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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어린이 > 문화/예술/인물 > 한국전통문화
· ISBN : 9788983894793
· 쪽수 : 203쪽
책 소개
목차
제1장. 서울(Seoul): 백제, 조선, 대한민국의 수도
·몽촌토성: 백제 도읍지의 흔적을 간직한 위례성
·석촌동 백제고분: 고구려 초기 왕릉과 비슷한 까닭
·서울을 가리키는 가장 오래된 지명은 뭘까
·사방으로 서울을 둘러싼 산 이름은 무엇
·남산에 봉수대는 왜 있을까
·궁궐 건축 재료로 소나무만 쓴 이유
·경복궁과 광화문의 의미
·한국적 자연미를 보여주는 근정전 박석
·광화문과 근정전 앞에 해치석상을 세운 까닭
·신선이 노닐 것 같은 경회루
·어찌하여 서울 남대문 편액만 세로일까
·태종이 또 다른 궁궐 창덕궁을 지은 연유
·창덕궁에 왕가를 위한 정원을 만든 이유
·공경하는 마음을 담아 지은 창경궁
·종묘, 동아시아에서 옆으로 가장 긴 건물
·풍년을 기원할 때 왕이 사직단으로 간 까닭
·종로는 왜 서울의 중심지였을까
·경운궁으로 불려야 할 덕수궁
·신들의 정원으로 불리는 조선 왕릉
제2장. 공주(公州): 백제의 두 번째 도읍지
·계룡산의 어원이 된 동물은 뭘까
·백제의 두 번째 도읍지 공주
·웅진성(공산성), 백제를 지켜낸 든든한 성
·공산성에 연지를 여러 개 만든 이유
·무령왕릉, 백제를 부흥시킨 왕의 아름다운 무덤
제3장. 부여(夫餘): 백제의 마지막 왕도
·부여, 나라 이름이기도 했던 도읍지
·부소산성, 백제의 부활을 꿈꾼 도성
·금강과 백마강그리고 낙화암
·궁남지, 바다처럼 넓은 연못
·정림사지 오층석탑에 얽힌 오해와 사연
제4장. 경주(慶州): 신라의 변함없는 도읍지
·세계 3대 도시의 하나였던 경주
·신라가 계림을 신성하게 여긴 이유
·신라가 반월성에 도성을 만든 까닭
·경주 남산, 불교 문화재로 가득한 곳
·불국사, ‘부처의 나라’라고 이름 지은 까닭
·다보탑의 의미
·석가탑, 잘못 알려진 무영탑 유래
·석굴암, 신비한 기술과 지혜를 담은 석굴
·첨성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천체 관측소
·포석정, 놀이터가 아닌 신성한 공간
·안압지의 본래 이름은 월지
·대왕암(문무대왕릉)과 감은사
·신라인은 왜 왕릉을 도시 안에 만들었을까
제5장. 김해(金海): 가야의 도읍지
·금관가야가 김해를 근거지로 삼은 까닭
·수로왕릉 그리고 물고기 무늬와 파사석탑
제6장. 전주(全州): 후백제의 도읍지
·전주: 후백제 근거지이자 전주 이씨 본향
·경기전의 의미와 전주사고의 중요성
·전주풍패지관은 뭐하던 곳일까
·풍남문 이름에 담긴 의미
·이국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전동성당
리뷰
책속에서
경운궁으로 불려야 할 덕수궁
1907년 고종은 일제의 강요에 의해 왕위를 순종에게 넘겨주고 상왕으로 물러났습니다. 이후 고종은 경운궁에 머물렀고, 순종은 즉위 후 창덕궁으로 옮겨갔습니다. 이와 더불어 경운궁 이름은 덕수궁(德壽宮)으로 바뀌었습니다.‘덕수’란‘덕을 누리며 오래 살라’라는 뜻이지만, 한편으로는 다른 뜻을 갖고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①‘왕위에서물러난 임금’을 뜻합니다.
