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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와 감성

신자유주의와 감성

정명중 (지은이)
  |  
전남대학교출판부
2018-06-15
  |  
12,000원

일반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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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와 감성

책 정보

· 제목 : 신자유주의와 감성 
· 분류 : 국내도서 > 대학교재/전문서적 > 사회과학계열 > 정치외교학 > 정치학일반
· ISBN : 9788968495090
· 쪽수 : 296쪽

책 소개

신자유주의(Neoliberalism) 체제가 오늘날 생활세계에 남겨 놓은 심각한 감정적 폐해와 상흔을 다루고 있다. 총력전과 흡사한 무한경쟁의 이념을 앞세운 신자유주의 체제는 유동성과 유연성 그리고 혁신과 계발의 미덕을 우리들에게 집요하리만치 다그쳤다.

목차

책머리에 / 005
치유를 말하기 이전에 / 011
불안은 영혼을 잠식하고 / 055
괴물의 탄생 / 092
증오를 넘어 분노로 / 130
루저는 자기서사를 구성할 수 있는가 / 175
부끄러움의 지층들 / 205
감성공동체를 위하여 / 229

참고문헌 / 280
찾아보기 / 287

저자소개

정명중 (지은이)    정보 더보기
광주에서 나고 자랐다. 전남대 국어국문학과 및 동대학원을 졸업했다(문학박사). 현재 전남대 호남학연구원 및 호남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논문으로 「인식되지 못한 자들, 혹은 유령들 : 5월 소설 속의 ‘룸펜’」, 「괴물의 탄생 : 신자유주의, 유연성 그리고 ‘지존파’」, 「신자유주의와 자기서사」, 「역사를 뚫고 솟아난 귀수성의 세계 : 신동엽의 ‘금강’ 읽기」, 「국가폭력과 증오체제」 등이 있다. 저서로 『신자유주의와 감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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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치유를 말하기 이전에

유행의 이면

우리들 중 상당수는 불안과 우울, 고독과 아픔의 나날을 살고 있는 게 틀림없다. 빈번히 회자되는 치유(또는 치료)라는 낱말이 주는 울림이 예사롭지 않은 이유이다. 그러한 울림에 대한 나름의 실천적 응답이리라. 인문학 내에서도 치유의 문제를 화두로 삼아온 지 꽤 오래다.
치료하여 병을 낫게 함. 이것이 치유의 뜻이다. 그러나 치유란 우선 특정한 병을 전제해야만 성립되는 개념이다. 따라서 치유라는 말 그 자체가 주는 긍정적 뉘앙스에도 불구하고 이 말이 유행한다는 것은 우리의 삶이 심각하게 병들어 있음을 오히려 반증하는 것이다.
하여간 어떤 낱말의 유행이 그것의 실질을 결핍하는 경우가 있다. 예컨대 우리 사회가 행복한 사회라면 행복학과 같은 유사학문이 회자될 리 없다. 말하자면 어떤 것의 유행은 곧 그것의 결핍이다. 치유라는 말이 유행하는 이면에 무엇인가 치유돼야 하지만 근본적으로 그렇게 되지 못하는 정황 같은 것이 가로 놓여있는 것이다.
각설하고, 지금껏 근대(혹은 서구) 의학 또는 정신의학이 인간의 신체와 정신에 대한 독점적 지배권을 행사해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러한 독점 현상을 반성하고 비판하고 있다는 점에서 각종 인문학적 치유 프로그램의 등장은 일단 고무적이다. 건강한 삶을 살기 위해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선택지가 그만큼 더 넓어졌다는 뜻이다.
그러나 유감스러운 것은 치유에 대한 세간의 비상한 관심에 무엇인가 빠져있다는 점이다. 미리 말하자면 오늘날 치유담론에는 그 진정한 의미의 ‘사회’에 대한 성찰이 결여돼 있다.
한편 오래전부터 인문학의 위기가 회자됐고, 그 타개책으로 인문학의 외연 확장이 지속적으로 논의돼 왔다. 그러나 위기의 타개나 외연의 확장 차원에서 인문학이 치유의 문제를 끌어들이는 것이 비단 근대적 의학 또는 정신의학에 대한 대안적 기능에 그 소임을 한정하는 것이 돼서는 안 될 것이다.
물론 여기서 현재 진행형인 다양한 인문학적 치유담론의 이념적 맥락이나 방법론을 모조리 분석하고 검토할 수는 없다. 더군다나 여러 문헌들을 조사한 결과 이 문제와 관련하여 인문학 안에서 그간 제시되었던 이론적 스펙트럼이 넓고 실천적 성과도 상당해 보인다.
따라서 인문학 내에서 의욕적으로 실험되고 있는 다양한 치유 프로그램들에 대해 그야말로 각론 차원에서 메스를 들이대는 것은 엄두도 낼 수 없는 일이다. 다만 치유의 문제가 근본적으로 어디에서 출발해야하고, 또 궁극적으로 어디로 향해야 하는가에 대해 약간의 제언을 하고자 한다.

