이은 자살은 문혁 시기 막다른 궁지에 몰린 지식인들의 절망을 상징한다. 문혁의 시작을 알리는 「5ㆍ16 통지」는 문혁의 목표를 제시하면서 기존의 지식계를 철저히 타파할 것을 명시하고 있다.

학술계, 교육계, 출판계의 자산계급 반동사상을 철저히 비판하고, 이 문화영역의 영도권을 쟁취한다. 동시에 당, 정부, 군대와 문화 영역 각계에 잠입한 자본계급의 대표적 인물들을 반드시 비판하여 제거하고, 어떤 이들은 그들의 직무 위치에서 이동시켜야 한다.

신중국 성립부터 문혁 종결에 이르는 시간적 배경을 놓고 볼 때, 바진의 경험은 해방 이후 중국지식인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그는 후펑처럼 완고하게 자신의 입장을 견지하지 않았고, 대다수 지식인들과 마찬가지로 기본적으로 정부의 노선을 따르다가 ‘문혁’때에야 타도의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문혁 이후 바진의 길은 전혀 전형적이지 않다. 이전의 방식에서 벗어나 자신의 사상과 언어를 회복하기 시작한 것이다. 문혁이 중국 지식계에 미친 타격이 형용할 수 없을 정도였음에도 불구하고 바진과 비슷한 경험을 했던 원로지식인들 가운데 80년대 사상해방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사람들은 많지 않다. 많은 이들이 여전히 보수적인 태도를 보인 이유는 그것이 언제 다시 불어 닥칠지 모를 정치풍파를 피할 수 있는 안전하고 현명한 선택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있어 문혁의 종결은 지식인이 정부의 조종에서 벗어나 자신의 길을 선택하는 것을 의미하진 않았다.
바진이 이런 보수적인 원로지식인의 입장에서 분리되어 나와 사상해방과 자기 참회의 길을 가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자유와 평등’이 실현될 세상을 꿈꾸던 아나키스트 바진에게 중국 공산혁명의 성공은 애당초 희소식이 아니었다. 소비에트 러시아 정부가 아나키스트들을 어떻게 핍박했는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1918년-1921년에 걸친 러시아 내전에서 아나키스트들은 볼셰비키정권에 협조하여 백군과의 전투에 동참하나, 내전종결 후 볼셰비키의 정치적 탄압에 부딪친다. 우크라이나의 아나키스트였던 마흐노의 부관들은 사살되었고, 마흐노 자신은 루마니아, 폴란드 등지를 거쳐 파리에 망명하여 불행한 말년을 보냈다. 소련비밀정보기관 체카는 전국적으로 아나키스트 조직을 공격하여 대부분의 지도자들을 투옥시켰다. 레닌에게 이러한 정치적 탄압의 부당성을 지적했던 저명한 아나키즘 이론가인 크로포트킨은 개인적 박해를 받진 않았으나, 여생을 시골의 허름한 가옥에서 보내야 했다. 1921년 크론슈타드 항쟁이후 정치탄압은 더욱 노골화되었고, 이에 대한 국내외 아나키스트의 반발이 심해지자 레닌은 해외망명을 조건으로 아나키스트 수감자들을 석방하게 된다. 이렇듯 러시아 아나키스트들은 무산계급혁명기간 중의 희생, 볼셰비키에 의한 배반, 망명 등의 과정을 거치며 점차 몰락해갔다. 공산당과 아나키즘과의 불화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바진이 공산화된 조국을 떠나지 않은 것은, 아나키즘과 유사한 면이 있는 공산주의 체제 속에 남는 것이 국민당 통치 하의 타이완이나 다른 자본주의 국가로 떠나는 것보다 나으리라는 실낱같은 희망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나키즘적 이상을 견지할 수도, 독립적 사고에 근거한 창작활동을 전개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바진에게 남아있는 선택은 공산당의 영도에 따르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수십 년간 그 영도를 충실히 따른 결과 직면한 것은, 인민들의 기본적인 생활권도 보장되지 않고 지식인의 사회적 양심도 제대로 발휘될 수 없는 비참한 현실이었다. 『수상록』은 역사적 재난인 문혁을 반성하고 지식인의 형상을 회복하기 위해 바진이 선택한 문학적 도구이자 실천이라 할 수 있다.
아내 샤오산(蕭珊)의 죽음은 문혁이 바진에게 안겨준 가장 큰 고통이자 그가 개인적인 입장에서 문혁을 되돌아보게 된 이유이다. “그의 삶에 등장한 첫 번째이자 유일한 여성”이었던 샤오산은 바진이 십년의 재난을 견뎌나갈 수 있도록 끊임없이 위로하고 격려해준 사람이었다. “자신을 보전하고 가족들이 자신과 함께 지옥에 떨어지지 않게 하려고” 줴신(覺新)처럼 자기의 신념과 행복을 포기한 바진에게 그녀의 죽음은 견디기 힘든 충격으로 남게 된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조차 지킬 수 없었던 비극적 경험과 그로 인한 마음의 상처는 문혁에 대한 반성 속에 깊이 자리 잡고 있다.

