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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시 > 한국시
· ISBN : 9788992219617
· 쪽수 : 127쪽
· 출판일 : 2015-11-13
책 소개
목차
시인의 말
제1부
초경/ 사막의 광대뼈/ 국수 삶는 저녁/ 아무도 돌아오지 않은 봄바다/ 산막리 백작의 만가대 수업시대/ 백수광부의 노래/ 얼어붙은 호수에서 체포되다/ 닭 기르는 사내/ 검은 기와집에 갇힌 그믐밤/ 체 내리는 집/ 장봉도에서/ 오월을 바라보는 사중주/ 302호에는 달집이 없다/ 꽃샘추위/ 봄비
제2부
달의 뒤편/ 마지막 화상/ 풍랑주의보/ 라 메르에서 파도치기/ 물망초 따라 포세이돈 어드벤처/ 백내장/ 북서방 제주 표류기/ 내리의 밤, 1984/ 좋구나 만화방창/ 다비식/ 시든 꽃/ 가을에 흘린 피에로/ 그늘의 사생활/ 설악에서 끊어온 옷감/ 미조항에서
제3부
밤의 가스파르/ 에튀드 타블로/ 호루겔 피아노/ 옴브라 마이 푸/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 신들의 황혼/ 발퀴레의 기행/ 아이네 클라이네 나흐트무지크/ 동물의 사육제/ 푸가의 기법/ 랩소디 인 블루/ 봄의 제전/ 짐노페디/ 켄터키 옛집
제4부
병자년 밤눈/ 갱시기죽/ 마지막 병어회/ 아버지가 삼킨 달/ 모르시기 누이/ 돼지가 마다에 쓰러진 날/ 폐광/ 싸락눈 소리만/ 슬픈 항해/ 파사칼리아/ 라면 레서피/ 달의 인력
저자소개
책속에서
소나기 내린다
아내에게 전화 건다
수화기에서 빗소리 들린다
비가 오면 아내는 가늘어진다
빗줄기는 혼자 서 있지 못한다
누군가 곁에 있어야 걸을 수 있다
가늘어진 아내가 국수를 삶는다
빗줄기가 펄펄 끓는다
꽉 막힌 도로가 냄비 안에서 익어간다
빗물받이 홈통에서 육수가 흘러나온다
가로수 이파리들이 고명으로 뿌려진다
젓가락을 대자 불어터진 도로가 끊어진다
지친 아내가 유리창에 습자지처럼 붙는다
빗줄기가 아내의 몸을 베낀다
혓바닥이 아내를 집어삼킨다
- '국수 삶는 저녁' 전문
버스 종점 술집을 우연히 들여다봤어. 젊은 여자가 가랑이 사이로 머리를 처박고, 글쎄 면도를 하고 있었던 거야. 양은 세숫대야에는 해초와 비늘이 한데 엉켜 둥둥 떠 있었어. 햇살이 여자를 향해 한 뼘 한 뼘 문턱을 넘었어. 한 걸음 뒤로 물러선 여자는 비누칠을 하면서 핫, 흐으, 핫, 흐으 하는 소리를 냈어. 깊은 구멍 속에서 나는 짐승 울음 같았지. 현기증이 났어. 건너편 차부집 개눈박이 배차 주임 눈빛이 번들거렸어. 버스 출발 시간은 들쭉날쭉했어. 축 늘어진 가슴을 짤랑이며 안내양들은 투덜거렸어. 술집 앞을 지나가면 묵은 김장독 냄새가 풍겼어. 마당에서 꺼낸 김장독을 물로 부실 때 그 여자 냄새가 났어. 그날 밤 꿈에 여자가 내 아랫도리를 감고 속삭였어.
한 자세로 겨울을 보낸 게 지겹지도 않니?
빨랫줄에 걸린 교복 바지 앞섶이 불룩해졌어. 꽃들이 달의 뒤편에서 할짝할짝 뒷물하는 밤이었어.
- '달의 뒤편' 전문
사람들은 강 건너편을 세월이라고 불렀다.
어린 나는 그 뜻을 잘 몰랐지만
아버지는 강가에 나가 하염없이 건너편을 바라보았다.
그런 날이면 검은 기와집 할아버지는
종일 낡은 서가에서 살았다.
할아버지 침침한 눈이 더듬거리며
열하일기를 펼칠 때
강 건너편에서는 흰 광채가 일었다.
그곳에 다녀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들리는 말에는 거대한 소금왕국이 있었다고 한다.
액체가 고체로 서서히 변하는 신비한 고장,
호기심 많은 아버지는 강물에 뛰어들었다가
거센 물살에 그만 정신을 반 놓아버렸다.
할머니는 아버지 이마를 짚어보면서 혀를 끌끌 찼다.
할아버지는 그저 탁, 소리가 나도록
책을 덮을 뿐 미동도 않고
문틈 사이로 쏟아져 들어온 무성한 햇살과
먼지들의 난무를 지켜보았다.
결국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영인본이었다.
그해 겨울, 낡은 서가에는 원본이 사라지고
영인본만 홀로 남아 자리를 지켰다.
먼지는 당분간 그를 지켜줄 것이다.
영인본은 속성상 끊임없이 먼지를 그리워하니까.
나는 검은 기와집이 언젠가 흔적도 없이
무너질 것을 믿는다.
밤마다 주문에 걸린 고양이들이
잡풀 솟은 지붕 위를 돌아다니며
식은땀 흘리는 영인본 입 속으로
가느다란 약물 같은 울음을 흘려보낼 때
뜬다, 저 그믐달,
아래서 숨을 헐떡이는 영인본
창백한 김이 피어오르는 우물
헛간에서 예리한 그림자를 끌고 나와
사방을 찬찬히 둘러보는 원전의 도포자락
나는 마당으로 내려앉아 중얼거린다.
이건 한낱 악몽일 뿐이야,
대문에 빗장이 단단히 걸린
검은 기와집,
마당에 갇힌 그믐밤이
고약처럼 응고된다.
- '검은 기와집에 갇힌 그믐밤' 전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