병病이라는 형이상학
오늘날 치유담론들은 매우 다양하다. 그러나 이 담론들이 대체적으로 근대의학의 사각지대에 관심을 기울인다는 점에서 일치점이 있다. 이를테면 기존의 의학은 신체의 병에만 집중한 나머지 인간의 건강한 삶을 온전히 담보해내지 못했고, 대신 마음의 병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식의 주장이 퍽 일반화 돼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향을 대상화된 신체 또는 사물(객체)로서의 인간에 대한 보이콧으로 이해해도 좋다. 아니면 신체와 마음의 조화를 내세우는 일종의 전일주의holism라 해도 상관없다. 이러한 점들에 비춰볼 때 오늘날의 치유담론들이 대체로 근대적 삶이 낳은 모순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것이라고 선의로 해석해볼 여지도 분명 있다.
그러나 그러한 문제의식 안에 신체의 그것이건 마음의 그것이건 병(혹은 병이라는 관념) 그 자체에 대한 급진적인 물음이 전제되어 있는가, 하는 점은 의문이다. 오늘날 치유담론들은 병에 대한 근대적 관념을 실천적으로 극복하고 있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면 즉 병이라는 이 근대적 관념을 의심하지 않는 한 우리는 근대의학 패러다임을 넘지 못할 것이다.
근대의학은 이른바 병원체설로부터 시작했다. 병원체설은 달리 병의 특이 원인론이라고도 한다. 이는 각각의 질병은 명확한 원인을 가지고 있고 그 원인이 되는 작용 인자를 공격하거나 혹은 신체의 병든 부위에 치료를 집중시킴으로써 그것을 박멸할 수 있다는 관념이다.
문제는 이러한 관념이 ‘전체로서의 환자’ 또는 ‘환자의 환경 전체’를 중시했던 고대의 히포크라테스적 의학 전통을 완전히 붕괴시켰다는 점이다. 한편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은 병원체설에 뿌리를 둔 근대의 질병 관념이 형이상학적 이데올로기에 불과함을 다음처럼 지적한 바 있다.

즉 결핵균은 결핵의 <원인>이 아니다. 거의 모든 인간이 결핵균이나 그 밖의 미생물 병원체에 감염된다. 우리는 미생물과 함께 살아가고 있으며, 그것이 없으면 소화도 되지 않고 살아갈 수도 없다. 몸속 병원체가 있는 것과 발병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일이다. 16세기에서 19세기에 걸쳐 서양에서 결핵이 만연한 것이 꼭 결핵균 탓도 아니고 그것이 감소한 것이 꼭 의학의 발달 덕분이라고만은 할 수 없다. 그러면 무엇이 궁극적인 원인인가 하고 물어서는 안 된다. 원래 하나의 원인을 확정 지으려는 사상이야말로 신학ㆍ형이상학적인 것이다.
뒤보스의 말처럼 <인간과 미생물의 투쟁>이라는 이미지는 정말 신학적인 것이다. 세균이라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산재되어 있는 <악>인 것이다.(…)
코흐는 결핵균을 발견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이 결핵의 원인이라는 것은 프로파간다이다.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이 학설을 쉽게 받아들인 것은 그것이 신학적 이데올로기였기 때문이다.

