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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보지 못했던 우리선수

우리가 보지 못했던 우리선수

(뿌리를 잊지 않는 재일 축구선수들의 역경과 희망의 역사)

신무광 (지은이)
  |  
왓북
2010-06-08
  |  
13,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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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보지 못했던 우리선수

책 정보

· 제목 : 우리가 보지 못했던 우리선수 (뿌리를 잊지 않는 재일 축구선수들의 역경과 희망의 역사)
· 분류 : 국내도서 > 건강/취미 > 구기 > 축구
· ISBN : 9788996338024
· 쪽수 : 300쪽

책 소개

'인간 불도저'라는 별명처럼 강철 체력으로 그라운드를 누비는 정대세. 인공기를 가슴에 달고 활약한 그의 국적은 뜻밖에 북한이 아닌 한국이다. 도대체 한국 국적(일본 국적법상)의 그가 북한대표가 된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가 보지 못했던 우리선수>는 뿌리를 잊지 않는 재일 축구선수들의 역경과 희망의 역사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목차

I부: 국경을 넘나드는 신세대 재일 선수들

프롤로그: 국경 위에 그리는 꿈의 지도

1장: 역경은 나를 강하게 한다 - 정대세
한국국적으로 북한대표가 된 사연/북한을 조국으로 생각하게 된 이유/ 맞는 아들을 보고도 눈물만 삼키던 어머니/ 주눅 든 J리그 생활/ 북한 국가대표로서의 갈등/ 흔들리는 정대세를 잡아준 사람들/ 내가 변하자 팀웍이 보이기 시작했다 / 애국가를 들으며 쏟은 눈물

2장: 경계선에 사는 운명과 기쁨 - 안영학
현역 북한대표가 K리그로/ 쉽지 않은 한국행을 택했던 까닭/ K리그에서 감격한 진짜 이유/ / 신세대 북한 대표선수들의 모습/ “이중간첩 안영학”/ 북한을 월드컵에 진출시킨 박지성의 골/ 수원 삼성과의 갈등/ “안영학을 추방하라” / 차범근 감독과의 담판과 첫 선발출장

3장: ‘재일’의 한계를 넘어 - 량용기, 리한재
한국행을 고려하다 북한대표가 되다/ 북한 팀에서 겪은 서운함/ 따돌림과 싸우던 어린 시절/ 재일인 출신으로 J리그팀 주장이 되다/ 일본과의 대결에 모든 것을 걸다/ 흥분한 북한, 일본선수 사이에서

4장: 한국리그의 추억 - 박강조, 정용대, 정이세
어릴 적 그의 꿈은 한국대표였다/ K리그에서 겪은 한일 문화의 차이/ 운명의 재일대한축구단과의 만남/ 이념을 초월한 스승 김익조의 조언과 도움/ 꿈을 되살려준 아우 정대세/ 한국 실업축구 팀에 오게 된 사연/ 형의 한국행을 우려한 정대세

II부: 민족혼으로 지켜온 재일 축구의 역사

5장: 재일 축구계의 대부 - 김세형 김익조 부자
자이니치 J리거들의 DNA/ 일본의 풀뿌리 축구는 어떻게 시작됐나/ 민족학교의 창설과 고난/재일조선축구단을 그만두다/ 축구왕국 브라질로 /J리그가 재일축구에 끼친 영향/

6장: 재일축구의 조련사 - 김명식, 김종성
‘일본이름으로 바꾸면 축구시켜 주겠다’/ 60년대 북한축구는 왜 강했을까?/ 필승 코스가 된 ‘조고참배’/ 소수파의 넓어진 가능성에서 희망을 본다/ 나는 일본에는 절대 질 수 없다는 세대였다

7장: 첫 북한대표와 J리거 아들 - 김광호 김성용 부자
너는 네가 생각하는 축구를 해라/ 아버지의 그늘(원제목: 지나친 관심이 부른 부작용)/ 아버지를 감독님으로 부르던 시절/ 축구부에 꿈과 프로 의식을 심어준 선배 정대세/ 아버지의 맞수에게 발탁되어 걷게 된 J리그