유서로서의 『수상록』
문혁에 대한 반성 외에 『수상록』의 또 다른 출발점은 ‘죽음’에 대한 준비이다. 일흔을 훌쩍 넘긴 노인이 되어 다시 펜을 잡게 된 바진은 『수상록』 집필 초기부터 나이를 의식하고 남아있는 시간을 낭비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반복한다. 외부적인 요인으로 긴 시간을 허비하고 난 후 그는 자신이 인생의 마지막 단계에 이르렀음을 발견한다. 이 발견은 바진으로 하여금 두 가지 생각을 품게 한다. 하나는 스스로의 인생을 총결 지을만한 작품을 써야겠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생명이 다하기 전에 내면의 진실된 생각을 양껏 표현하겠다는 것이다. 바진이 말한 5년 계획은 바로 지나온 인생을 회고하고 총결하는 것이다. 『수상록』에서 작가는 ‘총결’이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하는데 이는 자연스레 죽음을 연상시킨다.

더욱 중요한 것은 ‘십년 재난’을 총결하는 것이다. …… 계속 『수상록』을 써서 우리 세대 작가가 후세인들에게 남기는 ‘유언’으로 삼을 것이다. (『탐색집』 후기)
오로지 과거 십년의 고난에 찬 삶에 총결을 지어야만, 심령의 빚을 다 갚는 것이다. (36. 강아지 포티)
나는 ‘수상’ 가운데 항상 빚을 졌다고 언급했다. 왜냐하면 이 다섯 권의 『수상록』을 내 일생의 총결산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무제집』 후기)

실제로 노작가는 자신이 죽음에 가까워졌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언급한다.

내가 죽음에 가까워지기 시작했음을 느낀다. 독자들에게 진실을 말하고 싶다. (『수상록』 제1집 후기)
넌 죽음을 향해 가고 있어. 그럼 어떻게 할 건가? (35. 거울)
나는 봄누에다. 뽕잎을 먹고 명주실을 토해낸다. 비록 가마솥에 던져져 삶아지더라도 토해 놓은 실은 죽어서도 끊이지 않을 것이니 세상에 조금이나마 따스함을 전하기 위함이다. (42. 봄누에)
나는 죽음을 향해 가고 있다. 그래서 십년의 재난은 내 눈 앞에서 이미 모든 잔혹함과 공포의 힘을 잃어버렸다. …… (죽음을 향한) 나의 걸음걸이가 늦어 중도에서 배회할 수도 있고, 심지어 사신과 경주를 하겠노라고 오만하게 말하기도 한다. (56. “두려울 것이 없다”)
78세의 노인인 나는 내 앞에 ‘죽음’이 서있음을 알고 있다. (74. 『회념집』 서문)

이처럼 자신과 죽음의 거리가 멀지 않음을 강조하는 데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스스로를 부단히 각성시켜 창작에 매진하도록 하는 것이다.

성실하게 집에 들어앉아 글을 쓰고 또 쓰는 것이 그나마 낫다. 이것이 내가 자신에게 내린 결론이다. (35. 거울)

창작의 권리를 빼앗겼던 십년의 시간이 흐른 후 바진은 글쓰기를 통해서만 그의 가장 소중한 사상을 표현해낼 수 있으며 사람들에게 자기의 가치를 증명할 수 있음을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시간을 낭비하지 않도록 순간순간 자신을 각성시키고 눈앞의 기회를 최대한 이용하여 후대에 가치 있는 작품을 남기고자 한 것이다.


이 포스팅은 쿠팡 파트너스 활동의 일환으로,
이에 따른 일정액의 수수료를 제공받습니다.
도서 DB 제공 : 알라딘 서점(www.aladin.co.kr)
최근 본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