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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대학교재/전문서적 > 인문계열 > 철학
· ISBN : 9788968498923
· 쪽수 : 808쪽
· 출판일 : 2022-06-20
책 소개
목차
머리말 / 04
1904 이전
기노사의 「외필」을 읽고 讀奇蘆沙猥筆 / 14
기노사의 「외필」을 읽고 讀奇蘆沙猥筆 / 37
「외필문목」의 변론 駁猥筆問目辨 / 49
세 사람의 태극설을 변론함 三家太極說辨 / 87
1904-1941
외필후변 猥筆後辨 / 96
윤운서에게 답함 答尹雲瑞 / 124
전자명에게 답함 答田子明 / 132
전우가 쓴 「외필변」를 변론함 辨田愚所著蘆沙先生猥筆辨 / 138
외필변변 猥筆辨辨 / 169
「외필변」 소차 猥筆辨小箚 / 242
『주자어류』 반시거의 기록을 읽고 讀語類時擧錄 / 262
노화이동변 蘆華異同辨 / 267
노한이동변 蘆寒異同辨 / 270
심석 송선생-병순-에게 올림 上心石宋先生 秉珣 / 274
간재 전선생에게 올림 上艮齋田先生 / 277
외필기의 猥筆記疑 / 280
기노사의 「외필」 및 「납량사의」 변론 奇蘆沙猥筆納凉私議辨 / 290
전장령-우-에게 보냄 與田掌令 愚 / 329
외필변 猥筆辨 / 332
주리주기문 主理主氣問 / 352
동지정지문답 動之靜之問答 / 355
이성원에게 보냄 與李聲遠 / 360
「외필변」을 읽고 讀猥筆辨 / 362
만록 漫錄 / 367
권순경에게 보냄 與權舜卿 / 372
「외필」을 묻고 설명함 猥筆相質說 / 376
『정백헌집』의 「외필변변」을 보고 觀鄭柏軒集猥筆辨辨 / 387
정씨의 「외필변변」에 쓰다 題鄭氏猥筆辨辨 / 397
노사의 「신도비」를 보고 觀蘆沙神道碑 / 403
권자정에게 답함 答權子貞 / 412
술외 述猥 / 415
「외필후변」을 읽고 讀猥筆後辨 / 426
김준영에게 보냄 與金駿榮 / 430
노화동이고 蘆華同異攷 / 435
간재선생에게 올림 上艮齋先生 / 467
기노사의 「외필」 뒤에 쓰다 書奇蘆沙猥筆後 / 470
외필론 猥筆論 / 473
「외필변변」을 변론함 辨猥筆辨辨 / 483
후변 後辨 / 513
사의 私議 / 518
이기조변 理氣條辨 / 526
기노사외필설 奇蘆沙猥筆說 / 542
「외필」을 변론하는 8조목 辨猥筆八條 / 551
신전(薪田) 늙은이가 가르침을 청함 薪叟求敎 / 565
노사외필변 蘆沙猥筆辨 / 570
기노사외필변 奇蘆沙猥筆 / 573
잡저 雜著 / 596
권사인에게 답함 答權士仁 / 605
어떤 이의 질문에 답함 1 答人問 一 / 614
어떤 이의 질문에 답함 2 答人問 二 / 620
문자성-형-에게 답함 答文子惺 炯 / 623
「외필후변」의 변론 猥筆後辨辨 / 631
「외필후변」을 변론함 辨猥筆後辨 / 678
「외필변」을 변론함 辨猥筆辨 / 736
전간재의 「『정백헌집』의 「외필변변」을 보고」를 변론함 辨田艮齋觀鄭柏軒集猥筆辨辨 / 782
정회부에게 보냄 與鄭晦夫 / 801
찾아보기 / 805
저자소개
책속에서
1904 이전
기노사의 「외필」을 읽고
한유
이 글은 한유(韓愉, 1858~1911)가 기정진의 「외필」을 읽고 비판적 감상을 서술한 것이다. 같은 제목에 논지도 비슷한 글이 하우식(河祐植, 1875~1943)에게도 있다. 이들은 「외필문목(猥筆問目)」이라고 불리는 문헌을 토대로 토론을 거쳐 각각 같은 제목의 글을 저술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점에서 한유와 하우식의 글은 기우승(奇宇承, 1858~1907)의 「「외필문목」의 변론[駁猥筆問目辨]」과 대조해서 독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 「외필문목」의 흔적이 기우승의 글과 하우식의 글에서 발견되고, 하우식과 한유의 글은 형식과 내용이 거의 유사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외필문목」이라는 단일한 문헌을 토대로 한유, 하우식, 기우승의 글이 나타났을 확률이 높다는 것을 암시한다. 『우산집』 권8에는 1901년 한유가 정재규의 문인인 권재규(權載奎, 1870~1952)에게 보내는 「권운오에게 보냄[與權君五]」이 실려 있는데, 그 내용은 이 글에서 주장하는 내용을 거의 그대로 축약한 것이다. 따라서 이 시점에서 이 글의 실질적 내용이 완성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또한 본문에서 노사의 ‘자손과 문인들이 아버지이자 스승이 스스로 그 잘못을 알고 있던 것을 문집에 넣어 간행하려고 한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에 기초하면, 1901년 하반기에서 늦어도 1902년 4월 이전에 써진 것임을 알 수 있다. 모두 6조목으로 이루어져 있고, 먼저 이이와 「외필」의 진술을 인용한 다음 ‘금안(今按)’ 이하의 내용에서 「외필」의 내용을 비판하고 있다. 「외필」을 “후대의 모든 리를 등지고 기에만 일임하는 주장을 모두 (율곡)선생에게 뿌리를 두고 있다”라고 주장하는 글이라고 단정하고 있다. 『우산집(愚山集)』 권16에 실려 있다.