8장: 새로운 도전 - 신재범, 오동근, 김영기
재일인 출신의 첫 J리거/ 조선대학교를 이탈하다/ 240대1의 서바이벌 게임/ 배신자로 손가락질 당한 아픔/ 일본에서 아프리카로의 도전기

9장: 재일 축구의 역사
전설의 재일조선축구단의 시작/ 최강 조선고급학교 축구부/ 재일조선축구단의 해산/ 새로운 시대가 열리고 있다/ 재일조선인축구단의 맥을 잇는 FC 코리아

III부: 또 다른 길

10장: 귀화에 담겨진 마음 - 이충성
이충성을 취재하기로 결정하기까지/ 떳떳이 우리 이름으로 다녔던 일본의 중고교 시절/ 한국에서 들은 욕설(원래 제목: 한국에 간 재일선수에게 던져진 욕설)/ 나는 도대체 누구인가/ 귀화에 대한 심각한 고민/

에필로그: 어느 재일 코리안의 이야기

저자소개

신무광 (지은이)    정보 더보기
일본 도쿄 출신 재일교포 3세로 스포츠 전문 기자. 대학 졸업 후 축구를 중심으로 한국 스포츠, 문화와 관련한 다양한 기사 및 컬럼 등을 한국, 일본 양국 신문, 잡지, 인터넷 등에 기고하고 있다. 2002년 미즈노 스포츠 라이터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저서로 ‘히딩크 코리아의 진실’, ‘우리가 보지 못했던 우리 선수’, ‘위험한 LINE 일본인이 모르는 불편한 진실’이 있으며 ‘LIBERO 홍명보 자서전’, ‘박지성 자서전 멈추지 않는 도전’ 등을 일본에 번역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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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프롤로그

