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립본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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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나라 말엽과 명나라 초엽의 저술가이다. 자(字)는 종도(從道)로, 지금의 저장성 항저우(杭州)인 무림(武林) 사람이다. 그의 행적은 자세히 알려지지 않았다. 학식이 뛰어나고 재주가 풍부하였으나, 당시 지식인 사회에 어울리지 못하고 고독하게 저술에 몰두한 무명의 학자였다. 2종의 저술을 남겨, 1393년에는 실용적 처세의 지혜를 담은 격언을 편집하여 『명심보감』을 출간하였고, 13년 뒤인 1406년에는 향촌 사회의 생활 백과인 『치가절요(治家節要)』를 출간하였다. 그의 책은 조선에도 소개되어 『명심보감』은 1454년에 충청도 청주에서, 『치가절요』는 1431년에 경상도 밀양에서 번각본이 간행되었다. 『명심보감』은 출간 당시부터 독자에게 크게 환영받아 거듭 간행되거나 번역되었다. 16세기 말부터 라틴어와 스페인어 등으로도 번역되어 서양에도 널리 소개되었고, 현재까지 한국, 중국, 일본, 베트남 등 아시아 여러 나라에서 대중적 인기를 누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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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적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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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심보감』이 저술된 시기는 확실치 않으나 1298년 이후 20년 이내에 고려의 문신 추적(秋適)이 쓴 것으로 보인다. 한편 중국 명나라 초기의 범립본(范立本)이 1393년에 『명심보감』을 엮었다는 설이 있는데, 범립본은 추적보다 거의 90~100년이나 뒤늦은 인물이다. 대구의 『인흥제사본』을 엮은 이가 추적이라 했는데, 그 뒤에 성균관대학교의 이우성 교수가 청주판 『신간 교정대자 명심보감』을 발견하여 범립본이 편찬인이라 했다. 원본은 범립본이 편찬했고 추적이 그 원본을 새롭게 엮은 초략본을 냈다고 주장하는 이가 있지만, 추적과 범립본의 활동 연대를 고려하면 이는 앞뒤가 맞지 않다. 그러므로 『명심보감』을 편찬한 사람은 추적이고, 범립본이 그 뒤에 『명심보감』에 손을 댔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양지(陽智) 추씨의 시조인 추적(秋適)은 호가 노당(露當)이며, 고려 25대 충렬왕 초기에 과거에 급제하여 안동서기, 직사관, 좌사간 벼슬을 거쳤다. 추적이 벼슬살이를 하던 때는 충렬왕의 재위 기간(1274~1308년)으로 고려는 국정 혼란에 빠진 상태였다. 1298년 환관 황석량이 권세를 이용하여 자신의 고향인 충남 당진군 합덕부곡을 현으로 승격하려 할 때 추적이 서명을 거절한 일이 있었는데, 황석량이 이에 앙심을 품고 참소하여 추적이 순마소에 투옥되었다. 이때 호송하던 사람이 추적에게 “지름길로 가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했지만 추적은 이를 거절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무릇 죄가 있으면 해당 관청으로 가는 법이다. 왕의 처소에서 칼과 철쇄를 씌우는 일은 없으니 나는 마땅히 네거리로 지나가서 나라 사람들에게 내 모양을 보이겠다.” 간관(諫官)으로서 칼을 쓰고 가는 것이 오히려 영광이라는 의미로, 그의 대쪽 같은 성품이 드러난 일화이다.
이후 추적은 다행히 풀려나와 북계 용주의 수령을 역임했다. 충렬왕 말년에는 안향의 발탁으로 이성, 최원충 등과 함께 7품 이하의 관리나 생원 등의 유학 교육을 담당했는데, 이때 추적은 『명심보감』을 편찬하여 교재로 사용했다. 추적은 민부상서, 예문관제학에 이르러 치사(致仕)했다. 이처럼 높은 직위에까지 올랐으나 추적은 손님을 접대할 때는 쌀밥에 생선이면 충분하다고 할 만큼 검소하고 청렴했다. 이런 검소한 생활 태도는 『명심보감』의 근본정신을 이룬다. 또한 추적은 임금의 잘못을 지적하는 좌사간을 지냈을 만큼 공명정대하고 인품이 고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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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일봉 (엮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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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문과대학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문학석사과정을 수료했다. 고려대학교, 육군사관학교, 수도여자사범대학 강사를 역임하였다. 역서로는 《논어》 《맹자》 《대학 중용》《사서입문》 《채근담》 《명심보감》 《손자병법》 《소학》 《노자 도덕경》 《법구경》 《사기 열전》 《사기 본기》 《주역》 《고사성어》 《고문진보》 《산해경》 《효경》 《근사록》 《장자》 《목민심서》 《중국사상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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