1.
율곡선생이 우계(牛溪: 成渾, 1535~1598)에게 답하는 편지에서 말했다. : ‘기가 발현하면 리가 탄다[氣發而理乘]’라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음이 고요하고 양이 움직이는 것은 기기(氣機)가 스스로 그런 것이지 (그렇게) 시키는 것이 있지 않습니다. 음이 고요하고 양이 움직이는 소이(所以)는 리입니다.
[외필] ‘양이 움직이고 음이 고요하다’라는 것을 그 실상을 깊이 탐구해 보면 한결같이 천명이 그렇게 시킨 것이다. 이제 ‘그 기틀이 스스로 그러하다[其機自爾]’라고 말할 때, ‘스스로 그렇다[自爾]’라는 것에 강요한다는 뜻이 없음을 말하니, 이미 자기에게서 말미암는 것이지 다른데서 말미암지 않는다는 뜻을 내포한다. 또한 ‘시키는 것이 있지 않다[非有使之者]’라고 거듭 말하였으므로 ‘스스로 그러하다’라고 말할 때는 말이 오히려 허황되었으나, ‘시키는 것이 있지 않다’라고 해서 그 말뜻이 명확해졌다. 그러나 이 두 구절만은 내 옅은 식견으로 이해할 수가 없다. ‘시키는 것이 있지 않다’라는 한 구절 속에서 천명이 이미 멈춰버렸다. 천명은 모든 일의 본령이니, 이제 저절로 가고 저절로 멈추면서 천명에서 말미암지 않는다면 천명의 밖에 또 하나의 본령이 있게 된다. 두 개의 본령이 각자 중심이 된다면 조화(造化)에는 이러한 일이 없을 뿐만이 아니다. 그런데 그것을 이어서 ‘소이연은 리이다’라고 한다면 소이연의 위에 덧붙이는 격이니, 다시 무슨 소이연이 있다는 것인가? 어찌 헛된 이름만 있고 실제의 사실은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내 생각에는 ‘자이(自爾)’ 두 글자와 ‘소이연(所以然)’ 세 글자는 서로 적대적인 것 같다. 이제 두 가지를 다 보존해두고서 함께 사용하려고 한다면 그 모양이란 위연(魏延)과 양의(楊儀)가 함께 승상부에 있는 것과 매우 유사하니, 어찌 끝내 모순됨을 피할 수 있겠는가?
한유 : 율곡선생의 이 한 문단은 이기의 불리부잡(不離不雜)을 밝히려는 것이다. 그래서 이 편지의 첫머리에서 곧장 ‘불리부잡’으로 말했으니, 이 몇 조목도 불리부잡의 오묘함을 지적하는 것이 더욱 분명하고 직절하다. 내 생각에 ‘시킨다[使]’라는 말은 이 사람이 저 사람을 시킨다는 명칭이요,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시킨다는 말이다. 한 사람은 저기요 한 사람은 여기이니 동쪽과 서쪽의 형상이 되고, 한 사람은 위요 한 사람은 아래이니 계급이 이미 드러났다. 리와 기 사이에 이 한 글자를 쓰게 되면 리와 기는 처음부터 서로 떨어지게 된다. 그들이 서로 떨어지지 않기를 바랐기에 (율곡은) ‘시키는 것이 있지 않다[非有使]’라고 한 것이요, 그들이 서로 뒤섞이지 않기를 바랐기에 ‘그러한 까닭[所以然]’이라고 했다. 앞뒤의 몇 구절이 원활하게 문장을 이루어서 시키지 않는 가운데 그 지극한 시킴[至使]을 볼 수 있고, 지극한 시킴 가운데 정말로 그렇게 시키는 것이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옛 성현들이 이 기는 리가 시키는 것인 줄을 분명히 알았기에 “하늘이 충(衷)을 내려 주었다”라고 했고, “사람은 천지의 중(中)을 받았다”라고 했으며, “하늘이 뭇 백성을 낳았다”라고 했으며, “부여하지 않은 것이 없다”라고 했으니, 이것이 ‘그렇게 시킨다[使之]’라는 말이다. 이 기가 이 리에서 떨어지지 않은 것을 분명히 알았기에 또 말하기를 ‘정말로 내려주는 이・받는 이・낳는 이・주는 이가 있지 않다’라고 했으니―‘또 말하기를[又曰]’ 이하는 주자의 설명이다.― 이것이 ‘그렇게 시키는 것이 있지 않다’라는 말이다. ‘내려주었다・받았다・낳았다・주었다’라는 것은 (율곡)선생이 말하는 ‘소이연’이다. 