재일 코리안 3세로서 도쿄에서 태어난 나는 초, 중, 고의 모든 과정을 도쿄도 내 조선학교에서 배우며 자랐다. 조선학교는 재일 코리안의 권리옹호단체인 총련이 운영모체가 되어 '국어'를 비롯하여 역사, 지리, 음악 등 한반도 역사와 문화를 가르치는 곳이지만 총련이 북을 지지하고 있는 관계로 교육방침이 비교적 북쪽에 비중을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나는 고3때 수학여행으로 북한을 방문하기도 했다. 나의 할아버지는 한국 제주도 출신이지만 내가 처음으로 '조국'이라고 인식했던 것은 북쪽이었다.
그런 조선학교 남학생들에게 축구 북한대표팀은 동경의 대상이었다. 어려서부터 북한에 접할 기회가 많고 철이 들자마자 '축구는 조선의 국기'라는 말을 들으면서 큰다. 북한 대표가 아시아에서 처음으로 8강에 진출한 66년 월드컵의 쾌거는 '조선 축구의 빛나는 승리'라고 배웠다. 수업을 뒷전에 미루어 놓은 채 그때 시합 녹화를 감상하는 일도 여러 번 있었다. 과외 클럽활동 참여가 의무화되는 초급학교 4학년이 되면 남학생들은 망설임 없이 축구부에 들어갔다. 같은 세대 일본 아이들이 글러브나 배트를 들고 야구공을 쫓아 뛰는 속에서 축구공을 차기가 쑥스럽기도 했지만 누구나가 조국(=조선)의 국가 대표로 뛰는 날을 꿈꾸며 축구공을 찼다.
북한대표가 일본에 와서 일본대표와 맞붙게 될 때에는 학교는 무슨 축제날처럼 들뜨곤 했다. 다름 아닌 환상의 북한대표 모습을 직접 볼 수 있는 귀한 기회이기 때문이다. 85년 3월 멕시코 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 89년 6월 4일 이탈리아 월드컵 예선. 일본대표가 홈에서 북과 맞대결하는 시합 때마다 우리들은 '이겨라! 우리선수!'라고 한글로 쓴 현수막을 만들어 도쿄 국립경기장을 찾았다.
일본과 북한은 90년과 92년의 다이너스티컵과 92년 아시안컵 그룹 리그에서도, 그리고 93년 카타르 도하에서 있은 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에서도 맞붙었다. 한밤중에 TV생중계된 도하의 시합 날에는 재일동포 친구들끼리 관전모임을 열었다. 우리가 성원을 보낸 것은 라모스 루이나 미우라 가즈요시가 아니라 그 동안 동경해 마지않던 '조국'의 선수들이었다. 예비지식이 없어 얼굴과 이름이 일치하지 않는 선수들이었지만 그들을 응원함으로써 '코리안'으로 태어난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지만 내가 북한대표에 대해 품고 있던 동경심은 나이를 먹을수록 스러졌다. 이유는 한 가지가 아니다. 예를 들면 초급학교에서 고급학교까지 다닌 조선학교를 졸업한 뒤에 진학한 일본 대학에서 그때까지만 해도 몰랐던 갖가지 사실들에 맞닥뜨린 것도 관계있을 것 같다. 조선학교에서는 '미국과 그 괴뢰였던 한국이 시작했다'고 배운 '조국해방전쟁'은 대학 수업이나 도서관에 있는 문헌들에는 '남침으로 시작한 <조선동란>이었다'고 쓰여 있었고 TV를 틀면 '지상낙원'이라고 배웠던 북한 사회의 모순들이 연달아 방송된다. 무엇을 믿고 무엇을 의심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다른 한편으론 대학 졸업 후 스포츠 라이터로서 활동하기 시작한 일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96년에 일본과 한국이 월드컵을 공동개최가 확정된 다음부터 나는 조선학교에서 닦은 어학력을 살려 한국 축구를 취재 테마로 정해 난생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했다. 당시 조선적(朝鮮籍)이었기 때문에 한국영사관에서 임시여권을 발급 받아 이루어진 방한이었다. 이후 여러 번 한국을 찾아 선수, 감독, 협회 관계자, 그리고 축구팬 및 일반 사람들과의 만남을 거듭하면서 예전에는 자기도 모르게 거리를 두었던 한국이 차츰 가까운 존재로 다가왔다. 정도 깊어졌다.
그리하여 2007년 겨울, 나는 그때까지 26년 동안 걸쳤던 '조선적'이라는 옷을 '한국적'으로 갈아입게 되었다. 국적을 바꾸어서 오랜 친구들한테 반역자라고 불리우지나 않을까, 자신의 반생을 부정하는 결과가 되지 않을까, 고민하고 망설이면서 거듭 자문해 보았지만 그러면서도 결단했던 것은 한국에 '보고 싶은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무슨 '주의'나 '사상'이 아닌 '사람'이 나로 하여금 한국을 향하게 했던 것이다. 어느새 한국 축구 취재를 위해서 한 달에 한 번 격으로 현해탄을 넘나들게 되었다.
한국뿐이 아니다. 일본에서 홍명보, 유상철과 같은 한국인 J리거들과 친분을 쌓고 박지성, 설기현 등 세계무대에서 활약하는 한국인 선수들을 취재하기 위해 축구의 본고장 유럽까지 다녀왔다.
거스 히딩크 감독이 이끄는 한국대표 팀의 해외원정에도 대동하여 그들이 2002년 월드컵에서 해낸 4강 진출이라는 쾌거의 현장을 함께 했다. 그 과정에서 선수들의 땀과 눈물을 알았고 그들의 고뇌와 갈등과 각오를 알게 되었다. 그런 모습들을 일본에서 잡지나 서적으로 발표할 기회가 주어지면서 나 자신이 큰 기쁨과 자신감을 얻을 수 있었다. 조선학교는 나에게 민족적 정체성을 심어주었지만 일본에서도 코리안으로 살아갈 자긍심과 자신을 준 것은 얼굴이 보이고 체온을 느낄 수 있는 한국 축구였다.
그런 한국 축구와 대조를 이루듯이 북한 축구의 모습은 좀처럼 보이질 않았다. 직업상 북한축구 동향에 주목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정체에 쉽게 다가설 수 없는 북한대표 팀에게 한국대표팀 같은 애착을 느낄 수가 없었다. 어느새 예전처럼 북에 감정이입 할 수가 없어진 내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던 내 앞에 북한대표가 다시 나타난 것이 2002년 9월 7일 서울에서 열린 남북 친선 축구대회였다. 승패나 결판을 내야 되는 시합도 아니거니와 FIFA 공인 A매치도 아니었지만 12년 만에 실현된 남북대결에 저절로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오랜만에 직접 본 북한선수들은 생각보다 몸이 작았고 한국선수들이 하는 말과 억양이 다른 그 독특한 말씨에 묘한 그리움을 느꼈다. 그런데 이 남북 친선시합 직후에 재일교포사회는 물론 일본까지도 발칵 뒤집어 놓는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난다.
2002년 9월 17일 고이즈미 쥰이치로 수상이 일본수상으로서는 처음으로 북을 전격 방문. 북한 김정일 총비서와 회담하였는데 그 와중에 북한이 일본인 납치사실을 인정하고 사죄하였던 것이다. 물론 그 전에도 일본에서는 핵 실험문제나 미사일 발사문제 등으로 북한의 이미지가 나쁘기는 했지만 북이 납치문제를 인정한 이후부터는 북한 때리기와 북한에 대한 혐오감이 절정에 달해 재일동포 사회가 크게 흔들리게 되었다.

