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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시 > 한국시
· ISBN : 9788992219969
· 쪽수 : 140쪽
· 출판일 : 2021-03-19
책 소개
목차
제1부
빨랫감/ 시계 가게/ ///부끄러운 시/// 무릎의 점/ 허기/ 몽마/ 파문/ 낮비/ 무효화/ 증발/ 왜곡/ 가지런한 불행
제2부
네 시를 읽는 오후 네 시/ 메아리/ 짧은 꿈/ 가시/ 물고기와 새/ 어느 도배공의 손/ 지각/ 치사량/ 새벽/ 봄눈/ 정전/ 좋은 예감
제3부
덤/ 달이 떨어진다/ 억지/ 후회/ 집, 시/ 밑줄을 그어 줘/ 어른/ 눈이 떠지지 않는 꿈/ 육십 페이지/ 낙하/ 그리운 사람들/ 그냥
제4부
물기 어린 어둠/ 벽지를 뜯어내면/ 식은 붕어빵/ 틀/ 행간/ 꿈의 자취/ 동경/ 한 페이지/ 겨울이 와/ 하얀 탁상시계/ 환청/ 얘기해 줘
저자소개
리뷰
책속에서
A 자 모양의 빨래 건조대에 늙은 시집 한 권이
널려 있다 냉장고에서 아이스크림을 꺼내느라 읽던 책을 잠시 걸쳐 놓고 있었다
초콜릿 맛 아이스크림 한 통을 퍼먹으며 사이사이 책을 몇 번
노려본다 그때마다 책에서 오래된 초콜릿 맛이 난다
시집은 건조대 위에서 빨랫감의 기분에 대해 생각한다
볕도 없고 비만 내리지만 시집은 실제 빨랫감이 아니라
별로 상관없다 시, 와 비, 는 비슷한 글자이니 더더욱 괜찮을지 모른다
시집은 한 번 읽힌 뒤 쭉 책장에서 노쇠해져 가고 있었기 때문에
그대로 잊히는 운명을 맞이할 참이었기 때문에
자신이 다시 선택된 것도, 지금 건조대 위에 널려 있는 상황도 다 꿈같고
몇 번씩 입혀지고, 세탁되는 빨랫감의 기분을 알 리도 없다고 판정한다
시집이니까, 시옷 자로 펼쳐 머리에 써 본다 내가 시가 된 것 같다
모자가 된 시집 역시 나를 감싸 주고 감춰 주니 비로소 집이 된다
이제야 시집다워지고
이제야 빨랫감의 기분을 조금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책을 바닥에 내려놓는다 여전히 시옷 자 모양으로
다른 늙은 시집 한 권을 더 꺼내 똑같이 펼친 뒤
나란히 붙여 주니 둘은 웃는 얼굴이 된다
그사이 나는 초콜릿 아이스크림 한 통을 다 먹었고
늙은 시집과 다른 늙은 시집에서도 오래된 초콜릿 맛이 났다
- 「빨랫감」 전문
멀리 푸른 산들이 여러 겹으로 겹쳐 있었다
눈앞의 수면에는 빛살이 가득 늘어박혀 있었다
부허한 마음을 수습하기에 좋은 풍경이었다
좋은 날이었다
문득, 당신이 내 안에 숨어들어 일으킨
파문을 형상화하고 싶었다
내가 고개를 돌린 뒤에야 닿곤 하는 늦은 눈동자
살금살금 다가와 어깨를 토옥 건드리는 여린 손길
정적 속 스스럽게 한번 터는 마른기침, 같은
나는 가장 반질반질 윤이 나는 돌멩이를 찾았다
짝짝이 신발 중 거추장스러운 쪽을 벗어 던지고
앙감질로 힘차게 뛰었다
돌멩이는 선연한 곡선을 그리며 날아
수면에 작은 파문을 일으켰다
그것은 아주 조심스러웠고
눈이 부셨다
- 「파문」 전문
플랫폼에서 어름거리며 우는 사람을 보았다
네가 생각났다
(누가 울면 따라 우는 너는 늘 시인 같았다)
기차 안에서 다리 떠는 사람을 셋이나 보았다
그들은 믿지 않을 테니 상관없고
내 복만 달아나는 기분
(세상의 모든 속설을 믿는 너는 늘 시인 같았다)
좌석에 앉아 편지 봉투를
뜯는다, 마침내
수취인 란에 너는 또 내 이름을 멋대로 지어 썼다
이름을 짓는다는 것,
시와 가장 비슷한 일이다
(이름 짓기가 취미인 너는 늘 시인 같았다)
너와 반짝이는 장면을 공유하며 명명하고 싶을 때마다
이미 네가 그것에 붙인 이름이 있어
나는 함부로 시인이 될 수 없었다
너는 이채롭고 극렬하며 무해한 말들만 하는 사람
어떤 언어들은 그 자체로 시 같아서
너는 시를 쓴 적 없어도 항상 시인이었다
오래전 네가 쓴 편지를
읽는다, 마침내
( )랑 0이 너무 닮아서 몇 번 잘못 읽었다
( )나 0이나 없는 셈 칠 수 있는 거니까 착각해도 별 문제는 없었다
아니, 그러나 분명 존재하는 것이기도 하지
그게 없으면 제대로 설명이 안 되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너를 자주 오독했다
내가 열린 ( )이고 네가 최초의 0이라면
내가 너를 학습해도 될까
너의 모든 걸 표절해도 될까
기침이나 한숨이나 그림자나 발자국이 되어도 될까
숨 없는 너를 만나러 가는 길
창밖의 세상은 울렁거렸고
씀벅이는 눈으로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니 오후
네 시였다
(네가 울까 봐)
울지는 않았다
- 「네 시를 읽는 오후 네 시」 전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