내려주지 않고, 받지 않고, 낳지 않고, 주지 않는 것은 선생이 ‘그렇게 시키는 것이 있지 않다’라고 말한 것이다. 이미 소이연을 알았다면 리가 기의 주인이 되고, 기는 리의 종이라는 것이 이미 명백하다. 또한 ‘그렇게 시키는 것이 있지 않다’라는 것을 알았다면 리는 기와 떨어지지 않고, 기는 리와 떨어지지 않다는 것 또한 분명하다. 그러나 이것은 선생의 말이 아니요, 정선생(程先生)도 본래 이미 말했던 것이다.―정자(程子)는 말했다. “한 번 움직이고 한 번 고요하다’라는 것은 시키는 것이 있지 않으니, 기틀이 스스로 그러할 뿐이다.”― 주선생(朱先生)은 『중용혹문』・『맹자집주』에서 또한 상세히 드러냈고 ―『중용혹문』에서는 말했다. “(왕안석이) ‘하늘이 나에게 이것을 가지도록 했다’라고 한 것은 ‘상제가 충을 내려주었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을 뿐이다. 어떻게 정말로 그렇게 시키는 것이 있다고 여기겠는가?” 『맹자집주』에서는 말했다. “‘하늘이 시켰다’라고 한 것은 천리의 당연함이 마치 시키는 것과 같다는 뜻이다.”― 선생은 특별히 겉에 드러내었을 뿐이다. ‘스스로 그렇다’라는 말도 그 기틀이 저절로 주재가 되어 운행하고 멈춘다는 말이 아니다. 사람의 힘이 간섭하지 않아도 저절로 유행한다는 말일 뿐이다. 이 때문에 거듭 풀이해서 ‘그렇게 시키는 것이 있지 않다’라는 한 마디를 한 것일 뿐이다.
주자 이후로 우리나라 유학자로서 이 학문을 익힌 이들은 이기(理氣)를 말하면서 서로 떨어트리지 않으면 반드시 뒤섞어버렸다. 이런 까닭에 이기를 일물(一物)로 보는 이가 있었고, 이기를 이물(二物)로 보는 이가 있었다. 이것은 주선생의 타당한 법문과 대의에 이미 어긋난 것이다. (율곡)선생이 일생 동안 강론한 것은 ‘불리부잡’ 네 글자에 불과하니, ‘스스로 그렇다’라고 하고 ‘그렇게 시키는 것이 있지 않다’라고 말한 것에서 이기가 둘이 아니라 실제로 하나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주자 이후로 이기를 정확하게 파악한 것은 오직 선생뿐이다. 선생의 말이 극히 분명하고 절실하다는 것은 이 몇 마디 말이면 충분하다. 이제 ‘자이(自爾)’ 두 글자를 ‘스스로 운행하고 스스로 멈춘다’라는 뜻으로 만들어 ‘소이연’ 세 글자와 대적한다고 간주하며, 곧바로 두 가지 본령이라고 배척한다면, 이것은 선생의 뜻을 제대로 알지 못한 것이다. 또한 ‘그렇게 시키는 것이 있지 않다’라는 한 마디 때문에 천명이 이미 그쳐버렸다고 배척한다면, 이것은 이기의 오묘한 관계를 제대로 깨닫지 못한 것이다. 또한 음양의 움직이고 고요함에 정말로 시키는 것이 있다고 여긴다면 이것은 아득한 가운데 따로 (기를) 불러대고 지휘하는 하나의 자리 없는 진인[無位眞人]이 있다는 것이다. 그 모양이 어떻기에 위연과 양의가 승상부에 함께 있는 것과 비슷하다는 것인가?
옛날 나정암(羅整菴: 羅欽順, 1465~1547)의 무리는 주자의 ‘불리부잡’이란 주장을 의심하면서 말했다. “세상의 만물은 서로 떨어지지 않는다면 틀림없이 서로 뒤섞인다. 서로 뒤섞이지 않는다면 틀림없이 서로 떨어진다. 어떻게 떨어지지도 않고 또 뒤섞이지 않는 것이 있겠는가?” 당시 육씨(陸氏)의 무리들은 모두 명언(名言)이라고 했지만, 선유는 이것을 반박하면서 말했다. “떨어지지 않는 가운데 더욱 뒤섞이지 않음을 볼 수 있고, 뒤섞이지 않는 가운데 더욱 떨어지지 않음을 볼 수 있다.” 나는 이것을 이렇게 이어받고 싶다. “그렇게 시키는 것이 있지 않은 가운데 더욱 소이연을 알 수 있고, 소이연의 가운데서 더욱 그렇게 시키는 것이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