두 나라가 복잡한 정치상황에 놓여 있기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축구 대결이다. 스포츠와 정치는 무관하다고 순진한 척 겉치레를 할 생각은 없지만 재미삼아 북의 정치체제와 축구를 혼동시키는 선정적인 일부 기사들은 아무리 그래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재일 코리안이 일본에서 '보이지 않는 존재'로 일컬어지는 것도 사실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외국인이라고 알아 볼 수 없고 말도 생활방식도 일본사람과 비슷해서 눈앞에 있어도 인식하기 힘들다. 그런 의미에서 재일 코리안은 '보이지 않는 존재'였을지도 모른다. 더구나 일본에서 태어난 3세, 4세 정도가 되면 명색이 조국인 한국이나 북한에서도 '우리나라 사람'이라는 인식을 하지 않는다. 한국에서는 '교포', 북한에서는 '동포'라고 따로 부르고 게다가 남북으로 나누어지기도 한다.
안영학도 북일전을 치르기 전에 절절하게 말했다.
“조선에 가면 "재일"이고 한국에 가면 "북"이라고 불리우지요. 일본에서는 조선인이고. 그렇게 생각하면 우린 그 어디에도 속해 있지 않은 것 아닐까요?”
그렇지만?. 그런 특수한 위치에 자리한 재일코리안들의 삶을 주제로 한 문학이나 영화가 화제를 모으고 출신이나 본명을 밝히면서 활약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특히 축구계에서는 많은 재일풋볼러(측구선수)들이 J리그 무대이서 활약하는 오늘날이다. 그 중 한 사람인 안영학은 말한다.
“북이요, 남이요, 일본이니, 일본이 아니라니 나는 나를 그 어디라고 규정짓고 싶지 않아요. 그래도 굳이 그래야 된다면 나는 '자이니치(在日)'라는 정체성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자이니치'라는 정체성으로 여기까지 살아왔다는 자부심도 있구요. 기대 받고 주목 받는 일에 부담감은 없어요. 오히려 보람이 있고 나 자신이 갈 수 있는 데까지 가볼려구요. "자이니치(在日) 축구"의 가능성을 점점 더 넓혀가는 것이 우리들의 사명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자이니치(在日) 정체성'. 그것은 국가에 의지하지 않고 민족에 순화되지도 않는다.
오히려 안영학은 순전히 풋볼러로 뛰고 또 뛰면서 볼을 쫓아가려고 한다. 안영학의 말에는 나라와 민족을 넘어 자신의 가능성을 쉼 없이 추구하면서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며 살아갈 '자이니치 풋볼러'의 각오가 녹아있다는 생각을 했다.
이런 '자이니치?? 축구 선수들의 정체성은 어떻게 만들어졌고 어디를 향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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