②‘덕으로 원수를 갚으라’는 뜻입니다.
③‘왕위에서 물러났음을 서운해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이래서 그렇습니다.
덕수궁 자리는 원래 월산대군(세조의 큰손자)의 집이었습니다. 7년 전쟁(임진왜란) 때 궁궐이 불에 타버리는 바람에 왕이 머물 곳이 없자 그곳을 빌려 고쳐 지어서 궁궐로 삼았습니다. 광해군 때부터 경운궁(慶運宮)으로 불렸으며 어느 정도 궁궐로서의 면모를 갖췄습니다.
고종은 1897년 10월 12일 경운궁 즉조당에서 조선을 대한제국으로 공표하였으며 그 자신은 황제로 등극하였습니다. 고종은 군사강국의 침탈에 대응하고자 경운궁에 신식군대가 머물 수 있는 병영을 설치하는 한편 여러 건물들을 더 세우면서 황제국가로서의 격을 갖추려 했습니다. 이리하여 경운궁은 인왕산 산자락인 사직동에서부터 현재의 서울시청 가까이까지 넓은 규모를 자랑했습니다.
“불이야, 불이야!”
불행하게도 1904년 경운궁에 큰불이 일어나 많은 건물을 태워버렸습니다. 급한 대로 즉조당을 비롯해 몇 개 전각을 복구했지만 그 무렵 나라 재정이 좋지 않았기에 공사 진행이 더디었습니다.
그렇지만 고종은 경운궁을 통해 당당한 독립국임을 나타내려 노력했습니다. 1900년에 지은 정관헌(靜觀軒)에서 그 의지를 엿볼 수 있으니, 정관헌은 서양문물을 받아들인 최초의 상징적 건물입니다. 정관헌은 서양 건축 양식에 우리나라 목조 건축 요소를 섞은 독특한 모습으로 기둥 위에는 용·박쥐·꽃병 등 한국 전통 무늬가 장식되어 있습니다. 고종은 정관헌에서 커피를 마시거나 외교사절을 접대했습니다.
고종의 편전(임금이 평소에 머무는 궁전) 및 침전(임금의 침실이 있는 곳)을 서양식 건물로 세운 이유도 근대국가 과시와 관련 있습니다. 나무로 지은 조선 궁궐과 달리 돌로 지은 최초의 궁전인 석조전(石造殿)은 신고전주의 양식을 따른 건물로서 완벽한 좌우 대칭에 3층 구조로 건립됐습니다. 고종은 석조전을 통해 대한제국이 근대문명국가임을 세상에 알리고자 한 것입니다. 석조전 1층은 시종을 위한 공간, 2층은 임금이 일하는 공간, 3층은 임금이 자거나 쉬는 공간으로 이용됐습니다.
“정문 이름을 바꾸는 것이 좋겠사옵니다.”
경운궁은 복구공사 후 정문도 바뀌었습니다. 남쪽에 있던 인화문 대신에 동쪽에 있던 대안문을 새롭게 정문으로 삼은 것입니다. 이때 대안문(大安門) 이름도 대한문(大漢門)으로 고쳤습니다. 또한 고종은 태평로와 소공로를 새로 내어 경운궁 중심으로 도시구조를 고치면서 대한문 앞을 대한제국의 상징적 공간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1907년 고종은 강제로 퇴위 당했고, 일제에 의해 궁궐 이름도 덕수궁으로 바뀌었습니다. 여기서의 덕수는‘왕위에서 물러난 임금’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일제는 겉으로는 고종의 장수를 바라는 척하면서 실제로는 조선 왕실의 위엄을 깎아내리고자 궁궐 이름을 바꾼 것입니다.
한편 덕수궁은 고종이 승하한 후 1933년 공원이 되어 일반인에게 공개되었고 그 규모는 고종 때보다 훨씬 작아졌습니다.
☞정답 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