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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역사소설 > 한국 역사소설
· ISBN : 9788990496621
· 쪽수 : 464쪽
책 소개
목차
헌부지례(獻?之禮) / 파열음 / 검추레한 잔나비 / 공작(工作) / 히데요시의 답서 / 문제의 여섯 글자 / 이상한 사람들 / 동인도 모르고 서인도 모르고 / 명으로 간 통지문 / 짙어 가는 전운 / 막후에서 움직이는 사람들 / 오해와 변명 / 대명 황제 주익균 / 울부짖는 히데요시 / 전쟁의 설계도 / 칼을 가는 자들 / 사라진 왜인들 / 군사 검열 / 쓰시마를 탓하지 말라 / 마침내 전쟁 / 살육전은 시작되고 / 무인지경의 이리 떼 / 고독과 분노 / 다가드는 죽음 / 조선의 인물 송상현 / 충성과 배신 / 도망 또 도망 / 임금은 주무시고 / 안이한 희망 / 종이 속 20만 병사 / 대책 없는 대책 / 죽을 자리 / 3천 기병 / 미투리 소동 / 허무한 전투 / 만 가지 계책이 무용하고 / 왕세자의 책봉 / 신립 장군 / 탄금대의 결사항전 / 창경궁의 통곡소리 / 불타는 궁궐 / 그믐밤의 피란길 / 여보시오, 상감마마 / 개성의 민심 / 북으로 / 적은 서울에 들어오고 / 비극의 장군 신각
저자소개
책속에서
당쟁이라면 복잡할 것이 없었다. 반대당의 의견에 반대하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쳐들어오고 안 들어오고는 동인도 모르고 서인도 몰랐다. 판단이 서지 않기는 마찬가지여서 당론(黨論)이라는 것이 없었다.
이 일만은 당론이 없기 때문에 서인 황윤길과 동인 김성일은 각각 자기 소신대로 말했고, 동인 허성은 소신대로 서인 황윤길에게 동조할 수 있었다.
여태까지 만사 흑이 아니면 백이었다. 그런데 이것은 흑일 수도 있고 백일 수도 있었다. 임금도 난감하고 신하들도 난감했다.
“히데요시는 어떻게 생긴 사람인고?"
임금이 화제를 돌리자 황윤길이 대답했다.
“눈에서 광채가 나는 것이 대담하고 지략이 있는 사람으로 보였습니다."
그러나 김성일의 소견은 달랐다.
“아니올시다. 눈은 쥐를 닮은 것이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其目如鼠 不足畏也)."
좌중에는 웃음이 터지고 비로소 화색이 돌았다.
히데요시는 두려울 것이 없다―이것은 불안 속에 사람마다 고대하던 한마디였다. 그는 바다 건너 쥐새끼에 불과하고 더 이상 논의할 거리도 못 되었다(《선묘보감》).
사람들은 김성일에게 찬탄의 눈길을 보냈다. 높은 식견에 강직한 성품, 일본 사람들도 그에게는 꼼짝 못했다고 했겠다. 그의 눈에 어김이 있을 리 없었다.
류성룡은 사석에서 다시 한 번 김성일에게 물었다.
“김 형 말씀이 황윤길과 다른데 만일 전쟁이 일어나면 어떻게 할 작정이오?"
“나라고 일본이 끝까지 움직이지 않는다고 단언할 수야 있겠소? 다만 황윤길의 이야기가 너무 지나쳐서 안팎이 놀라 어찌할 바를 모르니 이것을 풀어 주려고 한 말이오."
벼슬은 류성룡이 월등 높았으나 김성일은 퇴계 문하의 선배로, 나이도 4세나 연상이었다. 이 선배가 국가 대사에 허튼소리를 할 리는 없고, 류성룡은 의심하지 않았다.
허튼소리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부산에서 오억령의 긴급 보고가 올라왔다.
겐소가 분명히 말하기를 내년에는 조선에 길을 빌려 명나라에 쳐들어간다고 합니다(玄蘇明言 來年將假道 入犯上國).
그는 일본 사신들의 언동을 상세히 기록하고 자기가 보기에는 이것은 공연한 협박이 아니고 반드시 전쟁이 일어날 것 같다고 결론을 맺었다.
오억령은 원만한 인물이었다. 평생 누구 하나 다친 일이 없고 모난 말 한마디 하는 일이 없는 침착한 사람이었다. 그런 오억령이 이렇게 긴급 보고까지 올린다는 것은 예삿일이 아니었다.
“정말 전쟁이 일어나는 것은 아닐까."
조정의 대신들은 또다시 가슴이 싸늘했다.
일어난다, 안 일어난다, 갑론을박으로 떠들썩했다. 그러나 전쟁은 생각만 해도 기가 막혔다. 더구나 아무리 보아도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원수진 일은 없고 따라서 그가 쳐들어올 까닭도 없었다. 전쟁이 없기를 바라는 다수의 소망은 소수의 염려를 압도하였다.
“주선을 안 하면 전쟁이오!"
“전쟁이라니?"
“내년 봄에는 쳐들어온단 말이오."
박홍은 겁이 많은 사람이었다. 소 요시토시가 주먹을 쥐고 눈을 부릅뜨는 품이 정말 쳐들어올 것 같기도 했다. 그렇다고 당장 굽히는 것은 체모 없는 일이었다.
“그런 허튼소리, 누가 곧이듣겠소?"
“수사 어른, 내가 누군지 아시오?"
“당신, 쓰시마 도주 아니오?"
“내 말소리는 들리오?"
“들리오."
“멀쩡하구만."
“무슨 망측한 소리요?"
“눈과 귀가 제대로 박힌 사람들이 어째서 보고 싶은 것만 골라 보고 듣고 싶은 것만 골라 듣소?"
박홍은 염소수염을 한바탕 훑어 내리고 선언했다.
“공자님이 말씀하시기를, 예(禮)가 아닌 것은 보지도 듣지도 말라고 했소(非禮勿視 非禮勿聽)."
“답답하오."
“답답한 것은 당신네요. 밥 먹고 할 일이 그렇게도 없소? 무시로 바다를 건너와서 실없는 소리나 하고."
“당신과 얘기해야 소용이 없겠소. 당신네 조정에서 회답을 받기 전에는 안 돌아가겠소."
소 요시토시는 배에 들어가 버티고 앉았다. 그의 주위에는 수십 명의 칼 찬 왜인들이 앉기도 하고 서기도 하고, 알 수 없는 소리를 지껄이면서 어떤 자는 너털웃음을 치기도 했다.
박홍은 돌아와 서울에 급사를 띄웠다. 소 요시토시와 주고받은 내용을 소상히 알리고, 아무래도 수상하다고 몇 마디 덧붙였다.
8일 만에 조정의 회답이 왔다.
도대체 일본에 통신사를 보낸 것부터 실수였다. 자금(自今) 이후 이 문제를 입에 올리는 왜인들은 상종하지 않을 터이니 그대도 일체 상종하지 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