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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ISBN : 9788989571810
· 쪽수 : 352쪽
책 소개
목차
서문·6
등장인물 소개·8
프롤로그: 옥수동의 무법자 김만석·13
제1화: 돌멩이 하나의 인연·21
제2화: 오토바이, 리어카, 그리고 커피·43
제3화: 우연과 필연 사이·57
제4화: 로맨스그레이·85
제5화: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서·123
제6화: 생애 첫 연애편지·139
제7화: 내 이름은 송이뿐·164
제8화: 모든 로맨스소설은 해피엔딩으로 끝난다·171
제9화: 그대를 사랑합니다·180
제10화: 사랑은 부끄러운 게 아니다·199
제11화: 또 다른 사랑의 가족·219
제12화: 소풍가는 날·226
제13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름, 가족·256
제14화: 함께라서 아름다운 동행·287
제15화: 수라리재 가는 길·317
제16화: 사랑하는 사람들은 행복하다·339
에필로그: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351
책속에서
“어이, 거기! 대성빌라 308호 우덕호! 308호 우덕호!”
쉽게 나올 놈이 아니다. 김만석이 우덕호의 이름까지 불러주는 ‘친절한 서비스정신’을 발휘하자 308호의 베란다 문이 열렸다. 우덕호였다.
“어이 우덕호씨! 따박따박 방구석에 쳐앉아서, 노인네가 새벽부터 뒤지게 고생해서 갖다 바친 우유를 곱게 쳐드셨으면, 우유 값은 내야지? 세상에 떼어먹을 게 없어서 노친네 우유 값 떼먹고 이사 가서 전화번호까지 쳐바꾸냐? 우유 값 십오만 구천구백 이십원 내놔!”
멀리서도 우덕호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는 게 눈에 보였다. 작전 성공!
“아니, 이 놈의 영감탱이가! 겨우 돈 몇 푼 때문에 이렇게 대놓고 사람 망신 줘도 돼? 이런 식으로 나오면 내가 곱게 돈 줄 것 같아?”
짜식이, 꼴에 사내라고 성깔은…. 쨔샤, 내가 환갑진갑 다 지나고 산전수전 공중전 잠수전 우주전 다 겪은 일흔여섯이다 이 놈아!
“쪽팔리는 거 알면 전화할 때 우유 값을 주등가! 모기 대가리에서 골을 빼서 먹든지, 진딧물 똥꼬에 빨대 박아 꿀물을 빨아먹을 일이지, 치사하게 늙은이 다리품 값도 안 되는 우유 값을 떼먹냐?”
송씨는 오토바이 헤드라이트 불빛에 순간, 눈이 부셨다. 동공에 사로잡혔던 검은 반점이 사라지기도 전에, 뭔가가 갑자기 송씨의 관자놀이를 때렸다. 순간, 눈앞에 별이 번쩍이면서 다리가 휘청거렸다. 리어카를 놓치면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중심을 잃은 송씨를 리어카가 엄청난 무게로 밀어붙였다. 짐의 무게에 손잡이가 위로 들려버린 리어카가 뒤로 주저앉으며 좌좌자아아악~ 소리를 내며 미끄러지다가 왼쪽 벽을 쾅 들이박았다. 와장창 쨍그랑 날카로운 소리가 골목 안에 울려퍼졌다.
가로등 불빛을 따라 송씨의 눈에 애써 모아온 빈병들이 조각조각 깨지고 파지들이 어지럽게 널린 모습들이 들어왔다. 다행히 몸이 다친 것 같지는 않았다. 얼마나 애써 모아온 것들인데…… 라면 몇 봉지를 살 수 있는 빈병들이 산산조각난 파편으로 길바닥에 흩어져 있었다.
왜 이렇게…… 사는 게…… 힘들지……?
그렁그렁 맺히려는 눈물을 참으며 송씨는 잠시 길바닥에 손을 짚은 채 주저앉아 있었다. 늘 혼자였다. 몇 십년 동안. 아니 거의 평생 동안. 넘어져도 일으켜줄 사람 하나 없다. 아니, 다친 데 없냐고 물어봐 주는 사람 하나 없다. 혼자다. 늘.
그 순간이었다. 엎어진 채 주저앉은 송씨의 손 앞으로 신발 한 쌍이 보였다. 그 위로 바지춤이 보였다. 사람이었다. 그 사람. 우유배달 오토바이. 자명종 할아버지.
그래, 들리지 않아도 알 것 같네. 귀로는 안 들리지만 마음으로는 들리는구려……
“왜 이렇게 사람을 놀래키고 걱정을 시키는 거예요…… 정말이지 사람이 어찌 그래요?”
이젠 어쩔 수 없군…… 난…… 나는……
그러나 쉽게 입이 떼어지지는 않았다. 말은 입안에서만 맴돌았다. 아내의 허락도 받지 못했다. 그래서 돌아오는 길에도 마음이 무거웠다. 그러나 송씨의 눈 속에서 반짝이는 눈물이 모든 마음의 짐을 내려놓게 했다. ‘할아버지, 말해요…… 당신을 사랑합니다, 하고…… 여자는 말해줘야 해요. 남자랑 달라요……’
“너무 하……”
김만석이 송씨의 말허리를 잘랐다.
“난 그대를……”
송씨가 김만석의 입을 쳐다보았다. 멈칫멈칫 하던 김만석의 입이 열리고 오랫동안 준비해왔던 말이 드디어 나왔다.
“……그대를 사랑합니다.”
세상의 모든 말들이 멈추었다. 잠시 세상의 모든 시간이 멈추었다. 우주의 모든 시간과 공간이 지금 이 시간 옥수동 160번지 언덕길 위에서 잠시 멈추었다가 가는 것 같았다.
지금 김만석에겐 오직 송씨, 송이뿐 밖에 보이지 않았다. 아무런 말도 나누지 않았지만, 수많은 말들을 나눈 것처럼 그렇게 시간이 멈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