우선 위의 인용에서 몸속에 병원체가 있다는 사실과 병이 발병하는 사태는 완전히 다른 일이라는 진술에 주목해보자. 예컨대 푸코M. Foucault는 “질병이 자리 잡은 신체corps de la maladie와 병든 사람의 신체corps de l'homme malade가 완전히 일치하는 경우”는 우연적인 사태에 지나지 않다고 했다. 게다가 그것의 완전한 일치란 하나의 가상 또는 허구fiction일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우리가 어떤 눈으로 질병을 바라보는가”에 따라 그 사태는 전혀 다르게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일개 학설에 불과한 병원체설이 우연적인 사태를 마치 필연적인 것인 듯이 간주하고, 이어 병에 대한 다른 시선(관점)들을 모조리 배제(억압)한 채 하나의 시선만을 특권화 한다는 점에서 그것은 프로파간다 이상이 아니다.
그러나 그러한 프로파간다가 여전히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이유는 일정한 사태를 앞에 두고 하나의 원인(실체)을 찾거나 확정지으려는 신학적 이데올로기 때문이다. 이 이데올로기에 대해 니체F. W. Nietzsche는 이미 ‘번개와 섬광의 분리’라는 비유를 통해 다음처럼 비판했다.

(…) 그것은 마치 사람들이 번개를 섬광에서 분리하여 후자를 번개라 불리는 어떤 주체의 활동이며 작용이라고 가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민중의 도덕도 마치 강자의 배후에는 강한 것을 나타내거나 나타내지 않는 것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일종의 중립적인 기체가 있는 것처럼, 강한 것을 강한 것을 표현하는 것과 분리한다. 그러나 그러한 기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활동, 작용, 생성 뒤에는 어떤 ‘존재’도 없다. ‘활동하는 자’는 활동에 덧붙여 단순히 상상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 활동이 모든 것이다. 사람들은 번개가 번쩍일 때, 실제로는 활동을 중복시킨다. 이것이 활동의 활동이다 : 같은 사건을 한 번은 원이라고 보고 다른 한 번은 결과라고 보는 것이다. 자연과학자들이 “힘이 움직이게 한다. 힘이 무엇을 일으키는 원인이다.”라고 하며 그와 같은 것을 말했지만, 사태를 좀 더 잘 만든 것은 아니다. - 우리의 과학 전체는 그 모든 냉정함, 감정에서 해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언어의 유혹에 사로잡혀 있으며, ‘주체’라는 뒤바뀐 기형아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다. (예를 들어 원자란 그러한 기형아이며, 칸트의 ‘물자체’도 또한 같은 것이다.)(강조-원문)

요컨대 하나의 동일한 사건을 쪼개서 한쪽을 원인으로 다른 한쪽을 결과로 보는 일은 작위적이며 언어적 환상이다. 즉 어떤 사태와 사건의 배후에 있는 것으로서, 게다가 중립적이기까지 한 어떤 실체로서 주체를 상정하는 일은 형이상학적 허구이다.
우리는 병과 싸운다, 라는 말을 즐겨 사용한다. 그러나 이는 “병이 마치 작용하는 주체로 존재하는 것처럼 간주하는 말투”일 뿐이다. 물론 ‘병을 고친다’라는 표현 역시 “고치는 주체(의사)를 실체화”한다는 점에서 이미 신학적이다.
예컨대 정과리가 『의학과 문학』에서 “의학이 인간의 육체에 침범한 병maladie을 퇴치하는 데서 시작되었다면 문학 역시 인간의 정신을 침범한 악mal을 몰아내는 데서 시작되었”다라는 식으로 말한다. 문학과 의학의 기원이 그 기능에서 동일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본 취지와 상관없이 그러한 주장 역시 이미 형이상학적이고 신학적일 뿐이다.
이때 병maladie과 악mal의 어원적 유사성은 문제가 아니다. ‘병’이 ‘악’으로 치환되고, 혹은 ‘병’이 어떤 실체나 ‘주체’로 변환되는 형이상학적 토대가 문제인 것이다. 게다가 그러한 토대를 근대의학뿐만 아니라 근대적 사유 패러다임 전체가 공유하고 있다는 점이 더 심각하다.

통곡의 골짜기
오늘날 치유담론들이 저와 같은 이데올로기에 대해 근본적인 물음을 접고 인간의 정신적 병리나 고통의 문제를 실체화된 개인 또는 자기self 차원으로 환원해버리는 식의 일을 계속하는 한, 인간과 사회의 병리를 치유하겠다는 포부는 실현불가능한 일이 될 것이다.
게다가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최소 단위(실체)로서의 개인이라는 관념이 과연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인지도 의심스럽다. 우리는 자유로운 개인이라는 말을 일상적으로 사용한다. 한데 그러한 개인을 실재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정당한가. 더군다나 우리가 ‘자유로운’이라는 술어를 사용할 때, 그것이 무엇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인지에 대한 철학적 성찰도 충분히 진전된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에 대한 논의는 일단 접어두자. 강조하고 싶은 것은 우리가 치유의 문제를 사유하기 위해서는 소위 환자 개인이 아니라 개인을 떠받치고 있는 환경 전체 또는 시스템에 대한 발본적인 문제제기가 전제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예컨대 우리 앞에 소위 문제아 또는 불량학생이라 불리는 한 청소년이 있다. 물론 학교 공부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학교를 빠지는 일도 다반사이고 하루가 멀다 하고 갖은 비행(?)을 일삼는 그야말로 사고뭉치이다. 어떤 교정 노력도 소용없다. 교사도 부모도 포기했다.
우리는 이 학생을 도대체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물론 이 학생에 대해 다양한 진단을 내릴 수 있다. 예컨대 그 학생이 지닌 성격장애, 정서불안, 만성적 분노, 자존감 결핍 따위를 읽어낼 수 있다. 아니면 삐뚤어진 심리의 기원을 그 학생 개인의 차원에서 아니라 가족관계망(이를테면 오이디푸스 삼각형이나 그 변이형들) 안에서 찾아낼 수도 있다.
이러한 진단과 해석은 물론 의미 있다. 게다가 그에 따라 적절히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그 학생이 정상적(?)으로 학교생활에 적응할 수 있도록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은 기본적으로 환경 전체나 시스템에 대한 시선이 결여돼 있다. 이와 관련해서 베이트슨G. Bateson의 다음 언급은 주목할 만하다.

(…) 영국의 공립학교 교육이 떠맡지 못하는 소년은, 비록 소년의 비정상이 본래 ‘뜻밖의’ 외상적 사고에 기인하는 것이라 해도, 공립학교 체계에 반응하고 있다. 소년이 익힌 행동 습관은 학교가 주입시키는 규범을 따르지 않겠지만, 그 행동 습관은 바로 규범에 대한 반응에서 얻어진 것이다. 소년은 정상적인 것과 정반대되는 패턴들을 익힐 수도 있지만(종종 그렇게 된다), 결코 무관한 패턴들을 익힐 수는 없다. 그는 ‘불량한’ 영국 학생이 될 수도 있고, 미친 사람이 될 수도 있지만, 그의 비정상적인 성격들은 여전히 그가 저항하는 규범들과 체계적으로 관계될 것이다. (…) 마찬가지로 그 소년이 전형적인 공립학교의 특성과 체계적으로 관계되어 있다고 말함으로써 그의 성격을 묘사할 수도 있다. 그의 특성은 그가 살고 있는 사회 속에서 관계의 모티브와 패턴에 적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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